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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교리이야기

성서와 교회가 전하는 부활의 참뜻

 

 

<2015 여름 대성당지 원고>                                    

 

                        성서와 교회가 전하는 부활의 참뜻   

 

부활일을 맞으며 우리는 기쁘게 인사를 합니다. 부활을 축하합니다! 부활의 기쁨으로, 부활의 능력으로 사시길 빕니다!”  

저는 한동안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셨다는 말을 예수님의 시신이 생리적으로 기능을 다시 회복하여 소생했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죽음을 극복하는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이셨고 그를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증명하셨다는 뜻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제로서 양성 되고 서품 받으며, 부활에 대한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은 그런 평면적인 내용이 아님을 깊이 배우고, 참뜻을 올바르게 전하고 가르칠 책무를 위임받았습니다

  성서와 교회가 증언하는 부활의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님의 시신이 살아나셨음을 확신하는 일 자체가 아닙니다. 성서와 교회가 증언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사건과 연결되어 그 참된 의미가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보편적으로 제자들에게 경험되고 고백된 사건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하느님나라가 세상나라의 반대를 받아 충돌하게 된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 십자가에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외아들을 보내시어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사랑으로 계시됩니다. 동시에 그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이 세상의 악한 지배체제가 하느님의 아들을 신성모독황제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하는 어처구니없는 인간의 죄악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못박으며 사람들은 네가 구세주라면 네 힘으로 너부터 구원해보라고 빈정거립니다. 부활사건은 그렇게 세상사람들의 인식에서는 처절한 실패(失敗), 참담한 패배(敗北), 캄캄한 좌절(挫折)인 그 십자가사건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높이 다시 세우시어 믿는 이들 가운데 현존케 하셨다는 믿음입니다.

  부활을 믿는 일은 개인이 머리 속으로 예수님은 신의 아들이시므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의 부활은 세상의 모든 일이 신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능력으로 해결되리라는 엉뚱한 기대가 믿음인 양 오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이런 기대는 십자가 주위에서 빈정대던 사람들의 믿음없는 기대와 실은 같은 수준입니다

  부활은 철저히 믿음의 눈으로 체험하는 사건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부활이 시신에 일어난 소생의 사건이라면 대사제들과 빌라도에게 나타나시면 좋았을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기자회견을 하시면 되는 일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을 알아보는 이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모시고 따랐던 제자들에게 국한되었습니다. 부활을 믿는 일은 하느님나라의 약속이 예수님의 인격을 통해서 현실화되는 것을 경험한 제자들이 세상 권세의 간악한 힘에 의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인해 절망했을 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여전히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어떤 분은 이런 식의 설명이 도리어 부활의 신비를 훼손하며 성경이 하느님 말씀임을 신봉하는 믿음을 흔드는 일이라고 불편해하실 수 있습니다. 만에 하나, 그러시다면 속히 우리 성공회의 신학자나 성직자나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대화를 청하십시오. 마음을 여시고 대화하시면 충분히 그런 불편함을 해소해주는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근거들을 얼마든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서(聖書), 교회의 전통(傳統), 교회의 이성(理性)이 모두 다 어째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가를 드러내려는 합의된 노력이요 인정된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기탄없이 물으셔도 충분한 해명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성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객관화시키는 증거로서 빈무덤과 예수님의 발현(나타나심)을 전합니다. 빈무덤 이야기는 분명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무덤에 묻혀서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전해줍니다. 그러나 빈무덤을 시신소생을 증거라고 주장하면 도리어 쓸데없는 논란의 여지가 생깁니다. 주일에 내가 집에 없었다는 사실이 내가 교회에 갔다는 사실의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못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예수님의 발현사건도 부활이 자연인의 망막에 상이 맺히는 시력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발현은 항상 믿음의 사건입니다. 살아서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에게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경험하는 사건으로만 성립합니다. 예수님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시고,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몰라보다가 나중에 주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분으로 경험됩니다. 닫힌 문과 벽을 통과하여 나타나시는 분이시기도 하고, 그 육체가 구름에 쌓여 하늘로 올라가시는 분으로 표현됩니다.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몸의 부활도 육체의 생리적인 소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전체적 총체적 인격성이 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부활의 소망도 언젠가 똑같은 육신으로 다시 되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몸의 부활이란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에 대한 깊은 긍정을 통해서, 본래 창조의 목적과 질서가 완성되는 차원을 사는 소망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유한한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 사랑에 삶을 맡기면, 우리의 존재는 참되고 영원하며, 하느님의 뜻안에서 늘 고유한 인격으로서 친교를 누리게 된다는 신뢰가 몸의 부활을 소망하는 믿음입니다.

  어떤 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시신소생의 기적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런 믿음이 불가능하거나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허락하신 분이 다시 그 생명을 되살리는 일이 논리적으로는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드신 분이 사후관리(A/S)를 하실 수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논리로만 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논리대로라면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오른발이 빠지기전에 왼발을 딛고 왼발이 빠지기전에 오른발을 디디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신 성서의 기적은 그런 수준의 일이 아닙니다. 논리보다 중요한 것이 원리(原理)요 의미(意味)입니다. 생명의 원리는 그 개체가 죽는 법이고, 그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에 생명입니다. 아예 죽지 않는 생명은 실은 무생물이거나 암세포처럼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부활을 예수님 시신의 소생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뜻은 그런 일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원리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고 무의미한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기적은 논리가 아니라 원리의 깊이와 현실을 재확인하는 일로서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시신의 소생으로 이해하면, 결국은 우리의 구원도 시신이 소생하는 차원에서,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의 에고가 오래오래 존속하는 일이 구원인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극복하신 죽음은 육신이 불가피하게 맞게 되는 생리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의 욕망과 두려움에 갇히고, 세상이 유혹하고 조장하는 죄와 악에 사로잡혀서, 무의미한 고통과 허무 속에 스러지는 영적인 죽음의 극복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희생양을 만들어 폭력적인 죽음으로 권력의 힘을 보이려는 세상의 죽임의 세력과 예수님께서 그 죽음을 피하지 않으시고 받아들이시며 희생적인 사랑으로서의 자기 봉헌이 죽임의 세력을 이기는 능력임을 드러내신 계시의 사건입니다. 부활은 죽임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세상의 권세에 대한 하느님나라의 승리입니다. 세상의 어둠에 대한 하느님 은총의 빛의 승리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차원의 부활을 주님께서 전하시고 세우시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 깨닫고 누리고 증언합니다. 교회는 일찌기 루가복음이 전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경험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주님 부활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루가 24:13 이하)

    하느님나라를 위해서 일하신 예수님, 모든 일에서 선하신 예언자이신 예수님, 그래서 모든 백성이 구원의 희망을 걸었던 그 분이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아 십자가형에 처형되셨습니다. 그러나 무덤에는 그 분이 시신이 없었고, 천사들이 그 분이 살아계시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입니다. 남은 문제는 우리가 어디서 그 분을 만나볼 수 있을까의 문제인데, 엠마오의 두 제자는 낯선 어떤 이가 함께 걸으시며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성경에 비추어 풀어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식탁에서 빵을 나눌 때 비로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어지는 성체성사(감사성찬례)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함께 체험하는 부활의 사건이라는 성서와 교회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초자연적 능력으로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죽은 후에 우리 영혼을 천당에 보내시는 일로 좁혀 이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구원은 세상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사랑의 힘으로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고, 살아있던 죽어있던 그 사랑의 왕국에서 하느님과 이웃과의 깊은 친교를 살게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또 부활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뒤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십 일 동안 사도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써 당신이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사도 1:3)”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여전히 하느님나라를 가르치십니다.

    부활을 기뻐하는 일은 라는 에고(Ego, 자아)의 존재가 육신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재생해서 존속하리라는 기대가 아닙니다. 세상에 사로잡힌 가짜 나를 죽이고, 하느님나라에 새로 태어난 참된 나로 살아간다는 기쁨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신비입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1고린 15:42-44)”

  부활은 개인이 머리로 믿는 사실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공동체에 참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분의 사명과 그 분의 돌보심을 누리는 일, 곧 하느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미리 누리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할례, 곧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골로 2:12)”

  부활을 믿는 일은 시신소생의 기적을 확신하고 주장하는 일이 아닙니다.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과 가치와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서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골로 2:12)"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땅의 하느님나라는 교회의 체험과 증언과 활동을 통해서 먼저 드러납니다. 우리의 부활은 우리가 교회에 속하여 일치하게 된 예수님과 성령님을 통해서 하느님나라의 차원에 새로 태어나 살아가는 일입니다. 교회는 부활을 말씀과 성사로 체험하고 확인합니다. 그리고 전도와 선교로 그 부활을 세상에 증언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하느님나라를 위해 불러내신 하느님의 자녀, 새로운 하느님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세상의 악령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 곧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성령에 사로잡힌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 자체로 부활의 증거(證據)이고 부활의 실상(實相)입니다. 교회가 전하는 것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기적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창조와 회복과 구원의 일입니다. 부활은 초자연(超自然)의 기적(奇蹟)이 아니라, 초세상(初世上)의 신비(神秘)입니다. 생리적인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이 통념으로 강요하는 죽음의 권세와 체념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부활의 참뜻을 깨달으면 이 세상의 존재와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하여 그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나라는 에고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아둥바둥하는 수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안에서 기꺼이 감수하는 죽음이야말로 곧 새로운 생명의 변화이요 새로운 시작이 됨을 깨닫는 일이 우리의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내게 삶의 기쁨을 앗아감을 두려워하기보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안에서 우리가 맺은 고마운 사랑의 관계가 여전히 이어지며, 더욱 새롭고 깊고 풍요롭게 변화됨을 받아들이는 일이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과 그 은총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함께누리는 섬김과 사귐을 통하여, 삶의 목적과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확인하며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일입니다.  (임종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