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 29일 (부활 4주일) 성서말씀
시에나의 카타리나/ 부산구포성당 축복
사도 4:5-12
5 그 이튿날 유다 지도자들과 원로들과 율법학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다. 6 그 자리에는 대사제 안나스를 비롯하여 가야파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그 밖에 대사제 가문에 속한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7 그들은 두 사도를 앞에 세워놓고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 하고 물었다. 8 그 때 성령으로 가득 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원로 여러분, 9 오늘 여러분이 우리가 불구자에게 착한 일을 한 사실과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가 하는 경위에 관해서 심문을 하는데 10 불구자였던 저 사람이 성한 몸으로 여러분 앞에 서게 된 것은 바로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힘입어 된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입니다. 여러분과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은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11 이 예수는 집 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12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시편 23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 아쉬|울 것|없어|라. 2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 물가로 이끌어 |쉬게|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없어|라 ♧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없어|라. 5 원수들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몸, ∥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그리고 영|원히,|아-|멘
1요한 3:16-24
16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의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도 마음의 문을 닫고 그를 동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18 사랑하는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19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20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을 때에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 앞에서 떳떳합니다. 22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3 우리가 명령받은 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24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요한 10:11-18
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2 목자가 아닌 삯꾼은 양들이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가까이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도망쳐 버린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는 뿔뿔이 흩어져버린다. 13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14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15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16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양들도 있다. 나는 그 양들도 데려와야 한다. 그러면 그들도 내 음성을 알아듣고 마침내 한 떼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게 될 것이다."
17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다시 그 목숨을 얻게 될 것이다. 18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본기도> -성공회기도서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은 착한 목자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를 한 무리로 모아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양 무리를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인도를 따라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착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요한 10:1-18)
나는 온통 나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남을 사랑하는 일도 어쩌면 내가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서인지 모릅니다. 남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는 남의 고통보다도 내 불편을 더 아쉬워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은 착한 목자이시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며 안심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위험에서 지켜주시며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통 내게 잘해주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이기에 예수님의 착하심도 그 분이 나를 잘 보살펴주신다는 수준에서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 반성해봅니다. 물론 주님의 착하심은 그보다 훨씬 깊고 풍요로운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삯군과 착한 목자의 차이는 단순히 유능함의 차이가 아닙니다. 결정적인 차이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가 여부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동시에 양들은 목자를 안다고 말씀합니다. 신앙적으로 “안다”는 것은 지적인 인식이 아니라 인격적인 친교(사귐)와 일치(하나됨)를 의미합니다. 친교와 일치를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희생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떤 대상을 참으로 알려면 거리를 두고 머리로 파악하는 정보수준이 아니라 목숨, 곧 전부를 걸고 깊은 관계를 맺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알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이요 그 사랑을 깨닫고 누리는 사람은 다른 것을 더 구하지 않게 되니 “아쉬울 것 없어라!” 노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한 친교와 일치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단지 예수님이 성자 하느님이셔서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하면 그만 공허해집니다. 요한복음은 그 일을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자신의 목숨을 다시 얻은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누리신 그 사랑의 신비와 일치를 사람들이 알고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종교는 다 헛된 것이고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하게 참된 종교라는 주장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이 하느님아버지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알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사랑의 절대성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을 진정 알고자 하면 우리의 전부를 걸어야 하리라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강론초록2>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요한 10:1-18)
21세기, 인간의 과학기술은 물리, 화학 분야의 성취를 넘어서, 생명의 신비에까지 깊이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류는 갈등과 미움과 증오, 가난과 질병과 전쟁의 위협 속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들 자신은 어떻습니까? 세상이 제시하는 화려한 삶의 외형적 가치를 향해 경쟁적으로 뛰고 뛰지만, 참으로 행복합니까?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칠까봐 두렵고 이제껏 쌓아온 것, 가진 것을 잃을까 불안합니다.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이 진정 우리의 행복을 보장할까요? 우리는 과연 무엇을 추구하며 보람을 얻고 누구를 사랑하며 기쁨을 누립니까? 생각하면 결국 모두 시한부인생인 우리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계획하며 어떤 소망으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 무엇을 아쉬워합니까?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이 한 마디의 고백에 진정 우리 마음을 담을 수 있습니까?
세상살이에 현실적인 이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한가한 신앙으로 보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가 믿음의 확신을 가지면 우리 욕망의 끝없는 아쉬움을 무한정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마술적인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 고백의 차원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이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야 하는 냉엄한 현실입니다. 구원이란 이 삶의 현실을 회피하고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삶의 현실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내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객관적 삶의 현실을 내 뜻대로 형통하게 하는데 소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 안에서 끝없이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깨닫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오늘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착한 목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다시 새로워집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흔히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의 확신이 있느냐 하는 식의 질문을 합니다만, 우리가 가슴으로 이 한마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살이의 문제가 우리가 죄를 지은 탓으로 받게 되는 하느님의 징벌일까요? 이 세상의 삶이란 죽은 후에 지옥을 피하여 천당에 가기 위한 하느님의 시험장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즉, 믿음을 갖고 종교적인 헌신을 열심히 하면 하느님의 마음에 들어서 현세에 만사가 형통하고 죽은 후에 천당에 갈 수 있다는 것일까요? 일리는 있지만 온전하지는 못한 신앙의 동기요 태도입니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은 사실 징벌이라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거나 우리가 자초한 상황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깨닫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그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드러나고, 그 때 그 죄를 통하여, 정확히 말하면 ‘그 죄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바로 ‘그 죄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애틋한 뜻이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는 점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그래서 우리의 죄가 많은 곳에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이 풍성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또 한 차원 높여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거룩한 인간이 되자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운 우리의 믿음은 그런 일들이 결코 바리사이파적인 노력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욕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신분에 만족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가에 달린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구하는 삶의 축복자체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완전해지는 능력도 아니고,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가 완전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나는 아버지를 아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의심 없이 완전한 신앙을 가지고자 하는 우리의 바램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심 없는 완전한 신앙은 우리가 우리 머리의 신념체계를 굳게 하고 주장하는 것으로 보장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완전한 믿음은, 우리의 마지막 죽음을 주님의 사랑 안에서 경험하고 나서야, 말하자면 다윗의 표현대로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이었다.”고 고백할 수 있을 때, 즉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일생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시거나 버려두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의심은 완전히 해소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죄를 하느님의 은총으로 녹이고 우리의 의심을 주님의 사랑으로 해소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주 뵈올 때까지는 여전히 죄인으로 살고, 의심 많은 인간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주님은 우리 죄인으로 자녀로 인정해주시고 용서와 새 힘과 지혜를 허락해주시고 동행하시며 도우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의심마저도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정해주시며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보살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 가운데 사랑이 제일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주님의 그 사랑 안에 그 사랑의 힘으로 사는 것이 우리 삶의 행복입니다. 그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보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베드로처럼 외치게 됩니다. “예수를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 이는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배타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우리의 참된 만족과 행복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그 사랑을 깨달으면 충분하다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 사랑이요, 그 사랑으로 삶을 사는 것이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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