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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3월 3일 (사순 3주일) 성서말씀과 강론초록

 

 

2013년 3월 3일 (사순 3주일) 성서말씀과 강론초록 

 

이사 55:1-9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여기에 물이 있다. 너희 먹을 것 없는 자들아, 오너라. 돈 없이 양식을 사서 먹어라. 값 없이 술과 젖을 사서 마셔라. 2. 그런데 어찌하여 돈을 써가며 양식도 못되는 것을 얻으려 하느냐? 애써 번 돈을 배부르게도 못하는 데 써 버리느냐? 들어라,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며 기름진 것을 푸짐하게 먹으리라.
3.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로 오너라. 나의 말을 들어라. 너희에게 생기가 솟으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라. 다윗에게 약속한 호의를 지키리라. 4. 나는 그를 뭇 백성들 앞에 증인으로 세웠고 부족들의 수령과 군주로 삼았다. 5. 이제 너는 네가 알지 못하던 민족을 부르리라. 너를 모르던 민족들이 너에게로 달려오리라. 너희 하느님 야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께서 너를 영화롭게 하신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6. 야훼를 찾아라. 만나주실 때가 되었다. 그를 불러라, 옆에 와 계신다. 7. 불의한 자는 그 가던 길을 돌이켜라. 허영에 들뜬 자는 생각을 고쳐라. 야훼께 돌아오너라, 자비롭게 맞아주시리라. 우리의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리라.
8.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다. 나의 길은 너희 길과 같지 않다." 야훼의 말씀이시다. 9. "하늘이 땅에서 아득하듯 나의 길은 너희 길보다 높다. 나의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

 

시편 63:1-8

1. 하느님, 당신은 나의 하느님, 물기 없이 메마른 땅덩어리처럼: 내 마음 당신 찾아 목이 |마르|고, ∥ 이 육신 당신 그려 |지쳤|습니|다.
2. 당신을 그리면서 성소에 왔|사오|며 ∥ 당신의 힘, 당신의 영광을 |뵈옵|니-|다.
3. 당신의 사랑, 이 목숨보다 소중|하기|에 ∥ 이 입술로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4.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 두 팔 들어 당신 이름 찬|양하|리이|다.
5.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 배불리 먹은 듯 내 입술 |기쁘|고, ∥ 내 입이 흥겨워 당신을 |찬양|합니|다.
6. 잠자리에 들어서도 당신 |생-|각, ∥ 밤을 새워 가며 당신 생각|뿐입|니-|다.
7. 나를 도와주신 일 생각|하면|서 ∥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즐겁|습니|다.
8. 이 몸 당신에게 포근히 |안기|면 ∥ 당신 오른팔로 붙들어 |주시|옵니|다.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고린 10:1-13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꼭 기억해 두셔야 하겠습니다. 모세 때에 우리 조상들은 구름의 인도를 받았고 모두가 홍해를 무사히 건넜습니다. 2.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의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3. 그들은 모두 똑같은 영적 양식을 먹었고 4. 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의 동반자인 영적 바위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다는 말입니다. 그 바위는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5.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대부분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죽어서 그 시체가 여기저기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6. 이것은 우리가 우리 조상들처럼 악을 일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본보기입니다. 7. 그들의 일부는 우상을 숭배하였는데 여러분은 그들처럼 우상 숭배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들에 대해서 성서에는 "백성들이 앉아서는 먹고 마셨고 일어서서는 춤을 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8. 어떤 사람들은 음행을 일삼다가 하루에 다 죽어 넘어졌는데 그 수가 이만 삼천 명이나 됩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음행에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9.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떠보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주님을 떠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0.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하다가 살육의 천사의 손에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들처럼 불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11. 그들이 이런 일들을 당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고가 되었으며 그것이 기록에 남아서 이제 세상의 종말을 눈앞에 둔 우리에게는 교훈이 되었습니다.
12. 자기 발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3.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루가 13:1-9

1. 바로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죄가 많아서 그런 변을 당한 줄 아느냐? 3.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4. 또 실로암 탑이 무너질 때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은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인 줄 아느냐? 5. 아니다. 잘 들어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놓았다. 그 나무에 열매가 열렸나 하고 가보았지만 열매가 하나도 없었다. 7. 그래서 포도원지기에게 '내가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볼까 하고 벌써 삼 년째나 여기 왔으나 열매가 달린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아예 잘라버려라. 쓸데없이 땅만 썩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 하였다. 그러자 8. 포도원지기는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9.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베어버리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본기도>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목마른 이들에게 영원한 생수를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이제 헛된 갈망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열매 없는 죄, 열매 맺는 신앙 (루가 13:1-9)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 사는 일일까요?
저 세상에서 우리 영혼이 천국에 가는 일일까요?

(교우 여러분! 저는 교우님들과 이런 물음을 나누길 즐겨합니다. 신앙에 관한 모든 물음과 답은 오 엑스 문제,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닙니다. 특별히 성공회는 모든 좋은 것은 다 좋다고 받아들입니다. 필요한 것은 모두 다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신앙적인 물음과 대답도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물음과 대답의 수준은 분명하게 식별하고 구분한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가령 성공회신자는 영적인 추구를 한다고 해서 육체적인 필요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영적인 필요의 수준이 육체적인 욕구의 수준보다 높고 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

살아서 하느님께 복을 받는 일도 중요하고 죽어서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일도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깊은 이유는 이 세상의 고통과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것이 성공회 전통 안에서 모범적인 답입니다.

우리 삶에서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계명을 범하고 그 행위가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불행을 겪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생의 불행을 두려워합니다. 인생의 그러한 불행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께 잘못을 범하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징벌하시기 때문에 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은 첫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가지고 심판날을 맞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을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품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합니다.”(1요한 4:17하-19)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관심은 우리를 감시하고 징벌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 일생이 “열매 맺는 삶”이 되도록 보살피시는 데 있습니다.

 

죄를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라는 측면에서만 보고 고민하는 것은 좁은 이해입니다.
죄의 문제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살펴야 그 본질적인 의미가 드러납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깨뜨려진 상태, 그래서 이웃과의 관계도 깨어진 상태를 성서는 “죄”라고 표현합니다. 그 깨어진 관계가 하느님의 은총과 우리의 회개로 회복되는 일을 성서는 “구원”이라고 표현합니다.

죄는 우리가 주님의 계획대로 주님의 은총을 받으며 사는 것을 방해하여 우리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치명적입니다.
죄의 정체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훼방하는 모든 경향과 세력입니다.

죄의 뿌리는 자기중심적인 욕망입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고 야고보서는 말씀합니다(야고1:15). 죄는 자기를 열고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대신에
깨어진 관계의 아픔을 제대로 의식도 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욕심으로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게 합니다.
결국은 자기자신의 한계에 갇혀버린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그저 자기 욕심만 챙기다가 덧없이 죽는 것이 바로 죄의 댓가로서의 죽음의 본질입니다. 죄로 인해 인생을 허비한다면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가차 없이 베어지고 말듯이 허망하게 소멸하는 것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은 우리가 좀 더 도덕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간이 되기로 작심하는데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죄의 회개는 우리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삶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도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완전해져서 아무런 잘못 없이 옳은 일만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한 환상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느님을 알지 못하던 “교만과 방종”으로부터, 하느님을 잘못 아는 “두려움과 위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죄의식과 위선과 정죄 없이 진실하게 살아가려 기도하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교우 여러분, 오해 없이 이해하시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죄의 문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그 열매를 맺도록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이 하는 일은 모두 죄”(로마14:23)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 저의 에너지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잡지 못한 삶의 에너지는 여러 가지 죄책감을 낳습니다.
늘 공연한 죄의식과 무능하다는 자의식에 시달리며 귀한 청춘 시절을 보냈습니다.
죄의 문제를 다루는 극기의 노력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에너지를 탓하고 그 에너지를 약화시키려는 노력이어서는 안됩니다.
성적인 에너지, 분노의 에너지, 모험의 에너지 모두 다 인생살이에 필요한 것들이고 사실은 모두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 에너지들을 약화시키는 것은 건강한 일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일도 아닙니다.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상태가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느님을 향한 목적을 가지게 된 에너지가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그 삶의 에너지를 참된 인생의 목적에 맞게 보람있게 사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인생의 목적, 우리의 소명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서와 교회는 우리에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요청합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여 인정받는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겸손히 살아가는 일이 하느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스스로의 삶에 만족하고 다른 이들, 우리 이웃을 깊고 넓게 사랑하는 일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 그것이 나 자신일지라도, 혹은 다른 사람일지라도
우리는 기꺼이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가 받은 달란트를 열심히 사용해야 합니다.

징벌을 두려워하여 죄를 안지으려고 하면 아무 일도 안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러나 죄가 두려워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잎만 무성하고 결국은 열매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인생이 됩니다.
실은 무기력한 인생, 열매 없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큰 죄입니다.
달란트의 비유가 전하는 교훈도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이런저런 지적 의심을 갖고 도전하는 무신론자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진짜 위험한 무신론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보내는 인생입니다.

하느님은 폭군처럼 우리 운명을 다루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죄와 죽음의 문제는 하느님의 징벌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가 올바른 관계를 깨뜨린 결과로 겪게 되는 자업자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동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야말로 사탄의 것입니다.
남과 나는 모두 올바른 관계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남과 나가 절대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깨어진 관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아래서 하느님의 뜻과 사랑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순종과 불순종의 가능성은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 맡겨져 있습니다.
성실과 게으름의 선택도 우리의 결심과 실천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징벌의 위협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강제하시려면 회개의 요청도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인내로이 참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인생의 열매를 맺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하느님의 기쁨이시라는 것을 기억할 일입니다.

우리 인생의 열매는 우리가 밖으로 이루어내는 성공이나 업적이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기억하시지요?  바울로 사도는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갈라5:22)”

이 사순절기에 참된 회개로,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어가는 기쁜 신앙생활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강론초록2>

               열매 없는 죄, 열매 맺는 신앙 (루가 13:1-9)

 

신앙생활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되는 것일까요? 저 세상에서 천국에 가는 일일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모두를 포함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구원이 우리의 “바깥”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 “안”, 곧 우리 마음(영혼)에서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죄와 고통과 죽음의 문제에서 우리 존재와 삶이 구원 받는 일이 됩니다.

우리 삶에서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하느님의 진노를 사서 불행을 겪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징벌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보살피시는데 있습니다.

죄는 우리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게 만들므로 치명적입니다. 죄의 정체는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것을 훼방하는 모든 경향과 세력입니다.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온다고 성경은 말합니다(야고1:15). 죄로 인해 인생을 허비하면,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베어지듯, 허망하게 영원히 소멸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여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그저 덧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 바로 죄의 댓가인 죽음의 본질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일은 하느님께 벌을 피하고 상을 받으려는 동기일 수 없습니다. 죄의 회개는 우리를 향해 지니신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사랑에 부응하는 삶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일이 아니라, 우리 삶이 (성부)하느님을 향해, (성자)하느님을 통해, (성령)하느님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임을 깨닫고 힘차고 기쁘게 사는 일입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도 우리가 아무런 잘못 없이 옳은 일만 하는 경지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한 환상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느님을 도통 모르던 “교만과 방종”으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을 잘못 아는 “두려움과 위축”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이나 위선 없이, 그리고 남에 대한 정죄 없이, 깨끗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려 기도하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뜻과 그 열매를 맺도록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그 뜻과 사랑을 깨닫고 의지하는 것이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이 하는 일은 모두 죄”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로마14:23)
이 사순절기로부터 참된 회개로, 성령의 열매를 가득 맺어가는 기쁜 신앙생활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강론초록3>

                                   열매 없는 죄, 열매 맺는 축복

 

신앙생활을 하는 깊은 이유는 결국 우리와 이 세상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삶에서 죄가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계명을 범하고 그 행위가 하느님의 진노를 사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우리를 감시하고 징벌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관심은 당신께서 지어내신 우리가 합당한 “열매 맺는 삶”을 살도록 보살피시는데 있습니다.
죄의 정체는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으면서 우리가 주님의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을 훼방하는 세력입니다. 죄는 우리가 주님의 계획대로 주님의 은총을 받으며 사는 것을 방해하여 우리 삶에 아무런 열매가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치명적입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인생의 보람을 거두지 못한다면 마치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가차없이 베어지고 말듯이 그만 허망하게 영원히 소멸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그저 덧없이 살다가 죽는 것이 바로 죄의 댓가로서의 죽음의 본질입니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것은 내가 좀 더 도덕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간이 되기로 작심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죄의 회개는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기억하고 그 하느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삶의 열매를 맺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도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온전해져서 아무런 잘못 없이 옳은 일만 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불가능한 환상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죄로부터의 자유’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이지만 그런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스스로에 대한 죄의식이나 위선 없이, 그리고 남에 대한 정죄 없이 깨끗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려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문제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그 열매를 맺도록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그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깨닫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이 하는 일은 모두 죄”라고 성경은 표현합니다. 하느님이 폭군처럼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하느님의 뜻과 사랑 안에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성실하냐 게으름이냐의 선택으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