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생명력
예전에 사목하던 성당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예순 살이 된 남편은 십여 년전에 뇌졸중이 와서 반신불수 상태였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하던 사업체를 인수하여 경영도 하고 남은 시간에 가사도 돌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하여 하루 종일 방 안에 있는 것이 남편이 유일한 일과였습니다.
그래도 한 달에 한번씩은 본교회 사제로서 봉성체를 해주러 가곤 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성체를 모시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업점과 겸하고 있던 이 집에 화재가 났습니다.
불길은 갑자기 천정과 벽을 타고 집안 전체를 태웠습니다.
가족은 모두 빠져나왔지만 장애를 가진 남편은 결국 빠져나오지 못하고 바로 질식사로
세상을 떠야했습니다.
새벽녘에 부리나케 달려갔을 때에는 집안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
부인은 빈소도 못 지키고 충격으로 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그을린 남편의 시신을 관에 안치한 다음 성수를 뿌리고 입관예절을 거행하였습니다.
부인은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며 울부짖었습니다.
진정 그분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남편과 나에게 그런 모진 시련을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부인의 손을 잡고 함께 아파하며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페인이 작가 미구엘 우나모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을 믿는다는 것
아무런 열정도
마음의 갈등도
불확실한 것도, 의심도
심지어는 좌절도 없이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신에 관한 생각을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런 아픔이 이 가정을 휩쓸고 지난다음, 부인의 신앙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전보다 더 폭넓고 깊어졌습니다.
반대로 사회 속에서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지닌 분들도 만납니다.
그분들은 결코 교회와 관련없는 삶을 살던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교회에서 열심하던 크리스천이었습니다.
바쁜 사업 활동 속에서도 철두철미 새벽기도를 지키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는 기본이려니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주일학교 아동들을 위하여
또는 교회의 각종 봉사활동을 위하여 온 몸을 희생한 분들이었습니다.
시간이 날 때면 자비로 산 전도지를 들고 거리로 나가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음날 직장에 출근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앙을 버리고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성찰과 함께 가지 않았던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하던 신앙이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면서부터 바로 부러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진정 참 안식을 얻기보다는 너무나 바쁜 활동이 결국 자신을 소진하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활동 이전에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점검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가 준 직분을 열심히 수행하면 다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기도도 예배도 열심한 활동의 하나로 인식되었었습니다.
자신은 그래도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또 주일에도 열심히 교회에 나가니 제대로 믿는다고 당시에는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신앙인으로서 성경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나 교양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분이 기독교 신앙이 갖는 폭넓은 세계관을 접하고 기독교적 교양과 접할 기회가 있었더라면
저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콧 펙이 지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조언’이란 책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최고의
종교, 혹은 세계관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현실을 엮어가는 경험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철저한 회의와 의심을 완전히 나의 것이 될 때까지 달구십시오.
우리 성공회 신앙의 삼대 축은 성서, 이성, 전통입니다. 자칫 이성만을 강조하며 너무 메마르면 안 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가운데 건전한 지성은 더불어 가야 합니다. 모든 신자들이 그럴 수는 없겠지만 공부할 만한 분들은 성경은 기본이려니와 요즘 읽히는 인문서적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하는 가도 알아야 합니다. 지금처럼 격동하는 시기에 성령께서는 어떤 시대적 표징으로 당신 교회의 선교를 이끌어 가시는 가에 대하여 기도와 더불어 깊은 인문학적 성찰도 해가야 합니다.
우리 성공회 안에서 형제자매들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의심의 눈초리를 하지 않는 관용 tolerance 을 사랑합니다. 교회 안에서 건전한 담론 문화가 허락된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의 성숙을 향해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세계성공회 안에 많은 논의와 고민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상황 가운데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식별하려 한다는 노력이란 것도 알게 됩니다.
우리 성공회 안에는 성무일도와 성찬례라는 영적인 통로가 있기 때문에 결국은 다양한 의견들이 성령의 은총 안에서 조화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성과 지성은 우리의 신앙적 여정에 있어서 균형 잡힌 가운데 함께 가야 합니다. (대한성공회 금산교회 조정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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