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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9월 16일 (연중 24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2년 9월 16일 (연중 24주일 /녹) 성서말씀

니니안(갈로웨이의 주교, 픽트의 선교사, 432년경) /의정부, 넙성리성당축성

 

제1독서: 잠언1:20-33

20 지혜가 거리에서 외치고 장터에서 목청을 돋우며 21 떠들썩한 네거리에서 소리치고 성문 어귀에서 말을 전한다. 22 "철부지들아, 언제까지 철없는 짓을 좋아하려느냐? 거만한 자들아, 언제까지 빈정대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자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거절하려느냐? 23 내 훈계를 듣고 돌아 서면 내 속마음을 부어 주고 내 속엣말을 들려 주련만, 24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25 나의 온갖 충고를 물리치고 훈계도 받아 들이지 않아 26 너희가 참변을 당할 때, 내가 웃을 것이며 너희에게 두려운 일이 닥칠 때 내가 비웃으리라. 27 두려움이 태풍처럼 덮치고 참변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기막히고 답답한 일이 들이닥치면, 28 그제야 너희들은 나를 부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29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30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

 

시편 19편

1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속삭이고 ◯ 창공은 그 훌륭한 솜씨를 일러 줍니다.
2 낮은 낮에게 그 말을 전하고 ◯ 밤은 밤에게 그 일을 알려 줍니다.
3 그 이야기도 그 말소리도 ◯ 비록 들리지 않아도
4 그 소리 구석구석 울려 퍼지고 ◯ 온 세상 땅 끝까지 번져 갑니다.
5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쳐 주시니: 마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이 ◯ 신나게 치닫는 용사와 같이,
6 하늘 이 끝에서 나와 하늘 저 끝으로 돌아가고 ◯ 그 뜨거움을 벗어날 자 없습니다.
7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사람에게 생기를 돌려주고 ◯ 주님의 법도는 변함없어 어리석은 자도 깨우쳐 준다.
8 주님의 분부는 그릇됨이 없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 주님의 법은 맑아서 사람의 눈을 밝혀준다.
9 주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영원토록 흔들리지 아니하고 ◯ 주님의 법령은 참되어 옳지 않은 것이 없다.
10 금보다, 순금덩이보다 더 좋고 ◯ 꿀보다, 송이 꿀보다 더욱 달다.
11 당신 종이 그 말씀으로 깨우침 받고 ◯ 그대로 살면 후한 상을 받겠거늘,
12 뉘 있어 제 허물을 다 알리이까? ◯ 모르고 짓는 죄 일랑 말끔히 씻어 주소서.
13 일부러 범죄할까, 이 몸 막아 주시고 ◯ 죄의 손아귀에 잡힐까, 날 지켜 주소서.
✤ 그제야 이 몸은 대역죄 씻고 ◯ 온전히 깨끗하게 되리이다.
14 내 바위요, 내 구원자이신 주여, ◯ 내 생각과 내 말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야고 3:1-12

1 내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2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읍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 3 말은 입에 재갈을 물려야 고분고분해집니다. 그래야 그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가 있읍니다. 4 또 배를 보십시오. 거센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크디 큰 배라도 아주 작은 키 하나로 조종됩니다. 그래서 키잡이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그 배를 마음대로 몰고 갈 수 있읍니다. 5 이와 같이 혀도 인체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엄청나게 허풍을 떱니다. 아주 작은 불씨가 굉장히 큰 숲을 불살라 버릴 수도 있읍니다. 6 혀는 불과 같습니다. 혀는 우리 몸의 한 부분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세상살이의 수레바퀴에 불을 질러 망쳐 버리는 악의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혀 자체도 결국 지옥 불에 타 버리고 맙니다. 7 인간은 모든 들짐승과 새와 길짐승과 바다의 생물들을 길들일 수 있고 또 지금까지 길들여 왔읍니다. 8 그러나 사람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읍니다. 혀는 휘어잡기 어려울 만큼 악한 것이며 거기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읍니다. 9 우리는 같은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1)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10 같은 입에서 찬양도 나오고 저주도 나옵니다. 내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되겠읍니다. 11 같은 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 나올 수 있겠읍니까? 12 내 형제 여러분, 무화과나무에 어떻게 올리브 열매가 달릴 수 있으며 포도덩굴에 어떻게 무화과 열매가 달릴 수 있겠읍니까? 짠 물에서 단 물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마르 8:27-38

(베드로의 고백/첫번째 수난예고)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28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하고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29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3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 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구하오니,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가 서로 용서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며, 날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함부로 전도하지 마세요^^ (마르 8:27-38)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마르코가 전하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맞는 말이다. 어서 널리 널리 전파하여라.” 하셔야 될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도리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십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예수님의 뜻을 받들자면 우리는 당분간 전도(傳道)를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함부로 세상에 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오직 예수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 이런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열심히 전하는 일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왜 그런가를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발끈하여 마음을 닫지 마시고 끝까지 생각하며 들어주세요.^^

 

우선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는 고백에서 출발합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표현과는 비슷하지만 약간 뉘앙스가 다르지요? 어떻게 다르냐 하면 예수님이 전해들은 어떤 인물이 아니라 함께 지내며 직접 알게 된 선생님으로 제시되고 있는 점입니다. 흔히 오늘의 본문을 가지고 “신앙은 남에게 전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하고 고백하는 내용이어야 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곤 합니다. 많이 들으셨지요?  저도 삼년 전 설교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중요한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고백하는 그 내용이 과연 어떤 의미인가를 정직하게 살피고 반성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복음서가 쓰여진 까닭은 사람들에게 무조건 “예수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앞세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도리어 많은 이들이 이리저리 경험한 예수 체험들의 주관적인 내용들을 정리하고 그 깊은 내용을 살피고 반성하여 객관적인 신앙으로 세우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 복음성경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명제를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명제의 의미를 깨닫고 그것을 삶으로 경험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서 마냥 자신의 신앙을 주장하고 고집하면 위험합니다. 그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하신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는 대신 자신이 바라고 상상하는 이미지를 “예수”라는 이름에 덧씌우는 것으로 만족해버리기 쉽습니다.

늘 되풀이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바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성이 예수고 이름이 그리스도인 어떤 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내용의 고백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는 고유명사이고 그리스도는 보통명사입니다. 예수라는 분의 삶과 그리스도(곧 메시야, 구세주)라는 개념이 함께 이해되고 그 관계가 이해되어야 어째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신가의 내용이 밝혀집니다. 성경에서 그 점을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예수와 그리스도를 같은 개념으로 바꿔서 사용합니다. “예수 =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초심자용 교리공부, 미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사영리(四靈理)의 설명 같은 것에 영향을 받은 탓일지 모릅니다. 그런 설명이 좋지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신앙의 성숙을 위해서는 “어째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되는가의 성경적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이단 사이비들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은 성경말씀대로 틀림없다. 우리도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우리 교주가 바로 다시 온 그 예수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은 “예수 = 그리스도” 라는 도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예수”라는 항에다 아무 인물이나 아무 견해나 바꿔치기해도 여전히 성립되는 그런 도식적인 설명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그 고백이 처음 제시되었던 복음 성경의 그 장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가보면 핵심적인 문제가 드러납니다. 마르코 복음의 이 장면 속에서는 스승인 “예수”라는 사나이가 계시고 세상 사람들과 제자들의 “그리스도(메시야)”에 대한 이런저런 기대만이 존재합니다. 이제 막 제자들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인식과 고백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어찌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신가”는 전혀 해명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곧 이어 베드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예수님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전혀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베드로께서 영통(靈通)한 능력을 가지고 남들보다 먼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맞히었다는 신기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도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의 기준을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으며 무엇을 경험했기에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전지전능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것일까요?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분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그토록 비참하고 무력하게 돌아가신다는 말씀일까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이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어 믿음을 포기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판단처럼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인 것일까요?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도 하신 말씀입니다. 사탄을 외모가 흉측한 괴물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사탄은 우리 마음 속 무의식에 거주하며 영향력을 미치는 이 세상의 지배체제입니다. 멀쩡하고 자연스럽고 당연스럽게 여기는 우리의 통념과 욕망을 사탄은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에너지로 삼습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우리는 이 세상, 곧 사탄의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무의식의 마음 안에 세상적인 통념과 세상이 부추기는 욕망이 꿈틀대는 한 우리는 사탄과 더불어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은 이 사탄을 추방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그  용감하고 신실한 베드로의 마음 속에서도 사탄은 틈을 노리고 있거니와 우리 마음은 오죽 하겠습니까? 눈 감고 느껴 보세요. 우리 마음 저 깊은 곳에 웃고 있는 사탄의 존재...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씀을 남 얘기, 베드로 얘기로 들으시며 내심 고소해하시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직면하는 문제입니다. 어떤 일을 하느님의 일로 처리할 것인가, 사람의 일로 처리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말이지요.

사탄을 물리칠 때 십자가 표시를 내세우는 장면을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보지만 그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입니다. 사탄의 속임수, 세상의 통념과 우리의 욕망을 물리치는 강력한 힘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세계와 하느님의 나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것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에는 십자가가 서게 됩니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인간의 “오만”과 “죽임”에 대하여 하느님의 “겸손”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이신 예수님은 끝내 십자가의 길을 걸어 사랑과 희생의 죽음을 맞으시며 “다 이루었다” 말씀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리스도로 높이 올려 지셨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들은 주님이 걸으신 그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열어주신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성자 하느님이시라 고백하고 찬양하게 됩니다.

어째서 예수님이 우리의 그리스도이신가요?  이제 대답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십자가의 길을 걸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진리와 승리의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과 죽음을 구원해 가시도록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란 단순히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 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의 길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길이었다는 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 길은 가장 좋은 길, 곧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전도는 그 십자가의 길을 당신과 내가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어가자고 권면하고 다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내 목숨을 잃어도 좋겠다”는 마음이 참으로 사랑으로 충만하고 지혜로 분명해질 때 까지 전도를 미루셔도 좋을 것입니다. 그 결심이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느껴지실 때까지는 다른 이를 전도를 못하시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실 필요가 없겠습니다. 어쩌면 함부로 전도를 안하시는 것이 차라리 나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라는 분이 있는데 믿기만 하면 살아서 물질축복부터 죽은 후에 천당까지 모든 일을 해결해준대” 하며 사람들을 이끄는 것 까지는 비록 악의가 없는 일이겠지만 혹시라도 악질적인 종교적 사기꾼들에게 걸리면 평생을 바치고도 복음의 정수는 깨치기 어렵게 됩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에서 출발하여 다단계사기에 사람을 계속 연결하는 일이 어리석고 악한 일임을 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 처음의 동기부터 잘 살필 일입니다.

 

진짜 전도는 우리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걸을 때” 시작됩니다.
피와 땀을 흘리며 걷는 우리 인생의 십자가 길들, 우리의 모든 믿음이 흔들리고 배신과 고통과 버림에 직면했던 우리들의 십자가 사건들, 그러한 생생한 경험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우리는 어찌하여 예수가 그리스도이신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

 

<강론초록2>

                  고백(告白)의 언어를 생활(生活)하는 삶 (마르 8:27-38)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유명한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기자는 베싸이다의 소경을 고쳐주신 이야기 다음에 이 장면을 기록하였습니다. 소경을 고쳐주실 때 예수님은 특별하게도(?) 두 번이나 그에게 손을 대면서 치유를 베푸셨습니다. 처음에는 완전치 못해서 사람이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였습니다. 다시 손을 대어 고쳐주시자 완전히 눈이 성해졌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 점차 완전해지는 과정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장면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물으십니다. 전해들은 남의 이야기를 넘어서 제자들 스스로의 판단과 고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언어는 <고백>입니다. 객관적 정보를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담아, 내 생각과 판단을 담아, 그리고 내 삶을 거는 다짐을 담아 엄연히 살아계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드리는 고백의 언어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고백은 우리 삶으로 뒷받침되고 실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으면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했으면 주님의 <종>된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그 분께 묻고 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어떤 자기 신념이나 주장(主張)을 내세우고 그것을  관철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세워진 신념이나 주장은 쉽게 고정되고 절대화됩니다. 그러나 고백은 처음에는 불완전하고 유동적일 수 있지만 살아있는 상대방과 함께 하는 삶의 과정을 통하여 점차 더욱 풍부해지고 깊어집니다. 처음에는 불완전한 고백이어도 좋습니다. 살아있는 고백은 우리의 삶과 더불어 때를 따라 반드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은 진정한 고백(告白)의 언어를 생활(生活)로 살아내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요, 멀고 먼 순례의 길이며, 가는 이 많지 않은 좁고 험한 길로서, 곧 우리의 참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