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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법에서 마음을 보자! (연중 6주일/ 마태 5:21-37)


 

2011년 2월 13일 연중6주일 녹 성서말씀 /  도로테아 순교자 303년경

신명 30:15-20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

15 보아라. 나는 오늘 생명과 죽음, 행복과 불행을 너희 앞에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을 순종하며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가 지시하신 길을 걸으며 그의 계명과 규정과 법령을 지키면 너희는 복되게 살며 번성할 것이다. 너희가 들어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시는 복을 누릴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 마음이 변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느님께 추방당하여 다른 신들 앞에 엎드려 그것들을 섬기게 될 것이다. 18 오늘 나는 너희에게 일러둔다. 그리되면 너희는 반드시 망하리라. 너희가 이제 요르단 강을 건너가 차지하려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너희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너희나 너희 후손이 잘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여라. 20 그것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의 말씀을 듣고 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이 야훼께서 너희 선조,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맹세하신 땅에 자리잡고 오래 잘사는 길이다."

시편 119:1-8

1 복되어라, 그 행실 깨끗하고 ◯ 주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사람.

2 복되어라, 맺은 언약 지키고 ◯ 마음을 쏟아 주님을 찾는 사람,
3 나쁜 일 하지 아니하고 ◯ 그의 길만 따라 주님을 찾는 사람,
4 당신은 계명들을 내리시고 ◯ 온전히 그대로 살라 하셨으니
5 당신 뜻을 어기지 않고 ◯ 한결같이 살도록 도와주소서.
6 그 명령을 낱낱이 명심하면 ◯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리이다.
7 당신의 바른 결정을 내가 배워서 ◯ 진심으로 감사하리이다.
8 당신 뜻대로 힘써 살려 하오니 ◯ 이 몸을 아주 버리지 마소서.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1고린 3:1-9

1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사람을 대할 때와 같이 말할 수가 없어서 육적인 사람, 곧 교인으로서는 어린 아이를 대하듯이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나는 여러분에게 단단한 음식은 먹이지 않고 젖을 먹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때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은 아직도 그것을 소화할 힘이 없습니다. 3 여러분은 지금도 육적인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서로 시기하고 다투고 있으니 여러분은 아직도 육적인 사람들이고 세속적인 인간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4 여러분이 세속적인 인간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나는 바울로파다." 하거나 "나는 아폴로파다." 하거나 할 수 있겠습니까? 5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6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심는 사람이나 물을 주는 사람은 중요할 것이 없고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하십니다. 8 심는 사람과 물주는 사람은 동등한 사람이고 각기 수고한 만큼 삯을 받을 따름입니다. 9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함께 일하는 일꾼들이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마태 5:21-37

 [성내지 마라] 21 "'2)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출애 20:13(신명 5:17). 2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25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26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간음하지 마라] 27 "'3)간음하지 마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출애 20:14(신명 5:18).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29 오른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30  또 오른손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다."
[이혼하지 마라 (마태오 19:9; 마르코 10:11-12; 루가 16:18)] 31 "또한 '4)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면 그에게 이혼장을 써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신명 24:1. 3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이것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다. 또 그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면 그것도 간음하는 것이다."
[맹세하지 마라] 33 "또 '5)거짓 맹세를 하지 마라. 그리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레위 19:12. 3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마라. 6)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다. 이사 66:1.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예루살렘은 그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나 검게 할 수 없다. 37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일찍이 계명을 주시어 우리의 삶을 복되게 하셨나이다. 구하오니,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법에서 마음을 보자! (마태 5:21-37)

  모든 인간다움에는 질서가 요청됩니다. 어쩌면 이 우주에는 하느님께서 지으신 질서가 숨어있고 그것을 알아내는 일이 지혜입니다. 그 질서를 법칙으로 파악하는 것이 과학이고 그것을 응용하는 일이 기술입니다. 동물의 세계, 심지어 식물의 세계, 미생물의 세계에도 나름의 질서가 있습니다. 존재에도 질서가 있고 관계에도 질서가 있습니다. 흔히 자연계의 질서를 약육강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생존경쟁의 과정에서 보여지는 양태를 강조한 것입니다. 더 좋은 표현은 적자생존이랍니다. 모든 생명은 질서를 따라 개체와 종족의 생명을 유지합니다. 적자생존이라고 하니 개체가 살아남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 같지만 실은 “더불어 삶”의 질서를 뜻합니다. 환경과 다른 개체와 더불어 잘 사는 길이 최선의 질서입니다.

  자연의 질서를 본받아 인간이 세운 질서는 “법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존중됩니다.  법은 “신의 명령”으로 전해지기도 하지만 실상은 사람들끼리의 합의된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법의 질서는 결국 사람들이 모은 힘, 즉 권력에 의해 뒷받침됩니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율법의 시작은 아담이나 노아로부터가 아닙니다. 역사적 인물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아브라함에게서도 아닙니다. (종종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황당함은 율법이 없던 시대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법이 발달하면 그런 황당함은 많이 줄어듭니다. 물론 법이 황당할 경우야 어쩔 수 없지만요. 21세기의 우리도 가장 착하고 머리좋은 이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내는 법이 몹시 황당한 경우를 종종 경험하곤 하지요.)

  율법의 시작은 모세에게서 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노예살이를 하던 히브리민족을 이끌고 가나안을 향해 떠납니다. 자유롭게 하느님을 예배하려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히브리민족은 자신들이 하느님께 의해 선택된 민족이라는 자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정해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 그들은 이집트왕가의 방해를 이기고 이집트 군대의 추격을 기적적으로 물리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며 구원하신다는 신념을 가질 만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노예살이의 경험을 통해 오염된 사회적인 인식과 태도, 그리고 노예살이를 하는 동안 몸과 맘에 밴 노예근성을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요의 우상이라야 종교적인 만족을 쎄게^^ 준다는 걸 그들은 이미 경험한 바 있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즉 생존의 위협은 신앙을 원초적으로 포기할 이유가 된다는 것도 주장할 만 했습니다. 노예살이도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을 받았던 것이거든요. 자유민이 되어서 어떤 기회를 통해 힘을 얻은 자, 재력과 무력과 종교적 권위를 얻은 이들은 곧바로 다른 이를 종으로 삼아 그들을 다스리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결코 인간 사이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질서이지만 어쩌면 좋습니까, 그 나쁜 질서는 이미 그들이 한 번 경험한 적인 있는 현실적인 질서입니다. 비록 나쁜 질서임에 분명하지만 그건 내가 당하는 입장이었을 때의 판단이고 내가 기득권을 누리는 입장이라면 그 불평등한 질서는 그럴 수도 있는 자연스런 질서이거나 어쩌면 매우 훌륭한 신의 질서로 느껴질 수도 있는 일입니다.

  율법은 바로 이러한 상태의 히브리민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막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민으로 살아갈 가나안땅을 행해가는 과정에서 인도자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새로운 질서”에 대한 약속입니다.
(21세기의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유치하고 황당한 수준의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의 윤리와  믿음이 사천년전 인류보다 월등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라는 요구는 질투하시는 하느님이 자기를 위해 명령하시는 요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도리어 자유민답게 살아가야 하는 히브리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간곡히 청하시는 사랑의 간청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모시고 창조와 생명의 가치를 귀히 여기며 서로 존중하고 아끼고 더불어 살라는 하느님의 당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란 기묘한 존재입니다. 성서가 표현한 인간의 타락이 무엇입니까?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선과 악을 주장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물론 “자기입장에서”라는 것이 문제이지요. 하느님이 인간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빼앗아 영속적인 삶이 불가능하도록 한 것은 형벌인 동시에 일종의 구원입니다. 특정한 인간들이 자기들 입장에서 선을 내세워 세운 질서가 영원하다면 인간 모두에게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다행히 인간은 버티고 버텨도 백년을 넘겨 살기 힘든 존재이고 권력은 십년을 가기 어려운 법입니다. 유한한 인간에게 영원한 질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교활함은 자신의 한계를 도리어 율법과 같은 더 영속적인 수준의 질서에 의존하여 해결하려고 합니다. 재력과 무력보다도 오래가는 것이 “율법”입니다.

  법으로 제국을 이룬 나라가 로마입니다. 로마제국의 사람들이 유대교를 일정정도 인정하고 존중해준 데는 유대인들이 법을 존중하고 지키려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법이 인간들 스스로의 약속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결국 인간들 중 강자, 곧 권력자의 의도에 불과하게 됩니다.

  사랑은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지만 율법은 사랑의 요구를 충족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쉽게 인간들을 위선과 정죄에 빠지게 합니다. 율법이 본래 하느님의 마음을 담아 우리에게 늘 새로운 질서를 살라는 요청이었음을 잊어버린 인간들은 그 율법을 내세워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자랑하는 지혜요 정의(正義)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법의 질서 속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율법을 배우고 지키며 성장하셨고 율법의 선생님으로 존경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로마제국의 법이 세계를 다스리는 세상 속에서 동시에 율법의 법이 백성들의 삶을 도리어 억압하는 그 이중 구조 속에서 법의 한계를 보셨습니다. 인간들이 하느님을 섬기고 사는 일이 성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법조문의 규율에 따라 가능할 리가 없는 것이지요. 실상 율법은 하느님의 마음이요, 국법도 깊이 생각하면 서로를 신뢰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것입니다. 마음을 잃은 법은 도리어 불의와 폭력에 도구로 전락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나타내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법의 질서 대신에 “사랑의 질서”입니다. 법의 질서는 권력, 곧 힘, 폭력으로 뒷받침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질서”는 힘을 포기한 자기희생으로 뒷받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달리신 골고타의 십자가는 법의 질서와 사랑의 질서의 충돌을 상징합니다. 
   보여지는 현상은 법의 질서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질서를 전한 예수님을 유대교의 율법의 질서가 신성모독죄로 기소했고 빌라도가 로마의 국법에 의해 유대인의 왕을 자칭한 정치범으로 십자가형에 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그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기희생, 곧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가 인간의 역사 속에 구체적인 현실로 드러나고 경험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는 곧 부활의 능력이었고 이는 사랑의 질서가 마침내 승리함을 의미합니다. 법의 질서에 의해 정죄되고 힘과 근거를 잃은 것 같은 사랑의 질서는 점점 생명력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까닭은 바로 법의 통치라는 이상과 그것이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주님이 세우신 새로운 사랑의 질서가 수많은 이들에게 구원의 능력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서신은 파당을 짓는 육적인 사람들과 성령 안에서 하나되는 영적인 사람들을 분별합니다. 육적인 사람들을 규율하는 데는 법적인 질서가 최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힘에 의해 뒷받침되는 타율적인 질서이고 인간을 안으로부터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신앙의 이상, 복음의 목표는 영적인 인간입니다. 자기희생을 할 줄 아는 주체적인 인간, 자발적인 인간이 곧 영적인 사람입니다. 법을 따지는 사람은 책임을 나누어 피하려는 게 보통입니다.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은 책임을 합하여 일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법이 마음을 잃으면 기계적인 원칙이 되어 도리어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고 잘못된 질서를 강제하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른바 대당명제(對當命題), 곧 옛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율법의 자구, 조문에 붙잡히지 말고 그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마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또 다른 차원으로 “옛 사람들에게 이렇게 하신 말씀을 너희가 들었지만... ”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계시며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과 우리의 세상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법 자체가 중요하다고 우기는 일은 하느님께는 참으로 어이없는 주장일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노예살이의 잘못된 질서와 노예살이의 타락한 근성을 씻어내고 자유롭게 서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 주님이 요약하신 율법의 정수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듯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계명조차도 주님의 마음을 구하지 않으면 사랑의 이름으로 온갖 미움과 폭력과 억압이 횡행하는 참담한 현실이 생기게 됩니다.

  성경말씀에서 하느님의 법을 찾아내어 다른 이를 심판하려 들기 쉬운 우리는 오늘 복음말씀을 기억하며 늘 겸허하고  깊이있는 반성을 계속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에서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 다른 이를 진실로 사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일에 지혜와 용기를 다해는 일이 바람직한 신앙인의 마음과 태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