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일 연중 14주일 성서말씀 / <마산성당 축성>
즈가 9:9-12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10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11 "너는 나와 피로 계약을 맺었으니 나 그 피를 생각하여 사로잡힌 너희를 물 없는 굴에서 건져내리라. 12 수도 시온아, 포로들은 그리던 고향을 찾아 너에게로 돌아오리라. 네가 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아픔은 내가 곱절로 갚아주리라.
시편 145:8-14
8 주님은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시다.
9 주님은 모든 것을 인자하게 보살피시고 * 그 부드러운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10 주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노래 부르고 * 신도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11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 당신의 공적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12 그리하여 당신의 공적을 알리고 * 당신 나라의 그 찬란한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13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
#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되고, *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다.
14 누구나 쓰러지면 붙들어 주시고 * 거꾸러지면 일으켜 주신다.
로마 7:15-25상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18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상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마태 11:16-19, 25-30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18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19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나이다. 비옵나니, 주께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온유와 겸손으로 자유로운 인생 (마태 11:16-19,25-30)
“복음(기쁜 소식, 유앙겔리온, 에반젤, 고스펠)”은 고유명사일까요, 보통명사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때가 다 되어 이 세상에 도래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그 말씀이 바로 복음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예수님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었습니다. (현대에 마샬 맥루한이라는 미디어 학자가 “매체가 곧 메시지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답니다. 이를 원용하여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려고 예수님이라는 성육신이라는 매체를 택하셨다고 보면 좀 불경한 표현일까요?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실제로 예수님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당신이 전하시는 하느님나라의 본질적인 내용 자체가 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나라는 곧 예수님 당신의 인격(정확히 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성자로서의 위격)과 동일시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와 정반대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에 관한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불쾌한 사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차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안다는 이들과 똑똑하다는 이들에게는 감추셨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주장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이 스스로 전능한 해결사임을 자처하시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봉하는 이의 문제는 풀어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더욱 곤란을 더하시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본질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공간(천국)과 시간(종말론)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사후의 천국을 소망하기도 하고 역사와 사회 속에 실현되는 하느님나라를 대망하기도 하지만 하느님나라는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고 우리 마음에서 완성됩니다. 우리 마음과 세상은 영으로 연관되어 “애초에 그리고 결국은”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체계는 사람들을 율법의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주체로서 그 정신을 실현하는” 자율적인 일이 아니라 “대상이 되어 규율에 의해 구속받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라 율법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율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정통하시고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그 마음을 곧 바로 아셨기에 예수님은 자유로운 사랑의 화신으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우리는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럴까, 이러구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 하며 해서 안될 실수를 저지릅니다. “도대체 사는 게 뭘까... ” 하는 물음이 가슴 한 켠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느끼며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 때 율법의 요구는 보다 더 인정받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청은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유로움은 그저 내 마음대로 산다는 방종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마음 같은 “온유와 겸손”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이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신다는 것, 나와 너 우리를 차별 없이 대해주시며 우리의 참된 행복을 깊이 바라시며 도우시고 지키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평안을 얻습니다. ✠
<강론초록2> 온유와 겸손으로 인생의 짐을 지라(마태 11:16-19,25-30)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원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이해가 걸린 앞일을 미리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미리 예정된 일에 대한 정보를 뜻하지 않습니다. 무당을 찾아가 혼령을 부르고, 점쟁이를 찾아가 점괘로써 알아낼 수 있는 어떤 귀뜸이나 정보수준으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은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지시가 아니라 늘 간절한 사랑의 초청입니다. 하느님은 노예로서 두려워하며 불평을 참는 굴종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우며 진심어린 사랑과 자유가 담긴 자녀로서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머리로 알아낼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온마음과 온몸, 우리의 온 인격으로 동의하고 공감하고 순복하게 되는 “말씀”이요 진리이며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화답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유와 겸손과 인내의 덕목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받아들임의 자세, 온유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그 결과를 앞당겨 소망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스스로 안다 하고, 똑똑하다는 이들에게는 그 뜻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이들에게 그 뜻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어린아이처럼 완전한 신뢰와 의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뒤따를 수 있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는 약속을 믿으며 우리는 주님 마음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과 인내”가 인생의 짐을 메는 비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완전히 순복하면 우리 영은 깊은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삶의 무게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도 인생의 짐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 짐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조차도 불행한 저주가 아니라, 우리가 기쁘게 감내할 수 있는 인생의 과정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놀라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
<강론초록3>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알아봅니까?(마태 11:16-19,25-30)
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게 되는 일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같은 상황, 같은 기회에도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갖게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뒤돌아보면서 그것이 우리의 결심이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은총의 선택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교리와 지식이 믿음을 생겨나게 하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 자체가 믿음의 토양입니다. 삶의 고통과 죽음의 불안에 시달리며 세상과 우리 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을 절감하고,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될 때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전도를 받아들인 사람도 실은 우리의 말에 설득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삶의 고통에 연단이 되고 삶의 참된 의미에 목말랐기에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음을 전하려고 보면 사람은 딱 두 부류입니다. 내심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이들에게는 실패한 선생이요, 오해받은 예언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복되고 위대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그 무엇을 보고 이 분이야말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이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위를 걷고 오천 명을 먹이신 능력을 가진 분이시기에 주님이 되신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끝없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유일하고 참된 기적은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 곧 아가페 사랑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를 사랑으로 맞아주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임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은 당시의 율법적인 죄인들, 세리와 창녀와 가난한 이들에게 차별 없는 가르침과 보살핌을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가로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어둡고 두려운 죽음의 길 끝에서 예수님은 마침내 하느님께서 다시 빛 가운데 일으키신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았고 그 사랑을 찬양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믿기로 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즈가 9:9-12
9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너를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10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버리시고 뭇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큰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리시리라. 11 "너는 나와 피로 계약을 맺었으니 나 그 피를 생각하여 사로잡힌 너희를 물 없는 굴에서 건져내리라. 12 수도 시온아, 포로들은 그리던 고향을 찾아 너에게로 돌아오리라. 네가 포로로 지내던 시절의 아픔은 내가 곱절로 갚아주리라.
시편 145:8-14
8 주님은 자애롭고 자비로우시며 *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지극하시다.
9 주님은 모든 것을 인자하게 보살피시고 * 그 부드러운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 미친다.
10 주여, 당신의 온갖 피조물들이 감사노래 부르고 * 신도들이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11 그들이 당신 나라의 영광을 들어 말하고 * 당신의 공적을 이야기하게 하소서.
12 그리하여 당신의 공적을 알리고 * 당신 나라의 그 찬란한 영광을 알리게 하소서.
13 당신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당신만이 만세에 왕이십니다.
#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되고, *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다.
14 누구나 쓰러지면 붙들어 주시고 * 거꾸러지면 일으켜 주신다.
로마 7:15-25상
15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16 그런데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7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입니다. 18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상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마태 11:16-19, 25-30
16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17 마치 장터에서 아이들이 편 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다.' 하며 노는 것과 같구나. 18 요한이 나타나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19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27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나이다. 비옵나니, 주께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생명을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섬기며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온유와 겸손으로 자유로운 인생 (마태 11:16-19,25-30)
“복음(기쁜 소식, 유앙겔리온, 에반젤, 고스펠)”은 고유명사일까요, 보통명사일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때가 다 되어 이 세상에 도래하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그 말씀이 바로 복음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예수님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었습니다. (현대에 마샬 맥루한이라는 미디어 학자가 “매체가 곧 메시지이다.”라는 유명한 주장을 했답니다. 이를 원용하여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려고 예수님이라는 성육신이라는 매체를 택하셨다고 보면 좀 불경한 표현일까요? 말씀드리려는 핵심은 실제로 예수님은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당신이 전하시는 하느님나라의 본질적인 내용 자체가 되셨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나라는 곧 예수님 당신의 인격(정확히 말하면 부활하신 그리스도, 성자로서의 위격)과 동일시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삶과 죽음(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고백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와 정반대로 생각하고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나라”에 관한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고 불쾌한 사건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 때문에 생긴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 차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안다는 이들과 똑똑하다는 이들에게는 감추셨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 보이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주장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저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계시하려고 택한 사람들밖에는 아버지를 아는 이가 없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이 스스로 전능한 해결사임을 자처하시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봉하는 이의 문제는 풀어주시고 그렇지 않으면 더욱 곤란을 더하시겠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느님나라는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본질입니다. 하느님나라는 공간(천국)과 시간(종말론)의 차원을 넘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문제입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사후의 천국을 소망하기도 하고 역사와 사회 속에 실현되는 하느님나라를 대망하기도 하지만 하느님나라는 우리 마음에서 시작되고 우리 마음에서 완성됩니다. 우리 마음과 세상은 영으로 연관되어 “애초에 그리고 결국은” 둘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체계는 사람들을 율법의 주인이 아니라 종으로 삼았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주체로서 그 정신을 실현하는” 자율적인 일이 아니라 “대상이 되어 규율에 의해 구속받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목적이 아니라 율법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우셨습니다. 율법을 무시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에 정통하시고 충실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율법을 내려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그 마음을 곧 바로 아셨기에 예수님은 자유로운 사랑의 화신으로 사실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종종 우리는 “내 마음 나도 몰라... 내가 왜 이럴까, 이러구 싶은 것은 아니었는데.. ” 하며 해서 안될 실수를 저지릅니다. “도대체 사는 게 뭘까... ” 하는 물음이 가슴 한 켠에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느끼며 당황하기도 합니다. 그 때 율법의 요구는 보다 더 인정받는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요청은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되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자유로움은 그저 내 마음대로 산다는 방종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마음 같은 “온유와 겸손”으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이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아껴주신다는 것, 나와 너 우리를 차별 없이 대해주시며 우리의 참된 행복을 깊이 바라시며 도우시고 지키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평안을 얻습니다. ✠
<강론초록2> 온유와 겸손으로 인생의 짐을 지라(마태 11:16-19,25-30)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원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일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이해가 걸린 앞일을 미리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미리 예정된 일에 대한 정보를 뜻하지 않습니다. 무당을 찾아가 혼령을 부르고, 점쟁이를 찾아가 점괘로써 알아낼 수 있는 어떤 귀뜸이나 정보수준으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한다는 것은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따로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지시가 아니라 늘 간절한 사랑의 초청입니다. 하느님은 노예로서 두려워하며 불평을 참는 굴종이 아니라, 스스로 기꺼우며 진심어린 사랑과 자유가 담긴 자녀로서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머리로 알아낼 “정보”가 아니라 우리의 온마음과 온몸, 우리의 온 인격으로 동의하고 공감하고 순복하게 되는 “말씀”이요 진리이며 사랑이고 은총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은 이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화답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언어입니다.
우리는 내 맘대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유와 겸손과 인내의 덕목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옳다는 것은 이미 나타난 결과로 알 수 있”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한 받아들임의 자세, 온유와 겸손과 인내를 가지고 그 결과를 앞당겨 소망하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스스로 안다 하고, 똑똑하다는 이들에게는 그 뜻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 같은 이들에게 그 뜻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어린아이처럼 완전한 신뢰와 의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뒤따를 수 있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는 약속을 믿으며 우리는 주님 마음의 “온유와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과 인내”가 인생의 짐을 메는 비결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느님의 이끄심에 완전히 순복하면 우리 영은 깊은 안식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한 삶의 무게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으로도 인생의 짐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통해 그 짐의 의미는 전혀 달라집니다. 우리가 겪는 인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조차도 불행한 저주가 아니라, 우리가 기쁘게 감내할 수 있는 인생의 과정이 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놀라운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
<강론초록3>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을 알아봅니까?(마태 11:16-19,25-30)
한 사람이 하느님을 믿게 되는 일은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같은 상황, 같은 기회에도 어떤 사람은 믿음을 갖게 되고 어떤 사람은 더욱 마음을 닫아버리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 것을 뒤돌아보면서 그것이 우리의 결심이기 전에 이미 하느님의 은총의 선택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교리와 지식이 믿음을 생겨나게 하지 않습니다.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의 고단함 자체가 믿음의 토양입니다. 삶의 고통과 죽음의 불안에 시달리며 세상과 우리 내면에 엄연히 존재하는 모순을 절감하고, 과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게 될 때 우리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전도를 받아들인 사람도 실은 우리의 말에 설득된 것만이 아닙니다. 이미 삶의 고통에 연단이 되고 삶의 참된 의미에 목말랐기에 우리의 사랑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음을 전하려고 보면 사람은 딱 두 부류입니다. 내심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이들에게는 실패한 선생이요, 오해받은 예언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복되고 위대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정직하게 물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그 무엇을 보고 이 분이야말로 하느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이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위를 걷고 오천 명을 먹이신 능력을 가진 분이시기에 주님이 되신 것으로 여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끝없이 예수님께 기적을 요구했지만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는 일에는 실패했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유일하고 참된 기적은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 곧 아가페 사랑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돌아온 탕자를 사랑으로 맞아주시는 그 아버지의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임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예수님은 당시의 율법적인 죄인들, 세리와 창녀와 가난한 이들에게 차별 없는 가르침과 보살핌을 펼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가로 십자가의 고통스런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 어둡고 두려운 죽음의 길 끝에서 예수님은 마침내 하느님께서 다시 빛 가운데 일으키신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구원받았고 그 사랑을 찬양하며 그 사랑의 힘으로 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믿기로 한 사람만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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