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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3년도설교초록

2013년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성서말씀

 

 

2013년 5월 19일 (성령강림주일 /홍) 성서말씀

둔스탄(캔터베리주교, 수도운동의 부흥가, 968년)/ 구미요한성당축성

 

사도 2:1-21

1 마침내 오순절이 되어 신도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3 그러자 혀 같은 것들이 나타나 불길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내렸다. 4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5 그 때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경건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다. 6 그 소리가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7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 8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셈인가? 9 이 가운데는 바르티아 사람, 메대 사람, 엘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메소포타미아, 유다,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10 프리기아, 밤필리아, 이집트, 또 키레네에 가까운 리비야의 여러 지방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로마에서 나그네로 온 11 유다인들과 유다교에 개종한 이방인들이 있고 그레데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이 지금 하느님께서 하신 큰 일들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저마다 자기네 말로 듣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12 이렇게 모두 놀라고 어안이 벙벙하여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하며 웅성거렸다. 13 그 중에는 "저 사람들이 술에 취했군!" 하고 빈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14 그 때 베드로가 다른 열한 사도들과 함께 일어서서 군중을 보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유다 동포와 예루살렘 시민 여러분,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잘 생각해 보십시오.
15 지금 시각이 아침 아홉 시인데 어떻게 술에 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들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16 이것은 예언자 요엘이 예언한 대로 된 것입니다.
17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너희 아들 딸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계시의 영상을 보며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는 나의 남종에게도 여종에게도 나의 성령을 부어주리니 그들도 예언을 하리라. 19 나는 하늘 높은 곳에서 표징을 보이며 땅에서 기적을 행하리니 피와 불과 짙은 연기가 일고 20 해는 빛을 잃어 어두워지고 달은 피와 같이 붉어져 마침내 크고 영광스러운 주의 날이 오리라.
21 그 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시편 104:25-35

25 저 크고 넓은 바다,   * 거기에는 크고 작은 물고기가 수없이 우글거리고,
26 배들이 이리 오고 저리 가고   * 손수 빚으신 레비아단은 당신의 장난감입니다.
27 때를 따라 주시는 먹이를 기다리며   * 이 모든 것들은 당신을 쳐다보다가
28 먹이를 주시면 그것을 받아먹으니,   * 손만 벌리시면 그들은 배부릅니다.
29 그러다가 당신께서 외면하시면 어쩔 줄을 모르고   * 숨을 거두어들이시면, 죽어서 먼지로 돌아가지만,
30 당신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시면 다시 소생하고   * 온누리의 모습은 새로워집니다.
31 주님의 영광은 영원하소서.   * 손수 만드신 것, 주님의 기쁨이 되소서.
32 굽어만 보셔도 땅은 떨고   * 다치기만 하셔도 산들은 연기를 뿜는구나.
33 나는 한평생 주님을 노래하리라.   * 숨을 거둘 때까지 악기를 잡고, 나의 하느님을 노래하리라.
34 나의 노래가 주님께 기쁨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 그러면 나는 주님 품안에서 즐겁기만 하련만, 
35 악인들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려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로마 8:14-17

14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이 받은 성령은 여러분을 다시 노예로 만들어서 공포에 몰아넣으시는 분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16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 17 자녀가 되면 또한 상속자도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을 받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니 영광도 그와 함께 받을 것이 아닙니까?

 

요한 14:8-17

8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말이냐? 10 너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도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몸소 하시는 일이다. 1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12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루어주겠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14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내가 이루어주겠다."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본기도> 주 하느님, 주께서는 시나이산에서 연기와 불 가운데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고, 성령의 불 가운데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제자들에게 내리셨던 성령의 불을 우리에게도 주시어 서로 사랑하라 명하신 주님의 계명을 기쁨으로 지키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성령 (요한 14:8-1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 드립니다. 아멘!

방금 저는 성호경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으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이 성찬례 중에도 여러 번 우리는 성호경을 부르며 십자성호를 표현합니다. 이 성호경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며, 우리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 행하시는 일이라는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가 즐겨 쓰는 이 표현을 개신교회에서는 쓰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연이 아니라, 구원론, 곧 우리에게 구원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성공회가 가르치는 구원의 신비는 “오직 예수!”로가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도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입니다.

성령강림대축일에 왜 오순절에 불꽃처럼 내리신 성령강림사건을 먼저 말하지 않고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를 말하는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시나요? 성령은 갑자기 나타난 제3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성삼위의 인격적인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강림사건이 있기전에도 성령은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때에도, 성자의 성탄 때에도,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사명을 확인하실 때에도,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실 때에도 성령은 계셨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새삼 강림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구체적인 체험을 뜻합니다. 성령은 하늘에서 불길처럼, 혀의 모습처럼 제자들에게 내려왔습니다. 제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성령을 통해서 , 이제 이 세상을 넘어서서 하늘의 존재로, 그 삶의 차원이 높여지게 된 것이지요. 제자들은 부활체험이 환상이 아니고  신앙안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부활의 빛에서 십자가사건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예수님의 모든 행하신 일과 가르치신 말씀들의 의미를 되새겨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는 의미의 “성령강림”은 그리스도인 모두가 반드시 경험하게 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들도 경험했고 경험하고 경험해야하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을 통해서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바울로 사도는 우리가 성령에 힘입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씀합니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은 우리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 곧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게 되었을까요? 꿈을 꾸다가 계시를 받았습니까? 하늘의 별을 보고 알게 되었을까요? 철학을 배워서 논리적으로 생각한 끝에 알게 되었습니까? 과학적인 방법으로 탐구하고 실험한 끝에 되었을까요? 뻔히 말이 안되는 이런 예는 계속 생각해내기도 힘이 드는군요.^^

정답을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이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기록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자들에게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신앙모임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영으로 하나되게 하시어 불러 모은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성령께서 성경을 지으시고 성령께서 교회를 세우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성령강림대축일을 기념하는 것은 오늘 신비한 능력의 성령이 이 땅에 강림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성령강림이 뜻하는 바는 이제 성령을 받으면 우리가 신령하게 되어 신비한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성령강림대축일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몸소 행하신 그 구원의 신비를 분명히 깨닫게 하신 일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세상 모든 곳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제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신 일을 기념합니다.
육신의 몸을 떠나서 하늘로 높여지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멀릴 떠나계신 것처럼 여겨졌겠지요. 이제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 곧 성령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시어 그 제자들을 예수님의 새로운 몸으로 삼아주십니다. 그 일이 바로 교회공동체의 탄생입니다.

 

오늘 교회의 지체를 이루는 우리들도 성령강림 당시의 제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계신 성령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신비를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사명을 확인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인해서 기뻐하고 그 실천을 통해서 감사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별개의 존재가 아닙니다. 성령은 어떤 무속적인 혼령이 아닙니다. 무슨 기(氣)나, 에너지가 아닙니다. 어떤 원리나 방법, 수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느님의 영이시고 성자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신 새로운 협조자(보혜사)로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되새기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성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우리의 성령체험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언어, 방언입니까? 눈물로 씻어낸 죄사함의 감사입니까? 황홀하고 가슴 벅찬 구원의 기쁨입니까? 기적적인 능력의 경험입니까? 다 좋습니다만, 성령체험의 본질은 “말씀체험”이고 “교회체험”입니다.

 

성령에 가득한 이, 곧 자신을 비우고 성령을 모신 이는 “말씀”를 깨닫고 말씀을 사랑합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또 다른 새로운 이론이 아닙니다. 오직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성부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말씀체험은 곧 “소명체험”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의 삶은 하느님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말씀을 살고 말씀을 전하는” 일로 의미를 갖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일이 성령체험이고 “말씀체험”입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성령강림사건은 출애굽사건에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나타나신 하느님께 소명을 받고, 유월절의 구원사건을 경험한 후에 다시 시나이산에서 연기와 구름 사이에서 율법을 전해 받는 장면과 연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며 당부하신 새로운 말씀, 새로운 사랑의 계명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백성이 되는 일이 성령체험입니다. 

 

성령체험의 본질인 “말씀체험”은 곧 우리를 “교회체험”으로 이끌어갑니다. 성령에 가득한 이들, 곧 자기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기며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일들은 공동체를 통하여 새로운 자기로 거듭난 삶을 살아갑니다. 성령에 가득한 이들이 성령에 이끌려 이룬 공동체를 성경은 예수님의 몸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을 받은 이들은 교회의 지체가 되어 다른 지체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성령충만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는 일, 하나가 되는 일은 혼자서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경험하는 최면상태, 환각상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을 이룬 지체들, 곧 교회공동체의 다른 교우들과 예수님의 사명, 곧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함께 지향하며 마음과 힘을 모으는 일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일입니다.

절대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체험은 혼자서 신비경, 황홀경에 빠져 주관적인 헛소리를 해대는 일이 아닙니다. 참된 성령체험은 깊은 말씀 체험이어야 합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여 살고 죽으신 모든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성령체험은 그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삶이 예수체험으로 채워지게 합니다. 예수의 몸을 이룬 교회의 신실한 지체, 교회공동체를 사랑하는 온전한 신자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지요. 때로 말씀을 통하여 깊이 기도하여 분별한 일을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것은 다소 비판적이어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일입니다. 하지만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신비체험을 내세워 교회 자체를 공격하는 일은 결코 성령의 일일 수 없습니다.

교회가 성령의 공동체라는 말은 교회가 스스로를 위한 모임이 아니라는 말과 같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내세워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들이 모인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떠받드는 추종자를 모으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성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을  사명으로 삼아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가시면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하고 그들에게 당신의 사명을 나누어 맡기고자 하셨습니다. 그 사명이 인간에게 참된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시어 그 사명, 곧 아버지의 일, 즉 하느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도록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의 창조사역과 성자의 구원사역을 유지하고 지탱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역할을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의 협조자가 되어주신다고 표현하십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하나되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 교회공동체의 본분입니다. 깊은 성령체험은 곧 “교회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교회를 통한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거룩한 성전에서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거룩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의 활동 속에 살아계신 진리의 영, 협조자 “성령님”을 찬양합니다! 성령님을 통하여 깨닫게 된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의 신비를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이 성령강림대축일의 감사성찬례를 통하여 참으로 우리 모두가 진리와 사랑의 영이신 성령으로 하나되기를 원합니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지혜와 용기로 가득하여 세상에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때로 힘들고 슬픈 일도 있지만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참고 견디어 내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되, 잘못된 것들은 회개하고 바로잡으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 어떤 조건에서도 늘 말씀 안에서 기도하며, 기쁘고 복되게 살아가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기원드립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

 

<강론초록2>

 

                  진리의 성령, 협조자 성령 (요한 14:8-17)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은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의 성삼위 하느님이십니다. 이것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고백하는 신앙의 언어이므로 우리의 생생한 체험을 내용으로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경험합니까? 그 경험이 우리의 삶에, 우리의 교회에, 나아가 이 세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직접 뵈온 일이 없고, 뵐 수도 없으되,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우리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물론 예수님조차 직접 뵙지 못한 우리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고,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성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주시는 이가 바로 협조자 “성령님”이십니다.

 

 성부 하느님은 우리가 머리로 지어낸 추상적인 원리가 아니고 인간의 이상적인 욕망을 투사시켜 상정한 완전한 존재도 아닙니다.

성자 예수님 또한 신화적인 인물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사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사랑과 능력을  알려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나라를 알리시고 가르치시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는 신비를 통하여 그 분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하느님과 똑 같은 분으로 찬양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어떤 무속적인 혼령이 아닙니다. 무슨 기(氣)나, 에너지, 어떤 원리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인격으로 경험하고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느님의 영이시고 성자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오신 새로운 협조자(보혜사)로서 우리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되새기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성부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알게 하십니다. 이같이 하느님체험은 예수님체험으로, 예수님체험은 성령님체험으로 연결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성령체험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언어, 방언입니까? 눈물로 씻어낸 죄사함의 감사입니까? 황홀하고 가슴 벅찬 구원의 기쁨입니까? 기적적인 능력의 경험입니까? 다 좋습니다만, 성령체험의 정수는 역시“말씀”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또 다른 새로운 이론이 아니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성부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떠받드는 추종자를 모으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이들에게 아버지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하고 아버지의 일을 맡기고자 하셨습니다. 그 일이 참된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협조자 성령을 보내주시어 그 아버지의 일, 곧 하느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도록 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성부의 창조사역과 성자의 구원사역을 유지하고 지탱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역할을 예수님은 성령께서 우리의 협조자가 되어주신다고 표현하십니다. 제자들이 성령으로 하나되어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 교회공동체의 본분입니다. 따라서 깊은 성령체험은 곧 “교회”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이념적 결사체, 친목회, 동호회 같이 인간이 만든 모임이 아닙니다. 한 분 성령님을 통해 이루어진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진리와 은총으로 서로 돕고 섬기는 그 사랑은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을 향해 흘러갑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의 활동 속에 살아계신 진리의 영, 협조자 “성령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