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49건

  1. 2017.04.16 주님의 부활을 기뻐합니다!
  2. 2017.03.01 [옮김] 2017년 서울교구장 사순절 사목서신
  3. 2017.02.23 [옮김] 성공회신문사설; 올바른 식별을 훈련하는 사순절기
  4. 2017.01.20 [옮김] 성공회신문 사설: 성공회사목을 위한 성공회신학을 공유하자
  5. 2017.01.19 [옮김] 성공회신문 사설 ; 선교정책을 생산하는 의회
  6. 2017.01.19 [옮김] 성공회신문사설 ; 인구절벽과 신자절벽
  7. 2016.08.16 [옮김] 불신(不信)의 냉소에서 신뢰(信賴)의 증언으로
  8. 2016.05.12 [성공회신문 868호 사설] 성공회 신앙을 이어가는 가정 공동체
  9. 2016.03.27 [성공회신문 865호 사설] 부활 - 일으켜지신 주님, 일으켜지는 교회
  10. 2015.09.20 [옮김]성공회신문 853호 사설; 신앙의 예법을 마련하자
  11. 2015.09.14 [성공회신문 852호 사설] “자연, 사람, 하느님과의 화해” - 성공회의 사명
  12. 2015.09.14 선교 125주년 기념행사 포스터
  13. 2015.08.09 [성공회신문 제850호 사설] 거룩한 변모의 비전으로 선교하는 교회
  14. 2015.05.24 [성공회신문 제845호 사설] 성공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
  15. 2015.04.12 [세월호참사 1주기 추모주일 공동설교] 진실의 증인
  16. 2015.04.12 세월호 참사 1주기 애도주간 선포 (공문)
  17. 2015.04.12 세월호참사 1주기 애도주간 선포 (기사)
  18. 2015.04.10 [일본성공회 주교회 메시지] “전후 70주년”에 즈음하여
  19. 2015.04.04 [성공회신문사설] 참된 변화를 이루는 부활신앙
  20. 2015.03.25 [성공회신문사설] 선교 125주년의 성주간과 부활절기를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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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2017년 서울교구장 사순절 사목서신

성공회의 전통과 신앙을 회복하는 사순 절기를 지냅시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 이마가 아니라 가슴에 재를 부으며 여러분의 주교 김근상 바우로가 문안드립니다.

이제 사순절 신앙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은 한마디로 하느님께 깊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완벽해져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가는 둘째 아들처럼 감히 아버지라 부를 자격도 없으나 일꾼으로라도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진정한 회심과 겸허가 더 아름답습니다. 사순절은 이런 돌이킴과 자기를 비움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제자들과 세례 받은 이들이 경험한 부활은 갑자기 얻은 행운의 기회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려움으로 헤아리면서, 예수님을 따라 걸을 때라야 누리는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한 실패와 고통과 죽음을 맛보면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일은 고통스런 몸부림입니다. 초라하게 쓰러진 육신 위에 하느님께서 강한 손으로 붙드시고 일으켜 높여주시는 영광이 부활의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못 자국, 창 자국의 상처가 선명한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랑하는 성공회 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해부터 우리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게 운영해왔던 사회선교기관 중에 성직자가 책임자로 일하는 한 곳이 그만 말씀드리기도 민망한 과오를 노조와 정부로부터 지적받았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선교적 열정이 안으로 쌓인 무지와 허욕을 은폐한 탓입니다. 이에 따라서 도덕적 책임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교구가 상당히 큰 액수의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공회빌딩을 임대 관리하는 과정에서도 기대 수익에 못 미치는 이유가 교구장의 관리 책임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목을 통할하는 교구장으로서 하느님과 교회 앞에 부끄럽고 송구한 사죄의 마음을 올립니다. 시말과 경과를 살피는 일과는 다른 차원에서, 교회의 일치와 치리에 관해 모든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로서 한없는 사목적 책임을 통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이 성찬례의 기도 시간마다 주교인 저를 위해 드려주신 기도를 기억하며, 저의 나약하고 부족한 교구 사목을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자비를 구합니다. 교구장 주교로서 보내는 이 마지막 사순절기는 참으로 제 작은 명예와 자긍심마저 갈가리 찢으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교회의 선교 의지와 역량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저는 지난 1월 피선주교님께 교구의 실질 행정과 치리의 권한을 일체 위임하였습니다. 지난 2월 14일, 피선주교, 성직자원 의장, 평신도원 의장과 함께 사안의 중대성을 공유하고 모든 이후의 일정을 피선 주교님 중심으로 해결하기로 한 바 있습니다. 저로서는 새로운 희망으로 도약을 시작할 새 피선 주교와 교회공동체에 이러한 아픈 현실을 해결하지 못하고 넘겨드리며 퇴임을 하게 되는 일이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고통을 줄여가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새 피선주교의 너그럽고 따뜻한 신앙과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일 처리에 교회가 미래를 맡기며 큰 기대를 걸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제가 빨리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받아들여서 새 주교님의 성품과 교구장 승좌식을 오는 4월 25일에 함께 봉헌하여 제 사임시기도 앞당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교우, 성직자, 수도자,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 전체 안에서 우리 신앙 전통에서 나오는 더 깊은 식별과 선교의 의
지를 최대한 모으고 살려야 할 때입니다.

교구장 주교로서 제 직무와 역할은 그동안 많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저의 퇴임과 함께 혁신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그동안 성직자와 교우들 모두 지역 교회와 현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선교와 사목을 해오셨습니다. 교구장인 저는 최대한 그 자율적 책임을 존중하고 지원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성직자의 복지를 위해 안정된 재원을 마련하기 원했습니다. 성직자 재교육을 통해 사목자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고, 평신도께도 신자 양육을 통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기대했습니다. 나름의 결실도 있지만,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저 자신과 교구의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명분으로 옳다고 해서 다 교회공동체에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이 더욱 깊은 식별과 결단으로 이런 일들을 훌륭히 완결 짓지 못한 점이 참으로 뼈아픕니다. 새 교구장께서 무거운 짐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짐을 나누시고 힘을 더해 주시어 더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성직자 여러분,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교회 전통이 마련한 성직의 질서를 바로 세워주십시오. 이번 사안에 관한 한 교구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료 성직자의 우려와 충정 또한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주교의 치리가 불안하다 해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성공회가 가지는 지향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주교직은 일치의 상징이며, 선교를 위한 의지와 실천의 기둥입니다. 주교 개인이 아니라, 주교직의 권위가 흔들리면 우리의 선교는 더 험난해질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뚫고 갈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동료 성직자 여러분들은 더 많은 기도와 조력으로, 주교의 직분을 완성 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성직자에게 사목에 관한 한, 맡긴 사역에 관한 한, 거의 모든 일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위임한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한두 분의 일탈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숙명과도 같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성직자를 믿어 주십시오. 그 믿음이 교회의 바탕이 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열심히 조력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교의 권위를 위임받아 가르치고 이끄는 성직자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세워주십시오. 성직자가 이끄는 기도와 신앙 교육 안에서 세상의 가치와 마음은 불살라 버리시고, 교우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익히고 갖춘 여러분의 전문성을 기쁘게 교회와 선교를 위해 봉헌해주십시오.

사순 절기를 지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때에 저는 이제 교구장 주교로서 물러나게 됩니다. 주님과 교우 여러분의 사랑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보상이나 명예를 위해 주교직을 감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포부와 기대가 컸기에 아쉬움과 서운함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제 공과를 맡겨드리고 교우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를 가슴에 깊이 안고 떠나려 합니다.

성공회 안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함께 한 모든 가족 여러분! 우리 교회는, 우리 성공회는 오늘의 흔들림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기초 위에 다시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좌절과 체념을 넘어서 새로운 도전과 열정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고 부활의 영광으로 빛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성직자와 평신도 여러분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공회의 형제자매 여러분,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식별이 곧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만류를 꾸짖으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의 용기가 우리 교회의 신앙입니다. 게쎄마니에서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바치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 부끄러움을 하나도 덜어내지 않고 그대로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친히 치료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철저하게 자신을 종으로 내려놓으신 겸손의 은총 안에서 사순절기의 여정을 시작하는 교우 여러분의 믿음이 우리 성공회를 되살리는 부활의 축복으로, 새 주교의 풍성한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기원하며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2017년 3월 1일 재의 수요일에

서울교구장 주교 김근상 바우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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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2017년 2월 25일자 성공회신문 제887호 사설

 

                      올바른 식별을 훈련하는 사순절기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이 말씀을 되새긴다. 사순절기 40일은 부활절을 맞기 위한 준비기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 시신에 일어난 기적 자체가 아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여 우리도 주님과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부활의 본질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개인의 소원성취나 사후복락으로 좁히는 일은 온당치 않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참된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생리적 죽음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일이다.

 

 

우리는 티끌 같다. 연약하고 모자라고 이기적이다. 남한테 저를 내세울 만한 존재가 아니다. 남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고 세상이 우러르는 지위를 가지려면, 세상의 가치와 논리와 방식을 따라 세상의 힘에 기대야 한다. 이 유혹에 빠져 사는 삶이 곧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힌 상태다. 마귀와 세속과 정욕에 붙잡히면, 필요를 넘는 욕망을 채우는 일을 행복으로 잘못 알고, 남을 해치고 빼앗아서라도 나를 지키고 채우는 일을 성공이라 착각하게 된다. 살아서 괴롭고, 죽어서 허망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죽음의 권세를 벗어나서 생명의 길을 가라는 초대이다. 티끌 같은 존재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라는 당부이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회개이다. 인간은 은총에 기대어, 은총 안에서,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 감사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 누리고 전하며 산다.

 

교회는 저마다 자신을 비워서 함께 은총을 누리는 공동체다. 올바른 관계를 위해 벽을 허물고 자신을 비워 남을 들이는 일이 생명의 길이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함께 나누는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생명의 길을 함께 걷는 일이 교회공동체의 존재이유다.

 

최근 우리 교회가 어지럽다.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참회와 반성을 요청하는 소리가 높다. 교회의 참회와 반성은 개인적인 후회나 사과를 훨씬 넘어선다. 우리 교회가 어떤 가치와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를 총체적으로 살피는 일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식별 문제다. 교회에 충성을 다하는 독실한 신자나 직분을 맡은 책임자도 때로 세속의 논리와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의 유혹과 박해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신중하며, 늘 깊은 식별을 필요로 한다. 신앙의 식별은 높은 자리나 많은 권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서품이나 입교 순서도, 다수결 원칙에 따라 지지를 얻은 견해라 해도, 그것 자체로는 식별의 권위일 수 없다. 교회는 성경과 전통과 이성에 근거하여 서로 존중하며 대화하고 기도하고 합의한 내용이 최선의 식별이라는 사실을 증언해왔다.

 

 

사순절기 동안 참회와 극기와 절제와 자선을 행하는 일은 단지 개인의 덕행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속적 가치와 논리의 속임수를 더 잘 알아채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지 않고 올바른 관계를 세우려고 식별력을 훈련하는 과정이다.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과 ‘너희는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다’라는 말씀 사이에 사순절 40일 신앙의 길이 열려있다.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이 신앙 여정의 끝에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진정 쇄신하는 교회공동체가 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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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7년 1월 21일자 성공회신문 885호 사설

 

                  성공회 사목을 위한 성공회 신학을 공유하자

 

2017년 대한성공회 전국 성직자 신학연수가 2월 1일(수)부터 3일(금)까지 서울주교좌교회에서 진행된다. “종교개혁 500주년, 재해석을 통한 성찰과 전망”이 주제다.


이번 기회에 성공회의 정체성에 관하여 더욱 더 깊어진 이해가 공유되기를 기대한다. 세계성공회는 잉글랜드 교회개혁의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개신교의 일파로 좁혀 보지는 않는다. 성공회는 서방교회의 유구한 전통을 지켜가는 입장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반영했다. 동방교회의 신학도 배우며, 과학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고, 각 지역에 알맞은 교회가 되기 위해 애쓰며 발전해왔다. 따라서 성공회는 신교냐 구교냐를 묻는 프레임을 넘어선다. 전례적이면서 복음적이고, 선교적이면서 사목적인 교회인 것이다.

 

대한성공회의 신학연수는 이러한 성공회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성공회의 사목을 위한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한다. 개신교계에서 종종 이루어지는 ‘목회성공을 위한 세미나’ 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단순히 최신 정보, 유용한 프로그램을 소개받는 일에 머물 수 없다. 마땅하고 옳은 명분을 확인하거나, 서로 위로하고 덕담을 주고받는 일도 본질이 아니다. 성공회는  개별 교회가 독자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사목할 수 있는 개신교회와는 정체(政體)와 직제(職制)가 다르다. 성공회는 주교제 교회로서 교구가 교회의 단위이다. 한국성공회는 세 교구가 한 관구로서 연합하여 일치를 지향한다. 성공회의 전통을 따라 이 땅에서 이 시대의 선교와 사목을 맡은 한국 성공회의 주체성을 깊이 고려하는 신학연수가 되길 바란다. 정체성은 밖에서 주어지는 규정과 평가에도 일부 영향을 받지만, 그 주체가 어떤 목적, 목표, 지향으로 선교와 사목을 하는가 하는 고민을 통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된다. 한국 성공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신앙과 교리의 문제, 행정과 제도의 과제를 살피는 일에는 성공회 성직자, 성공회 신학자들의 충정어린 연구와 발표가 중요하고 유용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애초부터 교회공동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개인적으로 체득하여 홀로 수행하는 내면의 어떤 경지 따위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교회공동체의 고백에 참여하게 하고, 더욱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고 확산시키려고 하는 증언(證言)이다. 이번 신학연수에서 주제를 발표하는 이들은 성공회의 선교와 사목을 위해서, 성공회의 성직자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해야 한다. 참여하여 듣는 성직자들도 마음을 열고서 기꺼이 설득되고 변화하려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변화의 의도와 의지가 진정하지 않으면, 참된 소통이 어렵고, 결국은 가르침과 배움이 불가능하게 된다.

 

지극히 타당한 내용이어도, 성공회 사목을 맡은 성직자의 생각과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책자나 인터넷 등 다른 통로로 주고받는 편이 효율적이다. 전국의 성직자가 함께 모이는 신학연수는 성공회 사목현장에서 생겨나는 과제와 물음을 함께 나누는 자리여야 한다. 성공회의 정체성을 선교와 사목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마당이어야 한다. 신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성직자들의 눈빛과 가슴에 성공회 사목의 비전과 열기가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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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12일자 성공회신문 사설

 

선교정책을 생산하는 의회

 

오는 11월 26일(토)에 서울교구는 제52차, 대전교구는 제65차 교구의회를 소집한다. 부산교구는 11월 25일(금)~ 26일(토)에 제46차 교구의회를 연다. 교구의회의 본연의 역할을 살피기 위해서 성공회의 정체(政體)와 의사결정과 집행의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 교구는 교구장주교가 다스리는 하나의 독립된 선교조직으로서 교구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구의 운영에 관한 제반문제를 처리한다.(헌장 제56조) 주교제를 근간으로 삼은 성공회가 이해하는 교회의 단위는 교구(敎區)다. 교구장주교는 교구를 대표하고, 통할(統轄)한다. 다만, 천주교와 정교회와는 달리 대의제(代議制)인 의회제도를 통하여 주교의 직무를 제한하는 동시에 보완하고 있다. 교회공동체의 의사결정이 주교원, 성직자원, 평신도원의 합의로 이루어진다. 대한성공회는 교구장이 교구 사목을 통할하되, 교구의 운영은 교구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구의 사무관리를 통해 집행되는 것이다.

헌장 제11조는 교구장주교의 직무를 6개 항으로 열거한다. 1. 교구를 대표하며 교구의 사목을 통할한다. 2. 교회의 신앙과 사도적인 교훈 및 공교적인 진리를 수호한다. 3. 교구에 적용되는 모든 법규와 규정을 공포한다. 4. 교구내 성당축성 및 견진성사와 신품성사를 베푼다.(이하 생략) 이 교구장주교 직무가운데 2항 이하의 내용은 자명하고 분명하다. 그런데 1항의 직무는 ‘교구의 사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내용이 채워진다. 제30차 전국의회 선교선언문에서 선교적 상황의 어려움을 적시했거니와, 이를 극복하려면, 교구장주교의 사목은 ‘관리지향’에서 ‘선교지향’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

헌장 제60조는 교구의회의 기능을 11개 항으로 열거하고 있다. 1. 교구의 선교 정책 심의 의결 2. 교구법규의 제정과 개정 3. 교구 사업 및 결산보고 접수, 사업계획 및 예산 승인 4. 교구 내외에 파송할 교구대표 및 임원 선임 5. 각 교회, 교구 소속 기관 및 단체의 보고 접수 6. 소속기관의 사업보고, 계획 및 예결산 승인 7. 교구장 주교 후보 및 보좌주교 후보 선출 (이하 생략) 이 가운데 2항 이하는 통상적이고 절차적인 내용에 가깝다. 교구의회는 2항 이하의 내용을 의안으로 처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정작 1항의 선교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일에는 얼마나 시간과 공력을 들이는가를 짚어볼 일이다. 3항의 ‘교구 사업 및 결산보고 접수, 사업계획 및 예산 승인’과 1항의 ‘선교 정책 심의 의결’은 구별되어야 한다.  선교 정책을 심의하고 의결하는 일(1항)과 그 의결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교구 사업 계획과 예산을 통하여 실행이 되고, 그 실행 결과가 보고되는 일(3항)이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 선교정책 입안을 교구의 사무관리에 위임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교구의회가 선교정책의 주체가 되어, 상설화된 논의구조를 통해서 적극 의안을 마련하고, 신학적 소통을 통해서 심의하고 그 실행까지를 점검해야 한다.

교구의회를 앞두고 “기도를 통해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자”는 다짐은 마땅하고 소중하다. 이 때 기도가 저마다 속내를 감추는 침묵의 카르텔로 오인되면 곤란하다.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서로 정직하게 드러내고 함께 진지하게 풀어내는 공동식별의 과정이다. 교구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발전을 위한 선교정책이 참된 기도를 통해 깊이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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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2016년 10월 29일자 제879호 사설

 

'인구 절벽'과 '신자 절벽'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전망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과 대안이 가능하다. 인구학(人口學)의 관점에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소비와 생산의 흐름이 급격히 정체되며 생기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인구 절벽’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현상이 이미 심각하고, 쉽게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이므로, 잘 살펴 적절한 선택을 하는 일이 그나마 최선이라는 것이, 『정해진 미래』라는 책의 주장이다. 

우리 성공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선교 126주년의 역사는 첫 한국인 주교의 설교집 제목인 '한국땅의 십자가', '정의의 십자가', '평화의 십자가', '통일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 이 땅의 참된 교회가 되려는 노력이었다. 경제개발과 민주화의 요구에 부응했고, 한국 관구로서 독립한 이후 많은 성직자를 길러내며, 성공회대학교를 발전시키고, 나눔의 집을 시작으로 사회선교를 펼쳐왔다. 교회를 여럿 개척하고, 교단 내에 복음주의 운동과 영성운동을 열고, 이제는  평신도사역자 양성과 여성선교, 해외선교에까지 힘을 미치게 되었다.

갖은 노력으로 이룬 결실도 적지 않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하느님의 선교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족주의와 국교회적인 전통에 갇힌 한계를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사회참여와 사회선교를 통해서 젊은 세대의 기대를 받고 있지만, 한편 신앙의 열정과 분명한 고백이 약하다는 평도 있다. 적은 교세로도 한국사회와 교회에 큰 영향력을 가진 모범적 교회이지만, 선한 뜻을 펼치기에 힘이 부치는 것도 사실이다. 장점과 강점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려가고, 단점과 약점은 겸손하게 인정하고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은 어떨까? 현재로선 답이 없다. 10년, 20년, 나아가 30년, 50년 후에 우리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교회의 미래에 관한 진지한  염려와 대안의 모색은 현재 정리된 문서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까지 성직자와 신자가 최선을 다해 사목과 선교를 해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현재 신자 구성이 노년층이 많고 청년과 청소년층이 적은 불균형 상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년층이 많이 전도되거나 유입된 때문이 아니다. 청장년 시기에 교회를 세워 지켜온 이들이 그대로 노령화하고, 새로이 교회에 참여하는 젊은 세대는 적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우리 교회도 사회의 '인구 절벽'과 마찬가지로 ‘신자 절벽’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전례와 선교를 위해 봉사할 인력과 재원이 부족하여 활력을 잃게 되고, 현상유지 수준의 관리에 머물다 쇠퇴할 위험이 크다. 

현재 각 교구별로 다양하게 선교의 영역을 넓히며, 선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선교를 위한 성직자 인사와 재정 관리’에 관해서도 논의에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러한 노력과 논의의 진정성과 적실성은 ‘성공회의 교인이 더 늘어나고 더 젊어질 가능성’을 어떻게 고려하는가로 알 수 있다. 기존의 교회와 교우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수준으로는 새로운 세대를 얻어 교회의 미래를 이어가기가 어렵다. 교회신앙의 신학적 정리, 전례의 일치와 개혁, 목회적 돌봄의 강화, 성직자와 신자사역자 양성 등 우리의 모든 노력은 ‘교회 밖에서 새로운 세대를 얻어서 성공회 신자로 양육한다’는 목적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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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제87420168월 13일자 사설 

 

 

불신(不信)의 냉소에서 신뢰(信賴)의 증언으로

 

최근 우리 교회 안에 의혹과 해명을 요구하는 주장이 어지럽다. 그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책임을 바르고 투명하게 진행했느냐는 문제제기이다. 이것이 교회 전반에 관한 불신으로 번질까 염려스럽다. 물론 소수의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속사회와 달리, 교회는 신자 개인을 개별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인격적인 표현이라고 믿는다. 동시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신자는 모두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제기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면, 서로 귀 기울여 대화해야 마땅하다. 서로 자신을 열어 공동 식별의 자리를 마련하고 대안을 세우는 일이 교회가 일하는 방식이다.

 

다만, 모든 지체를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는 원칙과 저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다투는 무질서는 구분해야 한다. 교회는 질서의 공동체다. 비판의 목적은 비판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진정한 일치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신앙의 질서를 잃으면 아프고 상한 몸이 되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성공회 치리구조의 질서는 주교직의 지도력과 민주적 의회제의 바른 합일로만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토론과 절차를 지켜 처리하고, 충분한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거치며, 마지막에 신앙의 권위에 순종할 때, 교회는 교회답게 바로 서며 참된 권위를 지키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교회 지도자의 경청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비판으로 이뤄져야 한다. 교회 지도자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므로, 작은 문제제기와 비판에 대해서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경청해야 한다. 섣부른 상호공방은 상호불신만 깊게 한다. 지위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분명히 하여 대화할 때, 상대방을 이해하며 생산적인 논의를 해나갈 수 있다.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소모적이며, 갈등과 충돌로 이어진다. 그리되면 교회는 위선과 정죄의 수렁에 빠지고 냉소하거나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주님의 은총과 소명을 따라서 함께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신뢰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회의 사목과 선교에서 드러난 크고 작은 문제점은 우리 교세가 작고 선교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탓이 크다. 작은 규모에서 몸에 익은 관습적인 의사결정과 운영의 관행을 이제는 크게 확장된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개별 사안의 문제를 바로 잡는 일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한계는 물론 구성원들의 관습적 인식과 행동에까지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토마 이야기(요한 17)는 진정한 의심이 공동체의 독초가 아니라, 진실한 고백과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토마는 부활 사건이 믿거나 말거나식의 유언비어(流言蜚語) 수준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아야겠다는 의심은 진실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네 손을 내 상처난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분명히 밝혀 주셨다. 토마의 응답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는 고백이었으며, 기꺼운 선교와 순교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이루어, 하느님의 일,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공동체가 교회다(골로1:24). 용기를 내어, 우리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선교하면서 못 박히고 찔린 상처가 어디에 어떻게 드러나며, 상처의 본질이 무엇이지 함께 정직하게 확인하자. 상처가 전혀 없다면 오히려 우리 안위만 생각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 상처를 확인했다면, 함께 그 아픔을 나누며, 그동안 겪은 수고와 고통에 서로 감사하는 신뢰를 세우자. 서로 깊이 존경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더 힘을 내어 선교와 순교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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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제868호 2016년 5월 14일자 사설]

성공회 신앙을 이어가는 가정 공동체

건강한 가정은 건전한 사회와 교회의 기초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지키고, 가정주일을 기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문화는 가정생활 안팎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유교 전통이 강조한 효의 의미는 많이 퇴색했다. 핵가족화를 지나 이혼과 비혼(非婚)이 흔하며, 한부모가정이 늘고 있다. 세대 간에 깊어지는 단절과 갈등은 가족의 유대를 위협한다. 청년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라고 자조하는 가운데,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 20%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중이다. 늘어나는 아동학대 뉴스는 이기적이고 냉혹해진 우리 문화와 생활고의 단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자녀사랑과 부모공경을 외치는 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모세대는 사회의 변화, 생각의 다양성을 더욱 너그럽게 수용하고, 자녀세대는 부모세대의 노고와 땀이 만든 역사를 이해하는 자리를 가정과 교회에 마련해야 한다. 서로 이해하는 태도를 훈련하고 대화하는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가정을 새로운 신앙공동체로 쇄신해야 한다.

한국성공회는 이른바 ‘가족교회’(패밀리 처치)의 특성이 있다. 가정과 가문으로 신앙을 대물림하는 일이 교회를 유지하는 큰 힘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를 잇는 신앙이 이제 쉽지 않다. 농촌교회는 젊은 세대가 떠나 노령화되었다. 도시에도 지역에 근거한 본교회[전도구] 대신, 장거리를 이동하여 명분과 친분으로 모이는 교회가 많아졌다. 교회학교는 위축되고, 자녀들과 동반한 교회생활이 어려워졌다. 자녀의 입시경쟁을 염려하여 집에서 가까운 아무 교회에나 출석하거나 신앙생활을 잠시 멈추라고 권유하고, 부모세대는 관습과 친목 중심의 신앙생활에 만족한다. 이런 생활로는 자녀세대에게 신앙의 동기를 주기 어렵다.

“부모를 공경하라”(출애20:12)는 제5계명은 부모를 잘 봉양하라는 뜻보다 훨씬 깊다. 이는  부모세대의 신앙을 잘 물려받으라는 요청이다. 돌보고 섬기는 수준의 부모봉양은 이미 사회복지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가정의 의미를 전통의 혈연공동체를 넘어 ‘신앙을 세우고 이어가는 공동체’로 새롭게 바꿔야 한다.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자신의 편의와  주장만 내세우면 가정공동체는 건강하게 유지되기 어렵다. 오히려 닫힌 관계 속에서 더 심각한 갈등과 불화의 장으로 변질되기 쉽다. 가정은 공동의 신앙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서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일 때 진정 화목하다. 가족이 서로 교회 신앙의 경험에 초대하고 대화하면서 가정생활의 공통점을 마련하면 갈등 조정 효과도 높아진다.

‘자녀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부모의 생각은 일견 합리적이고 관용적으로 들린다. ‘어느 교회를 나가더라도 다같은 하느님을 믿는 일이라’는 이해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통일 뿐, 교파교회인 한국성공회로서는 안이한 태도요 엉뚱한 변명이다. 교회가 하느님나라를 위해 세워진 생명의 공동체임을 믿는다면, 교회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헌신하는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복되고 복된 일이다. 성공회가 자유로운 헌신으로 참된 삶을 이끄는 ‘지상최선의 교회’임을 확신한다면, 성공회 신앙을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은 그 어떤 상속보다 귀하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신앙을 이어 “복을 받고 땅에서 오래 살리라”(에페6:3)는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교회와 가정이 되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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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제865(2016327) 사설]

부활 - 일으켜지신 주님, 일으켜지는 교회

부활의 기쁨과 능력,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신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 교회는 부활의 의미를 세상과 어떻게 나누고 있을까? 단순히 예수님 시신이 살아난 일이라고 주장하면 세상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수준의 설명으로는 신자들마저도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 말로는 부활을 중시하고 축하하더라도, 실제 마음과 삶은 부활의 기쁨과 능력에서 멀어지고 만다.

부활(復活)의 의미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해야 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십자가에서 못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일이라는 풀이는 일반인의 통념일 뿐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부활로 번역된 그리이스어 아나스타시스’ (ἀνστασις)죽음에서 일으켜짐, 일어남, 올림이라는 뜻이다. 라틴어에 어원을 둔 영어 레저렉션’(resurrection)다시 일어나다, 일으켜지다는 뜻이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스스로 되살아나셔서 신의 아들임을 입증한 일이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세상 죽음의 권세가 참사람을 살해한 죽임이다. 동시에, 그 죽임을 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과 사랑을 위해 받아들인 죽음이기도 하다. 부활신앙은 그 희생과 사랑으로 죽임과 죽음에서 일으켜지셔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을 깨닫고 우리도 죽음에서 일으켜진 생명의 삶을 사는 일이다.

시체의 소생을 사실로 확신하는 일을 부활신앙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보고 체험하는 일이 진정한 부활신앙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 11:25-26).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더라도 사는 차원을 드러내야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수준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교회는 부활의 교리를 관습적으로 믿는 이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죽임과 죽음을 뚫고 일으켜진 예수님께서 절망 속에 흩어진 제자들을 몸소 일으키시어 당신의 몸으로 삼으신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모신다. 이것이 성찬례의 의미다. 교회는 세상구원을 위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하느님나라의 일을 이어간다. 이것이 선교의 의미다.

참된 부활신앙을 누리려면 우리 교회가 세상에 하느님나라를 전하려 어떤 십자가를 짊어졌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기 위해세상에서 무엇을 실천하며 희생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세상의 칭찬을 받는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박해를 받는 실패와 죽음이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시는 참된 부활의 조건이다. 주님 부활의 영광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죽음에서 일으켜지신 주님과 하나되어, 죽음의 권세를 누르고 일으켜지는 성교회와 교우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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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853호 사설] 

신앙의 예법(禮法)을 마련하자 

대한성공회 선교 125주년 기념에 분주한 9월말, 우리는 한국인 순교자들 축일, 추석 명절, 성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과 더불어 대한성공회 창립 기념일을 맞는다. 이 축일들은 우리 생명과 신앙의 선조들의 보여준 삶의 태도를 기억하여 오늘 우리 삶에 되살리려는 깊은 뜻을 지닌다.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예()를 중요시한 우리 문화가 예배와 전례로 신앙을 훈련하는 그리스도교 전통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예()와 예배로 수행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선교의 핵심이다.

우리 교회 현실을 보자. 성공회 신자와 신자, 성직자와 성직자, 성직자와 신자가 서로 만나면 어떻게 인사하는가? 어떤 말과 태도로 상대방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가? 신자든 성직자든 나이나 서품 연수에 따라 스스로 윗사람이 되어 반말과 하대를 하지는 않는가? 교회에서 서로 부르는 호칭은 무엇이 좋을까? 세상 사람들이 성공회 사람들의 언행에서 성공회 사람임을 알아보는 표지는 무엇일까? 이런 일을 단지 친밀감 표현, 교양, 상식의 문제로 좁힐 수도 있으나 전례와 성사를 중시하는 교회는 이 문제를 신앙의 예법(禮法)”이라는 관점으로 살펴야 한다. 세상을 향한 선교의 품격은 신앙인의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교와 예법의 관계는 긴밀하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이웃을 형제자매로 깨닫고 사는 일에는 그에 알맞는 예법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가 전례를 중시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표하는 예의가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그 예의에 바탕을 두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온 마음과 행동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한가지로 통한다.

세상의 예법은 각자 자기중심의 태도로 남이 가진 힘과 지위를 계산하며 대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복음의 예법은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들 사이의 상호존중에서 서품서열이 기준이 될까? 신자들 사이의 상호배려에서 나이, 입교연수(年數), 사회적 지위, 능력 등이 기준이 될까? 복음의 성찰과 신앙의 예법이 없으면 이런 물음에 세상의 관습을 반성 없이 적용시켜 오해와 착각을 낳는다.

우리가 성찬례에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곧 일상에서 교우들이 서로 만나고, 또 세상에서 낯선 사람과 만날 때 나누는 인사가 되어야 한다. 일상의 삶에서 복음의 예법을 실천하는 일은 주님의 선교명령이다. 선교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선전이 아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예법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이다.

전례의 정수인 성찬례의 성찬기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이 때 이 예를 행하라는 말씀은 이것을 행하라(Do this!), 이 일을 행하라"는 뜻을 좁혀 번역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전 안의 제의로서만 아니라 이 세상의 먹고 마시는, 곧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뜻을 드러내어 기억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교회는 전례의 법이 삶의 예법으로 잘 연결되도록 살피고 다듬어야 한다. 관구와 교구의 전례위원회에서 하루 빨리 성공회 예법을 연구하여 정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신념을 내세우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하고 실천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갈라 5:6 참조) 성공회의 여러 훌륭한 전통과 지향이 명분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신자와 성직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몸으로 익히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전례와 선교에 명실상부한 성공회가 되려면 성공회의 예법 마련은 절실한 과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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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852호 사설]

 

                “자연, 사람, 하느님과의 화해” - 성공회의 사명

 

  대한성공회는 선교 125주년, 한인사제서품 100주년, 한인주교성품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이 여러 숫자들은 이 땅에서 여러 세대를 이어온 한국성공회의 선교 노력을 상징한다. 이 땅을 구원하시려 하느님께서 몸소 성교회를 세우시고 돌보며 이끌어 오셨고, “하느님의 선교에 우리 교회는 최선을 다해 참여하며 응답해왔다는 고백이다. 그 선교 노력을 우리는 자연, 사람, 하느님과의 화해로 정리하며, 우리와 다음 세대가 이어갈 선교의 소망으로 삼는다.

성경에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세계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에 영적인 존재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로께서는 로마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적었다. 성공회가 이해하는 하느님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일들인 바, 그 시작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이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세상 모든 피조물이 그 창조의 은총과 질서를 더불어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연을 물질로만 여겨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긴 인간 탓에,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달리, 자연은 짓눌리고 신음해왔다.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진통하는 자연은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봉헌을 통해서 본래 하느님께서 지으신 하느님의 소유로 회복된다. 본래의 창조질서를 드러내며, 그 창조질서 안에서만 인간은 실제로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께는 먼 곳이 없다!”고 고백했던 선교사들에게 머나먼 동방의 조선 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귀한 세상의 일부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귀한 터전이었다. 복음을 통해서 이 땅은 새로운 빛을 받았다. 새로운 창조의 첫걸음, 본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걸음을 내딛었다. 일제의 강압을 견디면서 오히려 더 큰 소망을 품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빛의 회복, 해방의 기쁨에 차 있던 이 땅에 닥친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은 악마적인 분열과 불화의 상처를 깊이 남겼다. 성공회는 한국전쟁에서 순교자를 배출하며 참된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기원해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참 사람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를 믿는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화해하는 참 사람을 기르며 실천해왔다.

성공회의 예배는 자연과 화해하고, 사람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이다. 성공회의 선교는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다. 성공회는 소속 신자만을 위해 종교적 서비스를 주고받는 종교단체일 수 없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연과 사람과 하느님의 화해를 기도하고 실천하고 실현하는, ‘성령의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제 103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25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성찬례를 드리며 새로운 선교를 시작한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창조의 은총을 깨달아 살기를 기대한다. 모든 이들이 미움과 분열의 어둠을 걷고, 참된 화해와 상생을 이루어가기를 기대한다. 개별화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어리석음과 분노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녹아지기를 기원한다. 모두가 자녀가 되는 행복, 서로가 형제자매가 되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귀한 화해의 사명을 받은 교회의 신자로서 기쁘고 보람 있게 헌신하는 복된 삶이길 기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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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제850호 (2015년 8월 8일) 사설]

 

                      “거룩한 변모”의 비전으로 선교하는 교회

 

  2015년 8월 15일,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을 가려왔던 국세청 별관 철거가 완료되어 서울시민들에게 개방된다. 1937년 성공회 성당 앞에 체신청 건물이 세워질 때, 불과 8년 뒤에 일제가 끝나고 해방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다수 시민이 독립의 꿈을 접은 지 오래이고, 일제체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은 꿈처럼 이루어졌고 오늘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오는 10월 3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25주년, 첫 한인사제서품 100년, 서울과 대전교구설립 50주년, 독립관구 23주년을 기념하는 선교대회를 연다. 지금 우리 대한성공회의 역사적 비전은 무엇일까?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감당할 선교는 무엇인가? 성공회 교단 자체의 성장과 발전은 어디까지일까?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우리끼리 자족하고 자축하며 감사함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교회 밖 선교 전문가는 성공회를 객관화하여 진단한 결과로 우리를 경고한다.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 주체적으로 호응하여 선교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서 시급히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때를 놓치면 그만 노화되고 무능력한 교회로 소멸할 위험이 크다는 말이다. 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리교회의 참된 비전을 어디서 어떻게 얻고 있는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진심을 다하여 묻고 확인할 깊은 물음이다.

  8월 6일은 <주의 변모> 축일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첫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십자가의 길”이 율법과 예언서가 가리키는 완전한 신성과 영광의 길임을 깨우쳐준다. 그래서 교회는 9월 14일 <성십자가의 날>의 40일전 8월 6일에 주님의 변모 사건을 기념한다. 눈부시게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예수님 변모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선교비전이고, 예수님을 뒤따라 살아가는 우리 교회의 선교비전이기도 하다. 신앙적인 비전은 현실의 조건을 따지고 성공 가능성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나라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일이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무모하고 무의미하다. 하지만 성부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신뢰하며 순종하기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길이 된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리라는 비전이다. 대한성공회의 선교비전이 거룩한 변모 사건처럼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연결된 래디칼(radical)한 내용이길 바란다. 현실적 변명과 합리화를 그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반드시 하는 태도가 성공회의 참된 영성이 되길 기대한다. 성공회 사명과 발전이,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께 우리를 통해 반드시 이루실 약속으로서 현실화되고 공유되길 기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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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신문 제845(2015523) 사설]

                         성공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

 

지난 511, 서울시는 오랫동안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을 가려왔던 국세청 남대문 별관을 철거하고 그 일대를 역사문화공간화하는 사업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앞으로는 세종대로에서 서울시의회건물(1935)과 서울대성당(1926)이 연결되어 한 눈에 보이게 된다. 서울대성당 인근이 서울의 근대화과정을 돌아보는 역사적 장소이기에, 그 역사를 공유하는 시민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취지다. 성공회도 관구와 교구의 선교센터로 사용해온 삼층건물을 철거하며 이 뜻에 동참하였다.

이 시점에서 우리 관심은 단지 대성당건물이 드러나서 보다 많은 이들이 성공회의 존재를 알게 되리라는 점에 있지 않다. 도리어 성공회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에게 교회와 교단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과제가 분명하고 시급하다는 점에 있다.

돌아보면, 선교 125주년을 맞는 대한성공회가 이 땅의 교회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작지 않다. 봉건질서의 극복과 민족의식 고취, 한국전쟁중의 신앙수호, 교회간 일치운동과 민주화운동, 인문사회적 가치를 위한 대학운영, 복지사회를 선도한 나눔운동에 이르기까지, 성공회는 이 땅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하느님의 선교에 참여해 왔다. 그런데도 성공회의 지명도는 매우 낮다. 물량적 지표에 연연하지 않음은 좋은 일이나, 우리끼리만 만족하고 안주하는 태도는 선교적 자세일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 더욱 많은 사람이 교회를 통해서 세상을 위해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사역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서울대성당의 드러남을 선교적 전기(轉機)로 삼기 바란다. 관구차원에서 각 교구의 선교국, 성공회대학 신학연구소, 주교원 자문 신학교리위원회, 평신도원 등을 망라하여 우리 시대, 대한성공회의 교회적 특성을 어떻게 내세워 선교할까 깊이 연구하고 선언하는 모임이 있기를 바란다. 한시적이라도 좋으나, 목표는 실제적인 선교방향과 정책을 확인하고 공유하는 일이다. 연관지어, 서울교구에서 614일과 712일 오후 330분에 가지는 <새로운 50년을 향한 선교포럼>이 내실 있게 이루어져 그 내용이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철저히 준비하여, 다른 교구의 선교정책 담당자와 신학연구자도 초청하고, 모든 교우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도록 홍보하며 자료를 공유하기 바란다.

교회 설립과 성당건축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성탄(聖誕)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 서울대성당이 세상에 활짝 드러나게 된 일을 교회 공현(公現)의 시작으로 보자. 524일은 교회의 탄생일이기도 한 성령강림주일이다. 이제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신뢰하며 하느님나라의 기쁜 소식을 펼쳐가야 한다. 이로써 성공회는 성령의 능력을 세상에 나타내는 교회로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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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주일>

 

                                         진실의 증인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첫 선물은 바로 평화와 성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자 겁에 질려 어떤 집에 모여 문을 모두 걸어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겁을 내고 두려워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우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 치고 재판한 유다인들을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하루 밤 사이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만 가지고도 그들은 박해를 받기에 충분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했던 것은 그들 내면에 있는 불안과 죄책감이 아닐까 합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하니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요?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사실은 그들의 양심을 괴롭히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에게 못 자국 난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시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예수께서는 이들을 질책하거나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평화를 주십니다. 제자들은 영혼을 다해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신 평화는 단순히 갈등과 분쟁이 없는 조용한 상태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 안주하는 그런 평화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안일하고 편안하게 도망쳐서 사는 삶을 축복하실 리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다고 하는 것을 아무런 사고나 위험이 없이 편안한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현실을 매우 위험하고 악하니 그곳에서 탈출해서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을 평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주신 평화는 제자들의 죄가 용서받고 용기를 얻어 진실의 증인이 되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는 상태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평화가 있기를 기원하시면서 다시 제자들을 보낸다고 하십니다. 비록 유다인들이 서슬이 퍼래서 예수를 박해하고 제자들을 색출하려 한다 하더라도, 그래서 위험과 고난이 앞에 보인다 하더라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나가는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는 영적인 평안함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입니다. 피 흘린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를 통해 주신 평화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의문이 많은 토마에게 역시 상처를 보여주시면서 평화를 주십니다.

 

출애굽의 역사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안일하게 배불리 먹고 사는 그런 평화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은 험난한 고난과 싸워야 하는 길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평화를 얻지 못한 백성들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대들고 우상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진리를 향해 가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영적인 기쁨과 원수들 앞에서도 상을 차려주시는 평화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예수께서는 평화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 년 전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참사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단순히 어린 학생들이 죽어서만도 아닙니다. 304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서도 아닙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불의의 자연재해나 사고로 인해 이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경우는 많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를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는 까닭은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 사회 공동체가 안고 있는 뿌리 깊은 문제가 한꺼번에 드러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쓰고 난 노후 된 배가 다시 우리의 여객선이 되고 무리하게 짐을 싣고 사람을 태우는 모든 과정이 극단적인 배금주의와 관료들의 부패의 소산이었습니다. 또한 자질이 부족한 선원들이 수 백 명의 목숨과 소중한 재산들을 싣고 운항을 할 수 있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관계기관의 부패와 무능은 국민 모두를 절망케 했습니다. 배가 기울고 침몰하는 상황이 전 국민에게 보여 지는 상황에서도 고기잡이 어선들의 구조 활동과 자원하는 잠수사의 구조 활동도 해경에서 계약한 회사의 구조를 기다리기 위해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자발적으로 배에서 나온 사람들 말고는 한 사람도 국가에 의해 구조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여기에 온 국민이 분노하고 절망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혹시 국가가 국민을 버린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에서 우리는 작년 가장 슬픈 부활절을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더욱 아프고 슬프게 만드는 상황은 세월호 사태가 일어나고 일 년 동안 지내면서 일어났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기가 막힌 사태에 유족들은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대통령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유족들은 보상금이나 배상금에 대한 요구, 의사상자 지정, 단원고 학생들의 특례 입학 등을 요구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언론과 사람들은 유족들의 마음에 심한 상처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슬퍼하며 진상을 밝혀달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요청에는 응답이 없고 배상금 보상금이 얼마라는 말부터 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세금은 들어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가입한 보험금까지도 포함시켜서 누가 얼마를 받느니 하는 보도를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유족들이 돈만 밝히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유족들이 원하는 진상규명은 정치 쟁점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국민은 반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침몰한 배를 인양하는데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고 인양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과연 세월호가 보물선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빨리 이 참사를 잊을 것인가에 이 사회가 주력하고 있는 것에서 더욱 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형제애의 현주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비정한 사회에서 우리의 영혼이 침몰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는 우리로 하여금 쉽게 잊으라고 합니다. 진실을 덮어서 드러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지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해에 송파 세 모녀 자살 사건, 세월호 참사, 임 병장, 윤일병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임을 확인했습니다. 지금도 꼬리를 물고 자살하는 사람들의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를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잇따른 참변 속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이 존재함을 애써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으면서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몸을 이룹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용납하는 공동체 문화와 정신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부활의 복음을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셔서 역사와 삶의 주인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사실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못 자국 나고 창에 찔린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의 진실을 똑똑히 보라고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평화로운 마음으로 서로 용서하면서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죽음의 권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음을 확신하기에 우리는 다시 우리의 도덕성과 형제애를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 윤리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참사를 당하는 것까지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일은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부활의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들로서 우리는 진실이 가려지고 왜곡되고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니는 벚꽃 피는 것 보기 싫다고 합니다. 단원고 학생들 모두가 환하게 핀 벚꽃나무 밑에서 기념촬영을 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에게는 꽃들이 만발한 찬란한 봄날이지만 이들에게는 가장 슬픈 봄날이 아닐 수 없습니다.

9명의 실종자 가족들은 하루 속히 시신을 찾아서 유가족이 되는 게 소원이라고 합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학생 20명을 구조했던 화물차 기사 김동수씨는 극심한 가난과 병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은 세월호에서 자기만 살아왔다는 죄책감에 빠져서 시달린다고 합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과 말이 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의 희생자들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일과 이들이 위로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이 시대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신앙인으로서 부여된 신앙적 사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입니다. 진실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월호 사건뿐만 아니라 눈물 흘리고 고통 받는 백성들의 편에서 진실을 알고 정의로운 세상을 이루어 가는데 조금도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유태인들의 홀로 코스트 기념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망각은 우리를 노예의 길로 인도하고, 기억은 구원의 신비이다.’

작년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한 약속들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숨결이 우리 모두에게 특히 희생자 가족들의 가슴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장기용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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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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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성공회 주교회 메시지]

“전후 70주년”에 즈음하여

“나는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운다. 너는 땅 끝까지 나의 구원이 이르게 하여라.”

(이사야서 49:6b)

시작하며

일본성공회의 모든 지체들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올해 2015년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70주년에 해당합니다.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종결되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해 2천만명에 가까운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사람들, 일본 국내의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70년을 경과했지만 전쟁의 희생과 피해로 인한 온갖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들은 일본이 침략한 나라들과의 화해와 평화가 아직도 실현되지 않고 있음을 반성하며 아픔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후 70주년을 맞아, 우리들은 이 전쟁으로 희생된 분들, 또한 지금도 그 아픔과 고통, 슬픔 속에 있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세계 평화를 향해 일본성공회가 마땅히 지녀야할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합니다.

일본성공회의 전쟁 책임

이 시기에 즈음하여 우리는 1995년에 열린 “일본성공회 선교협의회”를 기억합니다. “일본성공회의 선교 ~ 역사에 대한 책임과 21세기의 전망”을 주제로 열린 이 협의회에서 일본성공회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그 반성의 토대 위에서 21세기를 향해 일본에서 역사적으로 지배와 전쟁의 피해를 입고 지금도 차별받고 있는 사람들 – 재일한국 조선인을 위시한 다른 아시아 사람들, 오키나와 사람들, 아이누 사람들, 피차별부락 사람들, 장애를 지닌 사람들, 여성들 등 - 과 함께 걸어갈 것을 교회 선교의 중심 과제로 삼기로 확인하였습니다.

나아가 이듬해 1996년에 열린 개최한 일본성공회 제49회 정기총회에서는 “일본성공회의 전쟁책임 선언 결의안”이 채택되어, 전 교회가 일본성공회의 전쟁책임을 공유하고, 일본이 침략한 여러 나라의 교회에 일본성공회의 사죄의 뜻을 전함과 동시에 각 교구와 교회가 역사적 사실 인식과 복음 이해를 되묻고, 심화해 나가기 위한 실천을 계속해가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지역 각 성공회와의 협동 관계 - 특별히 대한성공회, 필리핀성공회와의 협동 관계 –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또한 오키나와의 평화와 인권 문제에 관여하도록 추진해 왔습니다.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와 화해, 그리고 오키나와의 평화 확립은 이후로도 일본성공회의 선교활동에서 소중한 과제로 계속할 것을 다시금 확인하고, 실현을 위해 노력해갈 것입니다.

동일본 대재해와 2012년 선교협의회

2011년 3월 11일의 동일본 대재해와 동경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 재해는, 그 지역에 사는 모든 생명에 대해 중대한 희생과 피해를 가져왔고, 또한 우리들의 삶의 방식과 교회의 존재 방식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 배경 아래 2012년 9월에는 "더없이 존엄한 생명 - 선교하는 공동체를 향해"를 주제로 일본성공회 선교협의회가 개최되어 "일본성공회 선교와 목회 10년 제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성공회의 결의로 "비극으로 가득찬 이 세계와 사회에서, 절망 가운데 있는 이들의 가여린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는 것. 압도적으로 희망을 빼앗긴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인 “생명의 기쁨”을 계속 전하는 것. 그것이 비록 미미한 소리요 작은 기도라 할지라도 계속 말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며 걸어갈 것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향후 일본성공회의 모습

최근 수년간 일본의 정치적 정세를 보면, 특정비밀보호법 성립, 집단적 자위권 행사 용인, 헌법 '개정'의 움직임, 특히 전쟁의 포기를 주창한 헌법 9조의 개정 등 일본의 재군사화 움직임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와 더불어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고착화, 그리고 한국, 중국과의 관계 악화 등 평화와 안정이 위협받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한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한 방사능 오염은 사고 후 4년을 지난 지금도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경제적 격차가 벌어져 빈곤으로 인해 최저 생활조차 곤란한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헤이트 크라임, 헤이트 스피치(인종차별 거리연설)로 인한 인권 침해도 격화되고 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전쟁과 분쟁도 더욱 심해지고 그칠 줄을 모릅니다. 바로 그런 상황이기에, 전후 70년을 맞이한 우리들은 지금까지의 역사와 복음으로부터 배워, 생명을 빛내도록 일하며 차별의 벽을 허물어 갈라진 이들을 하나로 잇는 평화의 도구로서 걸어갈 것을 새롭게 다짐했습니다.

평화의 징표, 화해의 도구로

주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의 죽음 전에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고 명하시고 그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 주셔서 화해 사역으로 내 보내셨습니다.(요한 20:21 이하)

우리들은 일본 사회 속에서 작은 무리입니다. 그러나 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점, 생명을 존중하며 서로 축복하는 공동체로서 함께 예배하고 봉사하고 걸어가면서, 각 지역에서 "평화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전후 70년을 맞아 우리들은 주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이 "평화의 지표"가 된다는 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일본성공회의 전쟁책임 선언”과 "일본성공회 선교와 목회 10년 제언"의 내용을 성실히 실천하고, 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로써 보여주신 화해와 평화를 전해 나가고자 바랍니다.

2015년 부활절에

일본성공회 주교회

(번역 : 유시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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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부활특집호 성공회신문 사설]

                            

                    참된 변화를 이루는 부활신앙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다. 교회는 부활의 증인이다. 주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작은 부활절이다.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감이 교회와 신자의 삶이다.

성경의 부활은 아무나 목격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만이 깨닫는 일이다. 과학적 상식을 뛰어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 아니다. 초자연을 뛰어넘어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알리는 신앙적인 표징이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권세를 부수고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경험과 고백이다. 예수님과 하나 되어 그 분의 사랑과 일에 일치하면 우리도 세상의 유혹과 박해를 이기며 하느님나라를 누리고 하느님나라를 위해 일하며 살게 된다는 믿음이다.

부활은 참되고 깊은 변화를 의미한다. 세상의 통속적 가치와 논리와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차원의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우리는 은연중 예수님만이 유일무이하게 부활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바울로 사도는 이렇게 표현한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1고린15:16)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는 이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나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1고린15:44,51) 죽음을 소멸의 상태로 보지 않고, 진정한 변화의 계기로 깨닫는 일이 부활체험의 본질이다.

부활의 기쁨과 능력을 노래하는 일은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머리와 입술의 찬양을 넘어선다. 어떻게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느님께 대하여 살아날 것인가? 교회가 세상의 가치, 논리, 방식에 따라 기득권에 집착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참된 변화는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선교 125주년을 준비하는 우리 본교회와 선교교회들에서 부활의 기쁨과 능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우리 교회는 거듭난 존재로서의 모습을 어떻게 이 땅에 보여줄 수 있을까? 물량중심, 물신숭배, 개인주의를 휘두르는 세상을 이겨 내는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우리는 빛과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는 교회와 신자로 변화되고 성숙해가고 있을까?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우리 교회와 신자는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
꾸준히 이어온 사회선교현장에서 부활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복지기관을 넘어서서 교회의 선교가 되게 하는 힘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불의하고 불합리한 사회현실에 하느님나라의 빛을 비추어주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설립 100주년을 맞는 성공회대학교는 어떻게 시대적인 위기를 넘어 새로워질 수 있을까? 현상유지를 넘어서서 혁신적인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임을 받아들이는 차원의 자기 비움이 요구된다.

“믿기 어렵지만 참고 믿어야 하는” 교리로 부활의 신비를 강조하면 마치 “빵을 돌로 만드는” 일처럼 된다. 우리에게 깊은 변화가 주님의 현존을 통해서,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 참된 부활이다. 참된 변화를 이루는 부활신앙으로 대한성공회가 새로워지길 기원한다. (20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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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제841호 (2015년 3월 28일) 사설]

 
              선교 125주년의 성주간과 부활절기를 맞으며

 

대한성공회는 올해 선교 125주년이 된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땅에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로서 선교를 시작한 지가 100년을 훨씬 넘어 다시금 4반세기를 지나는 시점인 것이 분명하다.

서울교구는 지난 2012년 8월 ‘교회진단 설문조사’를 전문기관에 의뢰했다. 20개 교회를 택하여 1,300여명 신자들의 신앙생활 실태를 파악했고, 성직자 설문, 교구선교전략시스템 점검 등 정밀진단을 실시했다. 결과는, 선교 120년 역사와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실제적인 선교역량은 대단히 부실하다는 평가였다. 향후 10년간 획기적인 노력이 없다면 선교역량이 고갈되어, 교회공동체는 노화되고 수축되고 사회적 영향력도 저하되리라는 경고였다. 직접 진단을 받지 않은 다른 교구도 크게 차이가 없겠다는 추론이 가능했다. 그 진단 이후로 교구차원에서 선교역량의 강화와 축적을 위해서 온라인선교, 공동양육과정 개발, 가정기도운동, 평신도지도자 육성 등이 이어졌다. 이제 이런 노력의 방향과 내용을 철저히 점검하여 다시금 5년, 10년, 30년의 비전과 계획을 세워야 할 때다.

교회는 시간을 거슬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풀어주신 구원의 사건들을 기억한다. 또 시간을 앞당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약속하시고 구원의 완성을 소망한다. 그 기억과 소망으로 오늘 마땅히 해야 할 실천을 이어간다. 올 한해 교회 전례력의 정점을 이루는 고난주간과 성삼일 그리고 부활대축일과 50일 부활절기를 맞이하며, 다시금 구원의 기억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나라 실현의 소망을 뚜렷이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은 이 시대 신자의 개인적인 각성이나 체험이  아니라, 이천년 전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 신성모독죄와 반역죄로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어떻게 그 참혹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로 경험되고 고백되며 기쁨과 희망의 근원이 되시는가? 이 질문의 답을 오늘 이 땅에서 우리의 믿음으로 찾아내고 전해야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은 체험해야 할 구원의 역설이요 삶의 신비이며, 세상에 선포하고 실현해야할 도전이자 소명이다.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사도2:36).” 우리가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느님께서 살리시어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성서의 역설적 증언을 아프게 듣는다. 교회를 이루어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혹시라도 이기심과 게으름과 무책임함으로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의 논리와 권세에 넘겨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믿음과 선교현장을 되돌아볼 일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더욱 더 깊이 깨달아 분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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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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