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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6월 19일 (성삼위일체주일) 성찬례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6월 19일 성삼위일체주일 성서말씀
 
창세 1:1-2:4
1 1)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시던 한처음이었다."라고 옮길 수도 있다.  2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하느님의 2)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2)"바람", "영", "혼", "얼"이라고 옮길 수도 있다.
3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4 그 빛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5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 낮 하루가 지났다.
6 하느님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7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놓으셨다. 8 하느님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9 하느님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느님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1 하느님께서 "땅에서 푸른 움이 돋아나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나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2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 나무가 돋아났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3 이렇게 사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14 하느님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15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6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17 하느님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놓고 땅을 비추게 하셨다. 18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19 이렇게 나흗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20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1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23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24 하느님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5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26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내시고 28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29 하느님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30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31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1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2 하느님께서는 1)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1) 히브리어 본문은 "이렛날"로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칠십인역과 사마리아 오경의 전통을 따랐다. 3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4 하늘과 땅을 지어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시편 8

1 하느님, 우리의 주여!   * 주님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님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   * 어린이, 젖먹이들도 노래합니다.
2 이로써 원수들과 반역자들을 꺾으시고   * 당신께 맞서는 자들을 무색케 하셨습니다.
3 당신의 작품, 손수 만드신 저 하늘과   * 달아 놓으신 달과 별들을 우러러 보면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생각해 주시며 *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보살펴 주십니까? 5 그를 하느님 다음가는 자리에 앉히시고 * 존귀와 영광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6 손수 만드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고 * 모든 것을 발밑에 거느리게 하셨습니다.
7 크고 작은 온갖 가축과   * 들에서 뛰노는 짐승들 하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물길 따라 두루 다니는 물고기들을   * 통틀어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9 하느님, 우리의 주여!   * 주님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2고린 13:11-13

11 형제 여러분,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온전하게 되기를 힘쓰며 내 권고를 귀담아들으십시오. 그리고 뜻을 같이하여 평화롭게 사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셔주실 것입니다.

12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마태 28:16-20
16 열한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는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뵙고 엎드려 절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본기도> 거룩하신 하느님, 교회로 하여금 삼위일체의 영광과 신비를 깨닫게 하시고 이 신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이 신비를 굳게 믿어 진리로 하나 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성 삼위일체(聖 三位一體), 사랑의 관계

“환원주의(還元主義)”라는 어려운 말이 있습니다.  (사실 어려운 “개념”이나 “이론”도 본래는 더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쉽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생깁니다.  조금만 어렵게 느껴지면 “골치아프다” 고개를 흔들며 “어려운 것은 죄악이다. 진리는 단순한 것이다.”고 주장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대개는 그 어려운 말들의 필요성을 공감하게 됩니다.)

환원주의는 “다양한 현상을 기본적인 하나의 원리나 요인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뜻합니다. 단순하고 명쾌한 답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매력을 느낍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환원주의의 눈에는 아름다운 미인도 앙상한 해골로 보일 뿐입니다.^^

“믿음이 중요하지 교회가 무슨 필요인가?”“복음이 소중하지 성공회가 무슨 소용인가?” “하느님이면 그냥 한 분 하느님이지 복잡하게 무슨 삼위일체 교리야?” 이런 생각이 바로 우리가 조심해야 할 환원주의적 사고의 일종이라는 말씀을 드리려고 서두가 길어졌습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하는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three persons)이지만  그 하나의 본체(One substance)이시다”는 설명은 4-7세기의 논쟁에서 그리이스 철학 개념을 빌린 것이어서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와 닿는 설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교리가 표현하고, 정리해서 지키려고 했던 신앙의 체험은 매우 풍성한 내용이 있고 고민이 있고 진실이 있습니다. “쓸데없이 복잡한 설명은 몰라도 된다^^” 하고 그 내용까지 모조리 무의미한 것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바울로 사도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어주시는 친교를 여러분 모두가 누리시기를 빕니다” 하고 기원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삼위일체의 중요한 내용은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경험과 고백입니다. “하나이냐 셋이냐” 하는 것은 우리들의 생각이요 개념의 일입니다. 그런 개념들이 하느님의 신비를 파악하거나 좌우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느님께서 절대적인 초월자요 신비 자체이시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어주심을 경험합니다. 추상적이고 추론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삶과 믿음으로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영과 삶을 통한 관계, “영적으로 참되게” 맺는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 사랑과 이웃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영이시고 예수님은 성령의 사람이셨고 우리도 영적인 존재임을 압니다. 우리는 성 삼위의 신비와 사랑 안에 일치됩니다.

삼위일체의 중요한 가르침은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랑”이시라는 점입니다.
그 사랑이 고정된 실체의 일이 아니라 역동적인 “관계”의 일임을 삼위일체 교리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그 사랑의 관계, 삼위일체의 신비를  삶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

<강론초록2>             
                                            성 삼위일체(聖 三位一體)

“삼위일체” 교리는 4세기부터 7세기에 걸쳐 그리이스 철학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던 당시의 신학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하느님 아버지와 어떤 관계 안에 있는지를 알아듣기 위해 오래 동안 고심하고 논쟁한 결과로 확정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세계에는 그런 철학도 없고, 그런 논쟁도 없기에 세 분이 한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 어려운 이론으로 빠져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하느님이 역사 속에서 세 개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삶을 베푸시는 분, 자비와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예수라는 한 사람의 인격 안에, 그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깨달아야 할 자비와 사랑, 그리고 그것을 누리는 삶의 실천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자비와 사랑을 배워서 새로운 도전과 실천을 하는 우리 안에 하느님은 성령으로 혹은 숨결로 살아 계십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 신비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위한 말입니다. 하느님과 관계된 세 개의 이름(성부, 성자, 성령 곧 창조주, 구세주, 협조자)이 있고 그 이름들은 모두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말합니다.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이 우리의 원천이시고, 그 자비와 사랑을 구체적으로 삶으로 살아 보여주신 예수님이 계시고, 우리 안에 그 자비와 사랑을 발생시키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도 성령도 그 구원이 우리 안에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다음으로 높은 제2인자가 아니고 성령은 기적을 행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있게 하는 이름들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우리 안에 발생시키고 그것이 숨결과 같이 살아 움직이게 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기 위해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서공석신부님의 강론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