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56건

  1. 2018.04.07 2018년 부활절기 알림막 (1)
  2. 2018.02.14 2018 사순절기 알림막
  3. 2018.02.14 [옮김]성공회신문 908호 사설 - 성공회의 도약을 위해 하나가 되자
  4. 2017.12.20 [옮김] 성공회신문 제906호 사설 - 교구의회 대의원의 사명과 책임
  5. 2017.12.20 [옮김] 성공회신문 제904호 사설 - 선교를 위해 하나되는 교구의회
  6. 2017.12.20 [옮김] 성공회신문 제899호 사설 - 성공회의 위기를 깊이 성찰하고 회개하자
  7. 2017.12.20 [옮김] 성공회 신문 제897호 사설 - 비둘기처럼 양순하고 뱀처럼 슬기로운 교회
  8. 2017.04.16 주님의 부활을 기뻐합니다!
  9. 2017.03.01 [옮김] 2017년 서울교구장 사순절 사목서신
  10. 2017.02.23 [옮김] 성공회신문사설; 올바른 식별을 훈련하는 사순절기
  11. 2017.01.20 [옮김] 성공회신문 사설: 성공회사목을 위한 성공회신학을 공유하자
  12. 2017.01.19 [옮김] 성공회신문 사설 ; 선교정책을 생산하는 의회
  13. 2017.01.19 [옮김] 성공회신문사설 ; 인구절벽과 신자절벽
  14. 2016.08.16 [옮김] 불신(不信)의 냉소에서 신뢰(信賴)의 증언으로
  15. 2016.05.12 [성공회신문 868호 사설] 성공회 신앙을 이어가는 가정 공동체
  16. 2016.03.27 [성공회신문 865호 사설] 부활 - 일으켜지신 주님, 일으켜지는 교회
  17. 2015.09.20 [옮김]성공회신문 853호 사설; 신앙의 예법을 마련하자
  18. 2015.09.14 [성공회신문 852호 사설] “자연, 사람, 하느님과의 화해” - 성공회의 사명
  19. 2015.09.14 선교 125주년 기념행사 포스터
  20. 2015.08.09 [성공회신문 제850호 사설] 거룩한 변모의 비전으로 선교하는 교회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8년 1월 13일자 성공회신문 908호 사설

  성공회의 도약을 위해 하나가 되자

  ‘성공회의 도약을 위해!’ 반갑고 힘이 되는 말이다. 지난 성공회신문 907호 성탄 특집호가 성공회에 오래 헌신한 교우들의 염원과 지혜를 모아 붙인 제목이었다. 여러 의견은 하나로 모아졌다. 교회다운 교회, 성공회다운 성공회, 신자다운 신자가 되자는 목소리였다.

교회의 성서 원어는 ‘에클레시아’이다. ‘불러내어 모은 공동체’라는 말이다. 여기에 ‘교회’敎會)라는 우리 용어는 ‘가르침 위에 선 모임’이라는 뜻을 보탰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계약의 공동체요, 성령께서 세우고 이끄시는 공동체다. (성공회기도서 778쪽)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을 받아 모인 사람들이 일치하여 복음을 선포하고 선교를 펼쳐간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펼치신 구원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전례’ 안에서 배우고 훈련하여 신자를 빚어낸다. 교회는 삼위일체의 삶을 따라 우리 삶을 축성하고 재구성하는 ‘성사’ 생활에 몰두한다. 전례와 성사 생활로 훈련한 신자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세상에서 선포하고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일이 교회의 ‘선교’이다.

그런데 이 명백한 교회론에 더하여서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교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신자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신자도 성직자도 우선은 개인으로 살아간다. 나름의 종교적 체험과 신앙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실제 삶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도 않다. 서로 다른 신자와 성직자가 하나의 믿음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갈등과 화합의 역동적인 평형이 살아있는 교회의 실제 내용이 된다.

그런데 이상적 교회론은 신자가 세례로써 온전한 교회의 사람이 되었다고 전제한다. 성직자가 서품을 받았기에 온전히 교회를 위해 헌신하리라고 기대한다. 신자와 성직자는 이미 자격을 갖추었고 서로 신뢰하며 언제든 선교에 매진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본다. 목표와 표어를 정하기만 하면 모두 하나되어 실행하리라는 전제로 교구와 교회가 사목 계획을 세운다. 과연 현실이 그러한가? 좀 더 정직하고 신중해야 한다. 성공회의 교세와 정체성이 다소 움츠러든 모양새는 교회론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사람의 실제 태도와 역량이 문제의 핵심이다.

현실의 구체적인 신자와 성직자는 교회의 기본과 이상에 근접하도록 식별을 배우고 실행을 훈련했는가? 성공회의 도약을 위해서 먼저 물어야 할 점이다. 교구별로 교세는 달라도 모든 신자와 성직자가 현장에서 선교에 열심을 다하고 있다. 그 열심에 더하여 충실한 교육과 훈련이 병행되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성공회의 도약은 밖에서 유행하는 이론이나 프로그램을 들여오는 일로는 이루기 어렵다. 식별을 위해서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고 실행을 위해서 충분한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내실이 없이 시작하는 일들은 도리어 교회의 구심력과 선교역량을 흐트러트릴 염려가 커진다. 이제까지 뿌리 내려온 전통과 함께 쌓아온 경험을 성찰하여 분석한 바탕 위에서 실천해야 한다. 이 일에 서로 협력하여 집중할 때 성공회의 도약은 가능하다.

신자와 성직자 구분 없이, 원로세대를 이어서 중장년세대, 청소년 청년, 그리고 여성의 이해와 기대를 물어야 한다. 교회가 함께 하는 신앙의 발판을 든든히 마련해야 한다. 지속적이고 알찬 신앙 교육으로 몸을 만들고 힘차게 뛰어 올라야 한다. 개인의 선호와 취향, 관심과 입장의 차이를 ‘교회답고 성공회답고 신자다운’ 신앙에서 녹여내도록 모두 다짐해야 한다. 주교원을 비롯하여 성직자원, 평신도원, 그리고 관구와 교구의 여러 전문위원회가 신자들의 희망에 귀 기울여 ‘교회 신앙’의 기초를 확인하고 신앙 훈련과 학습의 기본기 마련에 매진하는 한해가 되기를 기대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7년 12월 9일자 성공회신문 906호 사설

 교구 의회 대의원의 사명과 책임

 지난 11월 26일 대한성공회의 세 교구는 교구 의회를 마무리했다. 뚜렷한 선교 비전이 부족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동안 어지러웠던 교회의 중심을 잡고 서로 격려하려는 노력이 돋보였다. 그런데 회의 전반에 걸쳐 긴장감이 느껴졌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성공회의 주교직과 교구 의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 서로 다른 이해가 드러났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 사목과 선교 정책을 결정하는 권위가 주교직에 위임되어 있느냐, 아니면 교구의회 대의원의 합의로 세워지느냐의 문제가 미묘하게 부딪친 것이다.

대한성공회 헌장의 <교리와 전례와 관한 기본 선언>을 살펴보자. “대한성공회는 역사적인 교회로 사도직을 계승하며,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3성직(주교, 사제, 부제)을 교회의 기본 성직직제로 한다. 주교는 성서의 가르치심과 성교회의 규칙에 따라 교회의 사부로서의 권위를 가지며, 교회의 바른 신앙을 지키고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권한을 가진다.” 성공회 전통에서 교회의 권위는 주교직으로 드러난다는 말이다. 성공회는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하는 의회제도를 통해서 모든 일을 논의하고 결의한다. 교구의회의 권위는 신자의 주권을 모은 때문이 아니다. 평신도와 주교와 사제와 부제가 모두 함께 교회의 권위에 순종하고 그 권위를 나누어 가지기 때문이다.

오해를 바로잡아야 한다. 신자들이 대표를 세운 회의가 모든 일을 결정한다는 생각은 성공회 전통이 아니다. 장로회 또는 회중교회의 전통이다. 성공회는 교구장 주교가 교회의 신앙 전통과 교구 의회에서 위임 받은 권위로 교구의 사목을 통할한다. 만약 주교직의 권위가 교구의회가 부여한 것이라면 그 교구의회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대의원들이 모여서 다수결로 부여했다고 답한다면 대의원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역시 신자들이 다수결로 부여했다고 말한다면 신자들의 권위는 어디서 나오는가? 개인 신자들이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의 믿음과 체험에서 권위가 나온다고 답하게 된다. 문제는 바로 이런 논리가 개신교 대형교회가 ‘목회자 세습’ 등을 결정하고 합리화하는 근거가 된다는 점이다. 교회의 권위를 자신이 세운 권한에서 찾는 태도가 수많은 잘못의 뿌리가 된다. 성공회가 이런 논리를 거부함은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주교직은 권위의 바른 위임과 수행으로만 바로 선다. 교회 전통과 교회공동체가 주교에게 위임한 사목적 권위를, 다시 주교는 합당한 직제와 질서 안에서 신자와 성직자에게 위임한다. 한 교구의 직무사제인 성직자는 주교직에서 사목의 권위를 나누어 받는다. 같은 주교직을 통해 신자는 세상 속의 사도직을 나누어 받는다. 보편사제인 신자의 제자직이다. 이렇게 위임 받은 권위로 현장에서 사목을 수행하며 거둔 경험과 지혜를 모으고 평가하고 새로운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교구의회의 목적이다.

의사(議事) 진행과 회무(會務) 처리로 대의원들의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 의결(議決)한 내용과 과제를 지역 교회에 생생하게 전달해야 한다. 교구장 주교의 권위는 성직자와 신자 대의원을 통해서 교구 곳곳 사목의 현장에서 존중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주교를 통해 나눈 성직자와 신자 대의원의 소명과 책임이 지역교회에서 지속될 때 모두의 권위가 바로 세워지고 풍성한 선교의 결실을 거둘 수 있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7년 11월 11일자 성공회신문 제904호 사설

선교를 위해 하나 되는 교구의회
 
교회력으로 한 해의 수확을 거두고 미래를 계획하는 시기이다. 11월에는 교구마다 의회를 열어 지금까지 사목 성과를 평가하고 새해의 사목 계획을 세운다. 서울교구는 새 교구장의 승좌를 계기로, 산적한 교구 행정 현안을 신속히 정리하고 내실있는 선교를 향해 신학과 체제를 정비하고 있다. 대전교구는 성직자와 신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신자교육을 강화하여 교회의 영성과 사목 역량을 높이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산교구는 성직자와 신자가 하나 되어 ‘교회다움’을 회복하여 ‘교회의 다음’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통상 보고사항 처리와 사업계획 승인에 대부분 일정을 썼던 관행을 넘어서 정직한 현실 분석과 선교 대안을 고민하는 의회가 되리라는 기대가 아주 크다. 좀 더 선교를 위해 더 일치하여 알찬 결실을 맺는 교구 의회가 되도록 교회의 개념에 관한 신학적 성찰을 제안한다.

 

성공회가 말하는 교구(敎區, Diocese)는 한 주교가 관할하는 지역을 뜻한다. 이 교구가 교회의 기본 단위라는 인식이 성공회의 전통이고 신앙이다. 많은 신자는 한 사제가 관할하는 본교회(옛 전도구)가 훨씬 더 와닿는 교회의 단위라 생각한다. 교구가 교회의 기본단위라고 하면 생소하게 들린다. 역사에서는 행정 관리에 유용한 교구를 생각한 적이 있지만, ‘교구=교회'라는 말에 담긴 정말 중요한 핵심은 교회가 “하나이요,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공번된(보편적) 교회”라는 사실이다. 성공회 전통은 교구로 하나인 교회가 우리의 신앙 고백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교구장 주교는 교구로 하나인 교회의 사목을 통할하는 지위와 권한을 갖는다. 주교의 권위는 개인의 권력행사가 아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사명에 따라 사목(司牧)을 실천하는 일이다. 개별 교회가 모인 연합의 대표로 주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애초에 교구 단위의 선교를 위해 마련된 주교의 자리를 이어오는 것이다. 주교직을 주교 개인의 독점적 권위로 이해한 오랜 관행은 심각한 왜곡이다. 마찬가지로 주교직을 단순히 상징적인 기능으로 이해하는 일도 큰 오해이니 바로 잡아야 한다. 교구가 교회의 기본 단위이듯 교구장 주교는 실제로 교회를 통할하며 무한책임을 지는 ‘순교 일순위의 사도 계승자’이다.

성공회의 의회제도는 관구에 따라 운영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 목적은 교구장 주교를 도와서 선교를 계획하여 다짐하고 실천하는 일이다. 아울러, 주교의 치리와 사목이 독선으로 흐르는 관행을 방지하도록 돕는다. 주교의 사목은 교회 공동체 신자 전체를 위해 펼쳐지고, 교회공동체 전체를 통해서 현실화되어야 한다. 교구 의회는 하나인 교회의 선교와 사목 수행에 필요한 일을 함께 식별하고 논의하며 기도한다. 주교와 성직자원과 평신도원을 구분한 취지는 분리된 개별 조직이 각자의 이해 관계를 주장하라는 뜻이 아니다. 한 교회 안에서 주교의 가르침과 감독, 성직자의 성실한 사목, 신자의 기쁨과 헌신을 드러내려는 뜻이다. 각기 다른 삶의 자리와 전문성을 반영하여 숙고하고 이를 다시 합하여 최선의 식별을 하라는 요청이다.
 
세 원(院)이 서로 책임을 미루고 각자의 주장만 관철하려 한다면, 교구 의회는 생산적인 선교 정책으로 힘을 모으기 어렵다. 성공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이다. 성공회 선교는 이 정체성 안에서 우리 교회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확인하여 실천하는 일로만 가능하다. 올해 교구 의회가 불필요한 갈등과 힘 없는 관행을 넘어서길 바란다. 오직 복음 전파와 선교 실천에서 모두 하나가 되는 교회로 나아가자.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7년 8월 26일자 성공회신문 제899호 사설

 

성공회의 위기를 깊이 성찰하고 회개하자

 

몇 년 사이에 부쩍 성공회가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전해진다. 그런데 정작 그 위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차분히 살피는 자리는 충분했는지 되묻게 된다.

위기의 본질에 관한 성찰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정서적 불안감만 더 커지게 된다. 각자의 사명과 책임을 전제로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서로 남을 탓하며 책임을 떠넘기는 수준을 넘기 어렵다.

신앙의 관점에서는 위기 자체가 아니라. 그 위기를 성찰과 회개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정해진 기준으로 나와 남을 정죄하는 일보다도, 위기 앞에서 우리 자신과 우리 기준을 함께 깊이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 위기를 맞아 깊이 성찰하고 회개하면 회복과 갱신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성공회의 위기가 몇몇 인물의 잘못과 탐욕 때문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이제부터 그런 이들은 배제하고 치리와 운영을 잘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동체의 전체적 역량과 인식이 그런 잘못과 탐욕에 무능하고 무감각하다면 이는 정말 심각한 일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함께 깊은 성찰과 회개의 운동에 나서서 교회의 목적과 기준과 수단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성공회의 위기를 살필 때, 역할과 권한을 맡았던 이들에게 이유와 책임을 묻는 일은 당연하다. 분명한 비판이 있어야 마땅하고, 필요하면 비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치리와 운영에 관한 권한과 책임은 개인의 도덕성에 의지하는 수준을 넘는 문제다. 교단과 교구로서 운영하는 합리적 시스템에 연결되어 있다. 동시에 우리 모두의 신앙과 영적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개별적 정죄에 머물지 않는, 교단 차원의 영적인 회개와 사역의 갱신이 필요하다.

교회 구성원의 대화에서 성공회의 위기가 성찰과 회개의 태도로 다루어지기 바란다. 신앙인의 대화가 수다나 뒷공론의 수준일 수 없다. 대한성공회가 위기라고 ‘누가’ 말하고 있는가? ‘무엇을 근거로’ 들고 있는가? ‘우리 자신’은 성공회를 이룬 지체로서 이 위기에 어떤 ‘책임’을 느끼고 있는가? 무슨 ‘대안’을 고민하고 있는가? 비판은 진중하고, 비난은 신중해야 한다. 함께 생각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성찰하고 소통해야 한다.

성공회의 여러 지표가 대체로 어두운 것은 사실이다. 사회적 영향력의 쇠락, 출석신자와 헌금액수의 감소. 신자 구성의 노령화, 다음 세대의 공백, 전입자의 정착률 저하 등등. 무엇보다 크고 시급한 과제는 신뢰가 깨지고 약해진 공동체를 회복하는 일이다. 교회위기의 원인과 이유를 살피고 대안을 말할 때에, 우리 각자의 책임과 각성과 결단의 내용이 꼭 들어있어야 한다. 각자의 진정한 성찰과 회개가 서로의 신뢰 회복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앙인과 신앙공동체의 성장과 발전은 언제나 위기상황에서 은총에 힘입은 성찰과 회개를 통해 이루어졌다. 성경과 교회역사의 증언이다. 위기를 깨닫는 일은 정직하고 지혜로운 일이고, 그로 인해 불안과 갈등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다. 깊은 성찰과 회개를 통해서 서로 간의 신뢰를 회복하고, 함께 교회를 새로 일으켜가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7년 7월 23일자 성공회신문 제897호 사설

 

비둘기처럼 양순하고 뱀처럼 슬기로운 교회

 

한국성공회의 교세는 크지 않다. 하지만 사람과 돈이 적다고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것은 없다. 대한성공회는 작은 교단임에도 독특한 영성과 활발한 사회선교로 한국교계와 사회에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작년과 올해에 걸쳐 서울교구의 사회선교현장과 임대사업에 과오와 의혹이 생긴 여파로 성공회의 자부심이 안팎으로 꺾이고 위축되는 상황이어서 많은 이들의 걱정과 상심이 크다. 무엇이 문제의 핵심일까? 몇 사람의 도덕적 일탈이 이유라면 차라리 해법이 간단하다. 그런데 문제가 한국성공회가 교회공동체로서 신뢰할 만한 수준인가에 관련된다면 이는 좀 더 깊고 정직한 성찰이 필요하다.

여전히 한국성공회에는 중도(Via Media)신학, 성육신(Incarnation)신학, 전례(Liturgy)와 성사(Sacrament)신학, 주교직과 의회제도(Episcopal and Synodical) 등 물려받은 자산이 풍요롭다. 작년 올해 불거진 사건 사고들은 성공회 신앙의 방향과 내용이 잘못된 탓은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조직체의 의사결정과 집행과정이 합리적이지 않고 투명하지 않은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른바 경영적인 측면에서 조직운영이 위태로운 상태인 것이다. 신앙으로 살피면 교회는 하느님께서 몸소 세우시고 이끄시니 그 성장발전과 생멸을 따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모두 각자 맡겨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현실 조직체로서의 교회 운영은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과는 또 다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와 집행구조가 있어야 하고 모든 일에 권한과 책임의 소재가 명확해야 한다.

우선 의회와 상임위와 각종 연수와 워크숍으로 모일 때마다 현안 토의와 병행하여 한국성공회의 목적과 목표에 관하여 확인이 필요하다. 교회의 사명 실현을 위하여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성공회 교단은 어떤 목적을 가지는가? 선교현장의 시공간 조건 속에서 분명하게 구체화된 목표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목표달성을 위한 각 지체들의 실천을 어떻게 끌어낼 것이며 그 일이 목표에 맞게 수행되고 있는 지 점검하고 평가할 기준은 무엇인가? 목적과 목표와 실행방도와 점검기준 등을 늘 살피고 세우고 고치고 공유해야 한다.

교회다움은 신앙의 명분을 선명하게 내세우는 것으로 다 되지는 않는다. 우선 교회공동체가 운영되는 기준이 합리적 수준 이상이어야 한다. 나아가 진정한 상호존중, 상호배려, 상호책임의 소통으로 최선의 식별과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즉 교회의 갈등해결의 방식과 능력이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세상 물정을 모른 채 이상적 계획만 내고 결국 현실성이 뒤떨어져 사업을 지속할 수 없다면 이는 자랑이 아니라 허무맹랑한 일이 된다. 교회는 주님의 당부대로 비둘기처럼 양순하되,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마태10:16) 집짓기를 시작하기 전에 완공할 능력을 셈해봐야 하고, 전쟁을 치르기 전에 승산을 따져보아야 한다.(루가14:28이하)

발생한 사태의 본질을 교회가 파악하고 수습해 가려면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신앙의 관점과 공동체 신학의 관점, 그리고 조직 경영이라는 각각의 관점을 뒤섞지 말아야 한다. 각 관점을 구분해서 합리적인 논의와 결정을 해가야 한다. 의혹을 토대로 한 비난, 심정적인 공감과 동정, 예언자적 명분을 앞세우는 비판,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는 태도가 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두 잠깐씩 멈추어야 한다. 그 어떤 판단과 결정이라도 대한성공회가 이 땅에서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 데에 어떻게 유익을 끼치겠는가를 깊이 살펴야 한다. 우리가 공유한 목적과 목표와 기준에 비추어 서로를 배려하며 대화하고 최선의 결과를 생각하며 판단해가야 한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2017년 서울교구장 사순절 사목서신

성공회의 전통과 신앙을 회복하는 사순 절기를 지냅시다.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 이마가 아니라 가슴에 재를 부으며 여러분의 주교 김근상 바우로가 문안드립니다.

이제 사순절 신앙여정을 시작합니다. 이 여정은 한마디로 하느님께 깊이 돌아가는 길입니다. 완벽해져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돌아가는 둘째 아들처럼 감히 아버지라 부를 자격도 없으나 일꾼으로라도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 진정한 회심과 겸허가 더 아름답습니다. 사순절은 이런 돌이킴과 자기를 비움으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거룩한 절기입니다.

제자들과 세례 받은 이들이 경험한 부활은 갑자기 얻은 행운의 기회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두려움으로 헤아리면서, 예수님을 따라 걸을 때라야 누리는 은총입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듯한 실패와 고통과 죽음을 맛보면서도 하느님의 선하심을 신뢰하는 일은 고통스런 몸부림입니다. 초라하게 쓰러진 육신 위에 하느님께서 강한 손으로 붙드시고 일으켜 높여주시는 영광이 부활의 체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못 자국, 창 자국의 상처가 선명한 몸으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사랑하는 성공회 공동체의 모든 형제자매 여러분,
지난해부터 우리 교회에 몇 가지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자랑스럽게 운영해왔던 사회선교기관 중에 성직자가 책임자로 일하는 한 곳이 그만 말씀드리기도 민망한 과오를 노조와 정부로부터 지적받았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선교적 열정이 안으로 쌓인 무지와 허욕을 은폐한 탓입니다. 이에 따라서 도덕적 책임은 물론 재정적으로도 교구가 상당히 큰 액수의 부담을 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공회빌딩을 임대 관리하는 과정에서도 기대 수익에 못 미치는 이유가 교구장의 관리 책임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사목을 통할하는 교구장으로서 하느님과 교회 앞에 부끄럽고 송구한 사죄의 마음을 올립니다. 시말과 경과를 살피는 일과는 다른 차원에서, 교회의 일치와 치리에 관해 모든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로서 한없는 사목적 책임을 통감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성직자, 수도자 여러분이 성찬례의 기도 시간마다 주교인 저를 위해 드려주신 기도를 기억하며, 저의 나약하고 부족한 교구 사목을 주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자비를 구합니다. 교구장 주교로서 보내는 이 마지막 사순절기는 참으로 제 작은 명예와 자긍심마저 갈가리 찢으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되도록 빨리 교회의 선교 의지와 역량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저는 지난 1월 피선주교님께 교구의 실질 행정과 치리의 권한을 일체 위임하였습니다. 지난 2월 14일, 피선주교, 성직자원 의장, 평신도원 의장과 함께 사안의 중대성을 공유하고 모든 이후의 일정을 피선 주교님 중심으로 해결하기로 한 바 있습니다. 저로서는 새로운 희망으로 도약을 시작할 새 피선 주교와 교회공동체에 이러한 아픈 현실을 해결하지 못하고 넘겨드리며 퇴임을 하게 되는 일이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고통을 줄여가는 일에 매진할 것입니다. 새 피선주교의 너그럽고 따뜻한 신앙과 합리적이고 사려 깊은 일 처리에 교회가 미래를 맡기며 큰 기대를 걸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가능하면 제가 빨리 사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받아들여서 새 주교님의 성품과 교구장 승좌식을 오는 4월 25일에 함께 봉헌하여 제 사임시기도 앞당기기로 하였습니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교우, 성직자, 수도자, 믿음의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 전체 안에서 우리 신앙 전통에서 나오는 더 깊은 식별과 선교의 의
지를 최대한 모으고 살려야 할 때입니다.

교구장 주교로서 제 직무와 역할은 그동안 많은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저의 퇴임과 함께 혁신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그동안 성직자와 교우들 모두 지역 교회와 현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선교와 사목을 해오셨습니다. 교구장인 저는 최대한 그 자율적 책임을 존중하고 지원하는 일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성직자의 복지를 위해 안정된 재원을 마련하기 원했습니다. 성직자 재교육을 통해 사목자로서의 권위와 신뢰를 회복하고, 평신도께도 신자 양육을 통해서 적극적인 지도력을 기대했습니다. 나름의 결실도 있지만, 이 모든 일을 감당하기에 저 자신과 교구의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명분으로 옳다고 해서 다 교회공동체에 유익하지는 않습니다. 저 자신이 더욱 깊은 식별과 결단으로 이런 일들을 훌륭히 완결 짓지 못한 점이 참으로 뼈아픕니다. 새 교구장께서 무거운 짐을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그 짐을 나누시고 힘을 더해 주시어 더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에 매진해 주시기를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성직자 여러분, 교회의 선교를 위해 교회 전통이 마련한 성직의 질서를 바로 세워주십시오. 이번 사안에 관한 한 교구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료 성직자의 우려와 충정 또한 모르는 바 아닙니다. 하지만 주교의 치리가 불안하다 해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성공회가 가지는 지향과는 많이 다릅니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주교직은 일치의 상징이며, 선교를 위한 의지와 실천의 기둥입니다. 주교 개인이 아니라, 주교직의 권위가 흔들리면 우리의 선교는 더 험난해질 선교 현장의 어려움을 뚫고 갈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일수록 동료 성직자 여러분들은 더 많은 기도와 조력으로, 주교의 직분을 완성 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성직자에게 사목에 관한 한, 맡긴 사역에 관한 한, 거의 모든 일들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위임한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해 죄송합니다만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한두 분의 일탈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욕을 먹는 것은 신앙공동체의 숙명과도 같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성직자를 믿어 주십시오. 그 믿음이 교회의 바탕이 됩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바로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열심히 조력자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교의 권위를 위임받아 가르치고 이끄는 성직자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세워주십시오. 성직자가 이끄는 기도와 신앙 교육 안에서 세상의 가치와 마음은 불살라 버리시고, 교우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익히고 갖춘 여러분의 전문성을 기쁘게 교회와 선교를 위해 봉헌해주십시오.

사순 절기를 지나 부활의 기쁨을 누리는 때에 저는 이제 교구장 주교로서 물러나게 됩니다. 주님과 교우 여러분의 사랑에 한없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보상이나 명예를 위해 주교직을 감당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포부와 기대가 컸기에 아쉬움과 서운함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 제 공과를 맡겨드리고 교우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를 가슴에 깊이 안고 떠나려 합니다.

성공회 안에서 오랫동안 믿음 생활을 함께 한 모든 가족 여러분! 우리 교회는, 우리 성공회는 오늘의 흔들림을 능히 이기고 복음의 기초 위에 다시 든든히 세워져야 합니다. 좌절과 체념을 넘어서 새로운 도전과 열정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겨내고 부활의 영광으로 빛나야 합니다. 성령께서 성직자와 평신도 여러분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공회의 형제자매 여러분,
광야에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의 식별이 곧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베드로의 만류를 꾸짖으시고 고난의 길을 걸으신 주님의 용기가 우리 교회의 신앙입니다. 게쎄마니에서 땀을 핏방울처럼 흘리며 바치신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입니다. 이제 사순절을 시작하며, 우리 부끄러움을 하나도 덜어내지 않고 그대로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친히 치료해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실 줄 믿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철저하게 자신을 종으로 내려놓으신 겸손의 은총 안에서 사순절기의 여정을 시작하는 교우 여러분의 믿음이 우리 성공회를 되살리는 부활의 축복으로, 새 주교의 풍성한 사랑으로 가득차기를 기원하며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2017년 3월 1일 재의 수요일에

서울교구장 주교 김근상 바우로 드림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2017년 2월 25일자 성공회신문 제887호 사설

 

                      올바른 식별을 훈련하는 사순절기

 

“인생아, 기억하라.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재의 수요일에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며 이 말씀을 되새긴다. 사순절기 40일은 부활절을 맞기 위한 준비기간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 시신에 일어난 기적 자체가 아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 참여하여 우리도 주님과 누리는 영원한 생명이 부활의 본질이다. 그리스도교의 구원을 개인의 소원성취나 사후복락으로 좁히는 일은 온당치 않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참된 삶이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생리적 죽음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는 일이다.

 

 

우리는 티끌 같다. 연약하고 모자라고 이기적이다. 남한테 저를 내세울 만한 존재가 아니다. 남보다 낫다는 소리를 듣고 세상이 우러르는 지위를 가지려면, 세상의 가치와 논리와 방식을 따라 세상의 힘에 기대야 한다. 이 유혹에 빠져 사는 삶이 곧 사탄과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힌 상태다. 마귀와 세속과 정욕에 붙잡히면, 필요를 넘는 욕망을 채우는 일을 행복으로 잘못 알고, 남을 해치고 빼앗아서라도 나를 지키고 채우는 일을 성공이라 착각하게 된다. 살아서 괴롭고, 죽어서 허망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이런 죽음의 권세를 벗어나서 생명의 길을 가라는 초대이다. 티끌 같은 존재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하느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라는 당부이다. 이것이 복음이 말하는 회개이다. 인간은 은총에 기대어, 은총 안에서, 이웃과 모든 피조물과 감사하며 더불어 살아야 한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은총을 깨닫고 누리고 전하며 산다.

 

교회는 저마다 자신을 비워서 함께 은총을 누리는 공동체다. 올바른 관계를 위해 벽을 허물고 자신을 비워 남을 들이는 일이 생명의 길이다.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고, 함께 나누는 고통을 통하여 영광에 이르는, 생명의 길을 함께 걷는 일이 교회공동체의 존재이유다.

 

최근 우리 교회가 어지럽다. 주교와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참회와 반성을 요청하는 소리가 높다. 교회의 참회와 반성은 개인적인 후회나 사과를 훨씬 넘어선다. 우리 교회가 어떤 가치와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를 총체적으로 살피는 일이다. 이는 결국 신앙의 식별 문제다. 교회에 충성을 다하는 독실한 신자나 직분을 맡은 책임자도 때로 세속의 논리와 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세상의 유혹과 박해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일에 조심하고 신중하며, 늘 깊은 식별을 필요로 한다. 신앙의 식별은 높은 자리나 많은 권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서품이나 입교 순서도, 다수결 원칙에 따라 지지를 얻은 견해라 해도, 그것 자체로는 식별의 권위일 수 없다. 교회는 성경과 전통과 이성에 근거하여 서로 존중하며 대화하고 기도하고 합의한 내용이 최선의 식별이라는 사실을 증언해왔다.

 

 

사순절기 동안 참회와 극기와 절제와 자선을 행하는 일은 단지 개인의 덕행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세속적 가치와 논리의 속임수를 더 잘 알아채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지 않고 올바른 관계를 세우려고 식별력을 훈련하는 과정이다. ‘그대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말씀과 ‘너희는 내 사랑하는 자녀들이다’라는 말씀 사이에 사순절 40일 신앙의 길이 열려있다. 자비와 은총에 힘입어 이 신앙 여정의 끝에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함께 누리며 진정 쇄신하는 교회공동체가 되자.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7년 1월 21일자 성공회신문 885호 사설

 

                  성공회 사목을 위한 성공회 신학을 공유하자

 

2017년 대한성공회 전국 성직자 신학연수가 2월 1일(수)부터 3일(금)까지 서울주교좌교회에서 진행된다. “종교개혁 500주년, 재해석을 통한 성찰과 전망”이 주제다.


이번 기회에 성공회의 정체성에 관하여 더욱 더 깊어진 이해가 공유되기를 기대한다. 세계성공회는 잉글랜드 교회개혁의 경험을 공유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개신교의 일파로 좁혀 보지는 않는다. 성공회는 서방교회의 유구한 전통을 지켜가는 입장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반영했다. 동방교회의 신학도 배우며, 과학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고, 각 지역에 알맞은 교회가 되기 위해 애쓰며 발전해왔다. 따라서 성공회는 신교냐 구교냐를 묻는 프레임을 넘어선다. 전례적이면서 복음적이고, 선교적이면서 사목적인 교회인 것이다.

 

대한성공회의 신학연수는 이러한 성공회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성공회의 사목을 위한 내용이 주가 되어야 한다. 개신교계에서 종종 이루어지는 ‘목회성공을 위한 세미나’ 류와는 성격이 다르다. 단순히 최신 정보, 유용한 프로그램을 소개받는 일에 머물 수 없다. 마땅하고 옳은 명분을 확인하거나, 서로 위로하고 덕담을 주고받는 일도 본질이 아니다. 성공회는  개별 교회가 독자적인 메시지를 전하며 사목할 수 있는 개신교회와는 정체(政體)와 직제(職制)가 다르다. 성공회는 주교제 교회로서 교구가 교회의 단위이다. 한국성공회는 세 교구가 한 관구로서 연합하여 일치를 지향한다. 성공회의 전통을 따라 이 땅에서 이 시대의 선교와 사목을 맡은 한국 성공회의 주체성을 깊이 고려하는 신학연수가 되길 바란다. 정체성은 밖에서 주어지는 규정과 평가에도 일부 영향을 받지만, 그 주체가 어떤 목적, 목표, 지향으로 선교와 사목을 하는가 하는 고민을 통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된다. 한국 성공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신앙과 교리의 문제, 행정과 제도의 과제를 살피는 일에는 성공회 성직자, 성공회 신학자들의 충정어린 연구와 발표가 중요하고 유용할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애초부터 교회공동체가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에 관한 고백이다. 이 고백은 개인적으로 체득하여 홀로 수행하는 내면의 어떤 경지 따위가 아니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여 교회공동체의 고백에 참여하게 하고, 더욱 깊이 이해하고 경험하고 확산시키려고 하는 증언(證言)이다. 이번 신학연수에서 주제를 발표하는 이들은 성공회의 선교와 사목을 위해서, 성공회의 성직자를 설득하여 변화시키려는 의도가 분명해야 한다. 참여하여 듣는 성직자들도 마음을 열고서 기꺼이 설득되고 변화하려는 태도가 있어야 한다.  변화의 의도와 의지가 진정하지 않으면, 참된 소통이 어렵고, 결국은 가르침과 배움이 불가능하게 된다.

 

지극히 타당한 내용이어도, 성공회 사목을 맡은 성직자의 생각과 실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는 책자나 인터넷 등 다른 통로로 주고받는 편이 효율적이다. 전국의 성직자가 함께 모이는 신학연수는 성공회 사목현장에서 생겨나는 과제와 물음을 함께 나누는 자리여야 한다. 성공회의 정체성을 선교와 사목의 관점에서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마당이어야 한다. 신학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성직자들의 눈빛과 가슴에 성공회 사목의 비전과 열기가 뜨겁게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6년 11월 12일자 성공회신문 사설

 

선교정책을 생산하는 의회

 

오는 11월 26일(토)에 서울교구는 제52차, 대전교구는 제65차 교구의회를 소집한다. 부산교구는 11월 25일(금)~ 26일(토)에 제46차 교구의회를 연다. 교구의회의 본연의 역할을 살피기 위해서 성공회의 정체(政體)와 의사결정과 집행의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 교구는 교구장주교가 다스리는 하나의 독립된 선교조직으로서 교구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구의 운영에 관한 제반문제를 처리한다.(헌장 제56조) 주교제를 근간으로 삼은 성공회가 이해하는 교회의 단위는 교구(敎區)다. 교구장주교는 교구를 대표하고, 통할(統轄)한다. 다만, 천주교와 정교회와는 달리 대의제(代議制)인 의회제도를 통하여 주교의 직무를 제한하는 동시에 보완하고 있다. 교회공동체의 의사결정이 주교원, 성직자원, 평신도원의 합의로 이루어진다. 대한성공회는 교구장이 교구 사목을 통할하되, 교구의 운영은 교구의회의 결정에 따라 교구의 사무관리를 통해 집행되는 것이다.

헌장 제11조는 교구장주교의 직무를 6개 항으로 열거한다. 1. 교구를 대표하며 교구의 사목을 통할한다. 2. 교회의 신앙과 사도적인 교훈 및 공교적인 진리를 수호한다. 3. 교구에 적용되는 모든 법규와 규정을 공포한다. 4. 교구내 성당축성 및 견진성사와 신품성사를 베푼다.(이하 생략) 이 교구장주교 직무가운데 2항 이하의 내용은 자명하고 분명하다. 그런데 1항의 직무는 ‘교구의 사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내용이 채워진다. 제30차 전국의회 선교선언문에서 선교적 상황의 어려움을 적시했거니와, 이를 극복하려면, 교구장주교의 사목은 ‘관리지향’에서 ‘선교지향’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해야 한다.

헌장 제60조는 교구의회의 기능을 11개 항으로 열거하고 있다. 1. 교구의 선교 정책 심의 의결 2. 교구법규의 제정과 개정 3. 교구 사업 및 결산보고 접수, 사업계획 및 예산 승인 4. 교구 내외에 파송할 교구대표 및 임원 선임 5. 각 교회, 교구 소속 기관 및 단체의 보고 접수 6. 소속기관의 사업보고, 계획 및 예결산 승인 7. 교구장 주교 후보 및 보좌주교 후보 선출 (이하 생략) 이 가운데 2항 이하는 통상적이고 절차적인 내용에 가깝다. 교구의회는 2항 이하의 내용을 의안으로 처리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런데 정작 1항의 선교정책을 심의 의결하는 일에는 얼마나 시간과 공력을 들이는가를 짚어볼 일이다. 3항의 ‘교구 사업 및 결산보고 접수, 사업계획 및 예산 승인’과 1항의 ‘선교 정책 심의 의결’은 구별되어야 한다.  선교 정책을 심의하고 의결하는 일(1항)과 그 의결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교구 사업 계획과 예산을 통하여 실행이 되고, 그 실행 결과가 보고되는 일(3항)이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야 한다. 선교정책 입안을 교구의 사무관리에 위임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교구의회가 선교정책의 주체가 되어, 상설화된 논의구조를 통해서 적극 의안을 마련하고, 신학적 소통을 통해서 심의하고 그 실행까지를 점검해야 한다.

교구의회를 앞두고 “기도를 통해서 올바른 의사결정을 하자”는 다짐은 마땅하고 소중하다. 이 때 기도가 저마다 속내를 감추는 침묵의 카르텔로 오인되면 곤란하다. 기도는 하느님의 은총을 구하며 서로 정직하게 드러내고 함께 진지하게 풀어내는 공동식별의 과정이다. 교구의회를 통해서 교회의 발전을 위한 선교정책이 참된 기도를 통해 깊이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2016년 10월 29일자 제879호 사설

 

'인구 절벽'과 '신자 절벽'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전망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과 대안이 가능하다. 인구학(人口學)의 관점에서, ‘저출산 고령화’로 인해 소비와 생산의 흐름이 급격히 정체되며 생기는 사회경제적 위기를 ‘인구 절벽’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현상이 이미 심각하고, 쉽게 돌이키기 어려운 현실이므로, 잘 살펴 적절한 선택을 하는 일이 그나마 최선이라는 것이, 『정해진 미래』라는 책의 주장이다. 

우리 성공회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선교 126주년의 역사는 첫 한국인 주교의 설교집 제목인 '한국땅의 십자가', '정의의 십자가', '평화의 십자가', '통일의 십자가'가 상징하는 바, 이 땅의 참된 교회가 되려는 노력이었다. 경제개발과 민주화의 요구에 부응했고, 한국 관구로서 독립한 이후 많은 성직자를 길러내며, 성공회대학교를 발전시키고, 나눔의 집을 시작으로 사회선교를 펼쳐왔다. 교회를 여럿 개척하고, 교단 내에 복음주의 운동과 영성운동을 열고, 이제는  평신도사역자 양성과 여성선교, 해외선교에까지 힘을 미치게 되었다.

갖은 노력으로 이룬 결실도 적지 않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하느님의 선교에 신실하게 참여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족주의와 국교회적인 전통에 갇힌 한계를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사회참여와 사회선교를 통해서 젊은 세대의 기대를 받고 있지만, 한편 신앙의 열정과 분명한 고백이 약하다는 평도 있다. 적은 교세로도 한국사회와 교회에 큰 영향력을 가진 모범적 교회이지만, 선한 뜻을 펼치기에 힘이 부치는 것도 사실이다. 장점과 강점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려가고, 단점과 약점은 겸손하게 인정하고 보완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는 일은 어떨까? 현재로선 답이 없다. 10년, 20년, 나아가 30년, 50년 후에 우리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교회의 미래에 관한 진지한  염려와 대안의 모색은 현재 정리된 문서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까지 성직자와 신자가 최선을 다해 사목과 선교를 해왔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음에도 현재 신자 구성이 노년층이 많고 청년과 청소년층이 적은 불균형 상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년층이 많이 전도되거나 유입된 때문이 아니다. 청장년 시기에 교회를 세워 지켜온 이들이 그대로 노령화하고, 새로이 교회에 참여하는 젊은 세대는 적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우리 교회도 사회의 '인구 절벽'과 마찬가지로 ‘신자 절벽’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전례와 선교를 위해 봉사할 인력과 재원이 부족하여 활력을 잃게 되고, 현상유지 수준의 관리에 머물다 쇠퇴할 위험이 크다. 

현재 각 교구별로 다양하게 선교의 영역을 넓히며, 선교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선교를 위한 성직자 인사와 재정 관리’에 관해서도 논의에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그러한 노력과 논의의 진정성과 적실성은 ‘성공회의 교인이 더 늘어나고 더 젊어질 가능성’을 어떻게 고려하는가로 알 수 있다. 기존의 교회와 교우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수준으로는 새로운 세대를 얻어 교회의 미래를 이어가기가 어렵다. 교회신앙의 신학적 정리, 전례의 일치와 개혁, 목회적 돌봄의 강화, 성직자와 신자사역자 양성 등 우리의 모든 노력은 ‘교회 밖에서 새로운 세대를 얻어서 성공회 신자로 양육한다’는 목적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제87420168월 13일자 사설 

 

 

불신(不信)의 냉소에서 신뢰(信賴)의 증언으로

 

최근 우리 교회 안에 의혹과 해명을 요구하는 주장이 어지럽다. 그동안 교회 지도자들이 책임을 바르고 투명하게 진행했느냐는 문제제기이다. 이것이 교회 전반에 관한 불신으로 번질까 염려스럽다. 물론 소수의 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속사회와 달리, 교회는 신자 개인을 개별자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인격적인 표현이라고 믿는다. 동시에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신자는 모두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제기가 진정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면, 서로 귀 기울여 대화해야 마땅하다. 서로 자신을 열어 공동 식별의 자리를 마련하고 대안을 세우는 일이 교회가 일하는 방식이다.

 

다만, 모든 지체를 동등한 인격으로 존중하는 원칙과 저마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며 다투는 무질서는 구분해야 한다. 교회는 질서의 공동체다. 비판의 목적은 비판 자체가 아니라 공동체의 진정한 일치다. 예수님을 머리로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공동체가 신앙의 질서를 잃으면 아프고 상한 몸이 되어 제 역할을 하기 어렵다. 성공회 치리구조의 질서는 주교직의 지도력과 민주적 의회제의 바른 합일로만 유지할 수 있다. 어떤 일이든 토론과 절차를 지켜 처리하고, 충분한 대화와 설득의 과정을 거치며, 마지막에 신앙의 권위에 순종할 때, 교회는 교회답게 바로 서며 참된 권위를 지키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교회 지도자의 경청과 더불어, 합리적이고 근거 있는 비판으로 이뤄져야 한다. 교회 지도자의 책임은 더욱 막중하므로, 작은 문제제기와 비판에 대해서도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경청해야 한다. 섣부른 상호공방은 상호불신만 깊게 한다. 지위에 따른 책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분명히 하여 대화할 때, 상대방을 이해하며 생산적인 논의를 해나갈 수 있다. 각자 자기주장과 입장을 정당화하려는 태도는 소모적이며, 갈등과 충돌로 이어진다. 그리되면 교회는 위선과 정죄의 수렁에 빠지고 냉소하거나 무력감에 시달리게 된다. 주님의 은총과 소명을 따라서 함께 같은 방향을 지향한다는 신뢰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회의 사목과 선교에서 드러난 크고 작은 문제점은 우리 교세가 작고 선교역량이 충분하지 않은 탓이 크다. 작은 규모에서 몸에 익은 관습적인 의사결정과 운영의 관행을 이제는 크게 확장된 현실에 맞게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개별 사안의 문제를 바로 잡는 일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구조적인 한계는 물론 구성원들의 관습적 인식과 행동에까지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토마 이야기(요한 17)는 진정한 의심이 공동체의 독초가 아니라, 진실한 고백과 실천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토마는 부활 사건이 믿거나 말거나식의 유언비어(流言蜚語) 수준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보아야겠다는 의심은 진실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네 손을 내 상처난 손과 옆구리에 넣어 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분명히 밝혀 주셨다. 토마의 응답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는 고백이었으며, 기꺼운 선교와 순교의 결단으로 이어졌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을 이루어, 하느님의 일, 주님의 남은 고난을 채우는 공동체가 교회다(골로1:24). 용기를 내어, 우리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선교하면서 못 박히고 찔린 상처가 어디에 어떻게 드러나며, 상처의 본질이 무엇이지 함께 정직하게 확인하자. 상처가 전혀 없다면 오히려 우리 안위만 생각했는지 돌아볼 일이다. 그 상처를 확인했다면, 함께 그 아픔을 나누며, 그동안 겪은 수고와 고통에 서로 감사하는 신뢰를 세우자. 서로 깊이 존경하고 격려하고 사랑하면서, 더 힘을 내어 선교와 순교의 길을 기쁘게 걸어가자.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제868호 2016년 5월 14일자 사설]

성공회 신앙을 이어가는 가정 공동체

건강한 가정은 건전한 사회와 교회의 기초다. 5월을 가정의 달로 지키고, 가정주일을 기념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급격히 변화하는 사회문화는 가정생활 안팎에 큰 영향을 미친다. 유교 전통이 강조한 효의 의미는 많이 퇴색했다. 핵가족화를 지나 이혼과 비혼(非婚)이 흔하며, 한부모가정이 늘고 있다. 세대 간에 깊어지는 단절과 갈등은 가족의 유대를 위협한다. 청년세대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라고 자조하는 가운데, 노인인구가 전체 인구 20% 이상이 되는 초고령사회로 진입중이다. 늘어나는 아동학대 뉴스는 이기적이고 냉혹해진 우리 문화와 생활고의 단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자녀사랑과 부모공경을 외치는 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모세대는 사회의 변화, 생각의 다양성을 더욱 너그럽게 수용하고, 자녀세대는 부모세대의 노고와 땀이 만든 역사를 이해하는 자리를 가정과 교회에 마련해야 한다. 서로 이해하는 태도를 훈련하고 대화하는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가정을 새로운 신앙공동체로 쇄신해야 한다.

한국성공회는 이른바 ‘가족교회’(패밀리 처치)의 특성이 있다. 가정과 가문으로 신앙을 대물림하는 일이 교회를 유지하는 큰 힘이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를 잇는 신앙이 이제 쉽지 않다. 농촌교회는 젊은 세대가 떠나 노령화되었다. 도시에도 지역에 근거한 본교회[전도구] 대신, 장거리를 이동하여 명분과 친분으로 모이는 교회가 많아졌다. 교회학교는 위축되고, 자녀들과 동반한 교회생활이 어려워졌다. 자녀의 입시경쟁을 염려하여 집에서 가까운 아무 교회에나 출석하거나 신앙생활을 잠시 멈추라고 권유하고, 부모세대는 관습과 친목 중심의 신앙생활에 만족한다. 이런 생활로는 자녀세대에게 신앙의 동기를 주기 어렵다.

“부모를 공경하라”(출애20:12)는 제5계명은 부모를 잘 봉양하라는 뜻보다 훨씬 깊다. 이는  부모세대의 신앙을 잘 물려받으라는 요청이다. 돌보고 섬기는 수준의 부모봉양은 이미 사회복지가 담당하게 되었다. 이제 가정의 의미를 전통의 혈연공동체를 넘어 ‘신앙을 세우고 이어가는 공동체’로 새롭게 바꿔야 한다. 세상의 기준을 따라서 자신의 편의와  주장만 내세우면 가정공동체는 건강하게 유지되기 어렵다. 오히려 닫힌 관계 속에서 더 심각한 갈등과 불화의 장으로 변질되기 쉽다. 가정은 공동의 신앙생활을 기준으로 삼아서 서로 보살피는 공동체일 때 진정 화목하다. 가족이 서로 교회 신앙의 경험에 초대하고 대화하면서 가정생활의 공통점을 마련하면 갈등 조정 효과도 높아진다.

‘자녀에게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부모의 생각은 일견 합리적이고 관용적으로 들린다. ‘어느 교회를 나가더라도 다같은 하느님을 믿는 일이라’는 이해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전통일 뿐, 교파교회인 한국성공회로서는 안이한 태도요 엉뚱한 변명이다. 교회가 하느님나라를 위해 세워진 생명의 공동체임을 믿는다면, 교회를 사랑하고 존중하고 헌신하는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은 복되고 복된 일이다. 성공회가 자유로운 헌신으로 참된 삶을 이끄는 ‘지상최선의 교회’임을 확신한다면, 성공회 신앙을 가족이 함께 하는 일은 그 어떤 상속보다 귀하다. 성공회 전통 안에서 신앙을 이어 “복을 받고 땅에서 오래 살리라”(에페6:3)는 은총을 풍성히 누리는 교회와 가정이 되길 기대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제865(2016327) 사설]

부활 - 일으켜지신 주님, 일으켜지는 교회

부활의 기쁨과 능력,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신비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 교회는 부활의 의미를 세상과 어떻게 나누고 있을까? 단순히 예수님 시신이 살아난 일이라고 주장하면 세상 사람들은 부활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수준의 설명으로는 신자들마저도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 말로는 부활을 중시하고 축하하더라도, 실제 마음과 삶은 부활의 기쁨과 능력에서 멀어지고 만다.

부활(復活)의 의미는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 이해해야 한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십자가에서 못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일이라는 풀이는 일반인의 통념일 뿐 그리스도교의 부활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부활로 번역된 그리이스어 아나스타시스’ (ἀνστασις)죽음에서 일으켜짐, 일어남, 올림이라는 뜻이다. 라틴어에 어원을 둔 영어 레저렉션’(resurrection)다시 일어나다, 일으켜지다는 뜻이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스스로 되살아나셔서 신의 아들임을 입증한 일이 아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신 사건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자연사가 아니라, 세상 죽음의 권세가 참사람을 살해한 죽임이다. 동시에, 그 죽임을 피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한 희생과 사랑을 위해 받아들인 죽음이기도 하다. 부활신앙은 그 희생과 사랑으로 죽임과 죽음에서 일으켜지셔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을 깨닫고 우리도 죽음에서 일으켜진 생명의 삶을 사는 일이다.

시체의 소생을 사실로 확신하는 일을 부활신앙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교회공동체 안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보고 체험하는 일이 진정한 부활신앙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한 11:25-26).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는 죽더라도 사는 차원을 드러내야 하고, “영원히 죽지 않는수준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교회는 부활의 교리를 관습적으로 믿는 이들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는 죽임과 죽음을 뚫고 일으켜진 예수님께서 절망 속에 흩어진 제자들을 몸소 일으키시어 당신의 몸으로 삼으신 공동체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주님으로 모신다. 이것이 성찬례의 의미다. 교회는 세상구원을 위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하느님나라의 일을 이어간다. 이것이 선교의 의미다.

참된 부활신앙을 누리려면 우리 교회가 세상에 하느님나라를 전하려 어떤 십자가를 짊어졌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신자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기 위해세상에서 무엇을 실천하며 희생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세상의 칭찬을 받는 성공이 아니라 세상의 박해를 받는 실패와 죽음이 하느님께서 일으켜주시는 참된 부활의 조건이다. 주님 부활의 영광을 기뻐하고 찬양하며, 죽음에서 일으켜지신 주님과 하나되어, 죽음의 권세를 누르고 일으켜지는 성교회와 교우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853호 사설] 

신앙의 예법(禮法)을 마련하자 

대한성공회 선교 125주년 기념에 분주한 9월말, 우리는 한국인 순교자들 축일, 추석 명절, 성미카엘과 모든 천사 축일과 더불어 대한성공회 창립 기념일을 맞는다. 이 축일들은 우리 생명과 신앙의 선조들의 보여준 삶의 태도를 기억하여 오늘 우리 삶에 되살리려는 깊은 뜻을 지닌다. 사람과 공동체에 대한 예()를 중요시한 우리 문화가 예배와 전례로 신앙을 훈련하는 그리스도교 전통과 만나는 지점이다. 이 점에서 예()와 예배로 수행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을 향한 선교의 핵심이다.

우리 교회 현실을 보자. 성공회 신자와 신자, 성직자와 성직자, 성직자와 신자가 서로 만나면 어떻게 인사하는가? 어떤 말과 태도로 상대방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가? 신자든 성직자든 나이나 서품 연수에 따라 스스로 윗사람이 되어 반말과 하대를 하지는 않는가? 교회에서 서로 부르는 호칭은 무엇이 좋을까? 세상 사람들이 성공회 사람들의 언행에서 성공회 사람임을 알아보는 표지는 무엇일까? 이런 일을 단지 친밀감 표현, 교양, 상식의 문제로 좁힐 수도 있으나 전례와 성사를 중시하는 교회는 이 문제를 신앙의 예법(禮法)”이라는 관점으로 살펴야 한다. 세상을 향한 선교의 품격은 신앙인의 삶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선교와 예법의 관계는 긴밀하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이웃을 형제자매로 깨닫고 사는 일에는 그에 알맞는 예법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가 전례를 중시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표하는 예의가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하고, 그 예의에 바탕을 두어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온 마음과 행동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 한가지로 통한다.

세상의 예법은 각자 자기중심의 태도로 남이 가진 힘과 지위를 계산하며 대처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복음의 예법은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한 이들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성직자들 사이의 상호존중에서 서품서열이 기준이 될까? 신자들 사이의 상호배려에서 나이, 입교연수(年數), 사회적 지위, 능력 등이 기준이 될까? 복음의 성찰과 신앙의 예법이 없으면 이런 물음에 세상의 관습을 반성 없이 적용시켜 오해와 착각을 낳는다.

우리가 성찬례에서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곧 일상에서 교우들이 서로 만나고, 또 세상에서 낯선 사람과 만날 때 나누는 인사가 되어야 한다. 일상의 삶에서 복음의 예법을 실천하는 일은 주님의 선교명령이다. 선교는 하느님을 믿으라는 선전이 아니다. 실제로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새로운 예법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이다.

전례의 정수인 성찬례의 성찬기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한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라!” 이 때 이 예를 행하라는 말씀은 이것을 행하라(Do this!), 이 일을 행하라"는 뜻을 좁혀 번역한 것이다. 제자들에게 성전 안의 제의로서만 아니라 이 세상의 먹고 마시는, 곧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뜻을 드러내어 기억하라고 당부하시는 말씀이다.

교회는 전례의 법이 삶의 예법으로 잘 연결되도록 살피고 다듬어야 한다. 관구와 교구의 전례위원회에서 하루 빨리 성공회 예법을 연구하여 정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신념을 내세우는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하고 실천하는 믿음이 중요하다.(갈라 5:6 참조) 성공회의 여러 훌륭한 전통과 지향이 명분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 신자와 성직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몸으로 익히고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전례와 선교에 명실상부한 성공회가 되려면 성공회의 예법 마련은 절실한 과제이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852호 사설]

 

                “자연, 사람, 하느님과의 화해” - 성공회의 사명

 

  대한성공회는 선교 125주년, 한인사제서품 100주년, 한인주교성품 50주년,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이 여러 숫자들은 이 땅에서 여러 세대를 이어온 한국성공회의 선교 노력을 상징한다. 이 땅을 구원하시려 하느님께서 몸소 성교회를 세우시고 돌보며 이끌어 오셨고, “하느님의 선교에 우리 교회는 최선을 다해 참여하며 응답해왔다는 고백이다. 그 선교 노력을 우리는 자연, 사람, 하느님과의 화해로 정리하며, 우리와 다음 세대가 이어갈 선교의 소망으로 삼는다.

성경에서 자연은 단순한 물질세계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기에 영적인 존재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로께서는 로마의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고 적었다. 성공회가 이해하는 하느님의 구원은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일들인 바, 그 시작이 바로 하느님의 창조이다.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에 세상 모든 피조물이 그 창조의 은총과 질서를 더불어 잃어버리게 되었다. 자연을 물질로만 여겨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만 여긴 인간 탓에, 창조주 하느님의 뜻과 달리, 자연은 짓눌리고 신음해왔다.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갈망하며 진통하는 자연은 그리스도인의 회심과 봉헌을 통해서 본래 하느님께서 지으신 하느님의 소유로 회복된다. 본래의 창조질서를 드러내며, 그 창조질서 안에서만 인간은 실제로 아름답고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께는 먼 곳이 없다!”고 고백했던 선교사들에게 머나먼 동방의 조선 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귀한 세상의 일부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할 귀한 터전이었다. 복음을 통해서 이 땅은 새로운 빛을 받았다. 새로운 창조의 첫걸음, 본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걸음을 내딛었다. 일제의 강압을 견디면서 오히려 더 큰 소망을 품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빛의 회복, 해방의 기쁨에 차 있던 이 땅에 닥친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은 악마적인 분열과 불화의 상처를 깊이 남겼다. 성공회는 한국전쟁에서 순교자를 배출하며 참된 진리와 정의와 평화를 기원해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여,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참 사람의 길을 열어주셨다. 이를 믿는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화해하는 참 사람을 기르며 실천해왔다.

성공회의 예배는 자연과 화해하고, 사람과 화해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일이다. 성공회의 선교는 이 땅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분의 일에 참여하는 일이다. 성공회는 소속 신자만을 위해 종교적 서비스를 주고받는 종교단체일 수 없다. 가장 깊은 차원에서 자연과 사람과 하느님의 화해를 기도하고 실천하고 실현하는, ‘성령의 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제 103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25주년을 기념하는 감사성찬례를 드리며 새로운 선교를 시작한다. 이 땅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창조의 은총을 깨달아 살기를 기대한다. 모든 이들이 미움과 분열의 어둠을 걷고, 참된 화해와 상생을 이루어가기를 기대한다. 개별화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어리석음과 분노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녹아지기를 기원한다. 모두가 자녀가 되는 행복, 서로가 형제자매가 되는 기쁨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귀한 화해의 사명을 받은 교회의 신자로서 기쁘고 보람 있게 헌신하는 복된 삶이길 기도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신문 제850호 (2015년 8월 8일) 사설]

 

                      “거룩한 변모”의 비전으로 선교하는 교회

 

  2015년 8월 15일,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을 가려왔던 국세청 별관 철거가 완료되어 서울시민들에게 개방된다. 1937년 성공회 성당 앞에 체신청 건물이 세워질 때, 불과 8년 뒤에 일제가 끝나고 해방이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대다수 시민이 독립의 꿈을 접은 지 오래이고, 일제체제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은 꿈처럼 이루어졌고 오늘 우리는 눈부시게 발전한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다.

  오는 10월 3일, 대한성공회는 선교 125주년, 첫 한인사제서품 100년, 서울과 대전교구설립 50주년, 독립관구 23주년을 기념하는 선교대회를 연다. 지금 우리 대한성공회의 역사적 비전은 무엇일까? 이 땅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와 번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우리 교회가 감당할 선교는 무엇인가? 성공회 교단 자체의 성장과 발전은 어디까지일까?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우리끼리 자족하고 자축하며 감사함도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교회 밖 선교 전문가는 성공회를 객관화하여 진단한 결과로 우리를 경고한다. 사회의 변화에 능동적 주체적으로 호응하여 선교하는 교회가 되려면 어서 시급히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때를 놓치면 그만 노화되고 무능력한 교회로 소멸할 위험이 크다는 말이다. 10년 뒤, 30년 뒤, 50년 뒤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우리교회의 참된 비전을 어디서 어떻게 얻고 있는가?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진심을 다하여 묻고 확인할 깊은 물음이다.

  8월 6일은 <주의 변모> 축일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첫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십자가의 길”이 율법과 예언서가 가리키는 완전한 신성과 영광의 길임을 깨우쳐준다. 그래서 교회는 9월 14일 <성십자가의 날>의 40일전 8월 6일에 주님의 변모 사건을 기념한다. 눈부시게 변화된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시는 예수님 변모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선교비전이고, 예수님을 뒤따라 살아가는 우리 교회의 선교비전이기도 하다. 신앙적인 비전은 현실의 조건을 따지고 성공 가능성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하느님나라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일이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은 세상의 기준으로는 무모하고 무의미하다. 하지만 성부 하느님의 뜻을 철저히 신뢰하며 순종하기에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승리의 길이 된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느님의 구원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리라는 비전이다. 대한성공회의 선교비전이 거룩한 변모 사건처럼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연결된 래디칼(radical)한 내용이길 바란다. 현실적 변명과 합리화를 그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반드시 하는 태도가 성공회의 참된 영성이 되길 기대한다. 성공회 사명과 발전이,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께 우리를 통해 반드시 이루실 약속으로서 현실화되고 공유되길 기원한다. *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