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신문 제874호 2016년 8월 13일자 사설
불신(不信)의 냉소에서 신뢰(信賴)의 증언으로
최근 우리 교회 안에 의혹과 해명을 요구하는 주장이 어지럽다. 그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책임을 바르고 투명하게 진행했느냐는 문제제기이다. 이것이 교회 전반에 관한 불신으로 번질까 염려스럽다. 물론 소수의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속사회와 달리, 교회는 신자 개인을 개별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인격적인 표현이라고 믿는다. 동시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신자는 모두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제기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면, 서로 귀 기울여 대화해야 마땅하다. 서로 자신을 열어 공동 식별의 자리를 마련하고 대안을 세우는 일이 교회가 일하는 방식이다.
다만, 모든 지체를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는 원칙과 저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다투는 무질서는 구분해야 한다. 교회는 질서의 공동체다. 비판의 목적은 비판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진정한 일치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신앙의 질서를 잃으면 아프고 상한 몸이 되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성공회 치리구조의 질서는 주교직의 지도력과 민주적 의회제의 바른 합일로만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토론과 절차를 지켜 처리하고, 충분한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거치며, 마지막에 신앙의 권위에 순종할 때, 교회는 교회답게 바로 서며 참된 권위를 지키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교회 지도자의 경청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비판으로 이뤄져야 한다. 교회 지도자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므로, 작은 문제제기와 비판에 대해서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경청해야 한다. 섣부른 상호공방은 상호불신만 깊게 한다. 지위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분명히 하여 대화할 때, 상대방을 이해하며 생산적인 논의를 해나갈 수 있다.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소모적이며, 갈등과 충돌로 이어진다. 그리되면 교회는 위선과 정죄의 수렁에 빠지고 냉소하거나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주님의 은총과 소명을 따라서 함께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신뢰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회의 사목과 선교에서 드러난 크고 작은 문제점은 우리 교세가 작고 선교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탓이 크다. 작은 규모에서 몸에 익은 관습적인 의사결정과 운영의 관행을 이제는 크게 확장된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개별 사안의 문제를 바로 잡는 일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한계는 물론 구성원들의 관습적 인식과 행동에까지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토마 이야기(요한 17장)는 진정한 의심이 공동체의 독초가 아니라, 진실한 고백과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토마는 부활 사건이 ‘믿거나 말거나’ 식의 유언비어(流言蜚語) 수준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아야겠다”는 의심은 진실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네 손을 내 상처난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분명히 밝혀 주셨다. 토마의 응답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는 고백이었으며, 기꺼운 선교와 순교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이루어, 하느님의 일,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공동체가 교회다(골로1:24). 용기를 내어, 우리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선교하면서 못 박히고 찔린 상처가 어디에 어떻게 드러나며, 상처의 본질이 무엇이지 함께 정직하게 확인하자. 상처가 전혀 없다면 오히려 우리 안위만 생각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 상처를 확인했다면, 함께 그 아픔을 나누며, 그동안 겪은 수고와 고통에 서로 감사하는 신뢰를 세우자. 서로 깊이 존경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더 힘을 내어 선교와 순교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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