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시간

 

세상에 태어난 날
그때는 기도하는 시간
설레고 분주한 아버지
진통에 신음하는 어머니
두려운 기쁨으로 울음 울던 나
모두에게 그 때가 기도의 시간

 

고통과 슬픔의 날들
그때는 기도하는 시간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텅빈 마음으로 성당에 앉아
제대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게 그 때가 기도의 시간

 

기쁘고 평화로운 날들
은총에서 은총으로 깊어진 삶
나의 기쁨이 열려 흘러가고
그의 슬픔이 흘러와 채워져서
하나 되어 감사의 노래를 부를 때
내게 그 때가 기도의 시간

 

세상을 떠나는 날
그때는 기도하는 시간
은총의 시간을 기억하며
아쉬운 슬픔으로 미소 짓는 이
한가닥 숨을 안고 되돌아갈 나
모두에게 그 때가 기도의 시간

(자유림)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http://cafe.daum.net/humornara/5Y2/563711?q=%B9%D9%BA%F1%C0%C7%20%B1%E2%B5%B5&re=1

 

바비를 위한 기도 (Prayers for Bobby )

http://www.prayersforbobby.com/

《바비를 위한 기도》(Prayers for Bobby)는 2009년 TV 영화로서, 2009년 1월 24일 라이프타임 채널에 방영되었다. 2가지 부분에서 에미상 후보로 지정되었으며, 바비를 위한 기도는 `Once Upon a Time Flims`,`Permut Presentations`,`Sladek Taaffe Productions` 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 영화는 바비 그리피스라는 사람의 실화를 담은 르로이 F. 아론즈의 책 `바비를 위한 기도` 에 기초를 두었다. 바비 그리피스는 동성애자로써 그의 엄마의 종교적 편협과 사회적 편견에 의해 자살한 소년이다.

줄거리[편집]

엄마 메리 그리피스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녀의 자식을 보수적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의 아들 바비가 형에게 동성애자일지 모른다는 고백으로 그녀는 그의 비밀을 알게 된 후 모든 가족은 변하기 시작했다. 바비의 아빠와 남매들은 천천히 그의 동성애에 대해 이해했지만, 그의 엄마는 하나님이 그를 치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그를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고 그에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가 변할 수 있는 믿음 하에 교회 활동을 하며 평안을 찾도록 설득했다. 하지만 결국 엄마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절망과 교회의 동성애에 대한 거부는 그를 소극적이게 했고 우울증에 걸리게 했다.

죄의식에 짓눌린 바비는 그의 사촌네 집으로 떠나는 것을 엄마가 허락해줄 것을 바랐다. 그 후 그는 동성애를 없애려는 희망을 포기하며 오리건의 포틀랜드로 이사 가고, 그는 게이 바에서 만난 데이빗과 사귀게 된다. 하지만 사랑하는 엄마에게 있어서 그는 여전히 완벽한 아들이 될 수 없는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인해 결국 고속도로 위 다리에서 뛰어내려 즉사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비극에 잠긴 메리는 그녀 자신과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의 성경적 해석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긴 감정적인 고통에서 그녀는 천천히 동성애 사회에 대해 알아가고 우연치 않은 도움, 지역의 동성애자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목사는 그녀가 PFLAG(동성애자 부모, 가족, 친구들의 모임)이라는 단체에 가입하도록 설득시킨다. 그녀는 그곳에서 바비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아무 잘못된 게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유하지 않았다("God did not heal him because there was nothing wrong with him.")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동성애자 인권에 지지자가 되었고 결국 동성애자의 날을 만들기 위한 지역 회의에서 연설을 하며 그녀는 사람들에게 동성애자에 대해 혐오하고 비판하기 전에 아이들이 모두 듣고 있다는 걸 염두에 두길 바랐다. 결국 동성애자의 날을 통과시키지 못했지만 그녀와 가족은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PFLAG 회원들과 성소수자 퍼레이드에 행진하게 되고, 주변에 자신의 아들과 닮은 남자 아이에게 다가가 포옹을 하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들 그리고 그의 죽음에 대해 이해하게 되고 청소년 게이,레즈비언 인권을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다짐한다. (위키 백과)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동성애... 하느님의 실수 또는 은총의 가능성...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78083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남양주 외국인복지관에서 사목하시는 구균하(요나로렌스) 신부님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옮깁니다. 말미에 제 댓글도 함께...

 

https://www.facebook.com/Kiunah/posts/10152625080241005?fref=nf

 

긴 글입니다. 한줄 요약하면 한국 그리스도교의 현실이 참으로 유감스럽다는 겁니다. 아직 더 많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저로서는 스스로를 돌아보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적어도 그리 되지는 않아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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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전부터 분주했다. 어제 입원을 약속한 이주노동자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안의 시간이 늘 그렇듯 오랜 기다림과 잠깐의 만남이 반복되며 오전이 다 흘렀다. 입원이 결정되었으나 병실이 마땅치 않아 결국 오후까지 남게 되었다. 의료보험의 범주를 넘어선 소위 불법이라 불리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크다. 다행스럽게 대한민국은 아직 이런 이들을 위한 도움의 구조가 남아있다. 의료민영화가 되면 모두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병원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나누었다. 진료와 검사를 위해 병원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 잠깐씩 만났던 직원들과 의료진들 대부분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몇일새 서너번 다녀간 병원이지만 구내식당에서 만난 이들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왠지 모를 푸근함.


오후 2시가 넘어서야 겨우 병실을 배정받았다. 무료간병인이 있는 병실이다. 간호사와 환자에 관해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절과 여유가 느껴지는 병원이 얼마만인가! 입원을 꺼려하던 그를 두고 혼자 나오기가 석연치 않던 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환자복을 갈아입고 수액을 맞고 있는 그를 뒤로 하고 곧 다시 들릴거라는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순간 병원사목을 담당하는 수녀님 한분이 내가 나선 병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반가운 마음에, 또 병실에 남겨진 그를 부탁하려는 마음에 왔던 길을 되돌아 병실에 들어섰다.

간단한 인사. 이제 은퇴가 얼마남지 않은 듯 보일 정도로 연세가 지긋한 수녀님이다. 그런데 내가 성공회 신부라고 소개하는 순간, 변하는 그의 눈빛과 목소리.
짧지만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불쾌함이 나를 휘감았다. 단순히 자신과 다른 종교 -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하지만 명백히 틀린 표현이다. 다른 종교가 아니라 천주교인인듣 개신교인이든 성공회교인이든 정교회교인이든 그리스도교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다른 신앙표현을 하는 이들 일뿐이다. 다른 종교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나 해야 할 말이다. - 를 믿는 이들을 대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월한 존재가 열등한 존재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신앙의 친정 식구(?)였기에 더 참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손에서 반짝 빛나는 금반지에 새겨진 수도원 고유 문장이 닳아 뭉그러져 보였다. 오랜 수도생활을 짐작케 했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길이와 상관없이 몸에 밴 오만한 태도에 쓴 입을 다시는 수밖에 없었다.

또 한가지 병원사목이 병원에 입원한 그리스도인들, 아니 자신이 속한 교회의 구성원들만을 위한 것인양 새로 입원한 환자들을 구분하는 모습에 명동 한복판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이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지독한 자기 우월감과 타인을 자신의 틀에 맞추려는 모습에 숨이 막혀왔다. 얼마전 다녀가신 교종 프란치스코께서 천주교회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한 말씀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집불통 노총각, 노처녀가 되지 말라 하셨던 것 같다. 고집불통이 무조건 우기는 것은 아님이 분명하다. 교종께서 말씀하신 고집불통의 의미는 평신도들에 대해, 또 다른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나아가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존재적인 우월감을 가지지 말라는 의미라 본다.

아마도 몸에 익숙한 대로 행동했으리라. 그것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알지 못한채 최선이라 여기고 행동했으리라.

의료진과 직원들에게서 받은 느낌이 한 늙은 수도자가 전해준 느낌과 너무나 달랐다.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가식이라 생각한다. 오히려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누군가에게 무례하지는 않았는지. 목에 흰 칼라를 차고 스스로 인간보다 나은 다른 존재인양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이들이지 그 빛을 사유하고 전유해서는 안된다. 나는 빛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그리스도의 빛이 나를 통해 비추어지는 것이다.

어느 한 교파의 문제라 생각지 않는다.
한국 그리스도교 전체가 어쩌면 이런 자기 우월감으로 나와 다른 이들을 예단하고 한심스러워 하는지도 모른다. 신앙이 깊다한들 신학이 고매하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늘 일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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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일치문제와 다른 관점에서 보면
독선과 오만에 차 보이는 그 분의 교리적 신념과 태도는
힘든 수도생활을 하는 데에 나름 힘이 되었을 겁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저나 구신부님같은 이는 저 세상 "천국"가기를 포기해야합니다.
하느님 절대사랑의 은총에 힘입으면 우리라고 천국입성이 불가능하겠습니까만,
만일 천국에서 우리를 보면 이런 분들이 얼마나 놀라고 실망하실까요.ㅋㅋ
천주교 신자로 사제로 수녀로 평생 살아온 인생이 사기당한 느낌일 겁니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 우화를 원용하는 거지만 아마도 이 수녀님은
주님께 이렇게 항의할 지도 모르지요. "주님, 구원이 우리 교회밖에도 있다니, 은총이 이런 식이면 제가 미쳤다고 천주교 수녀로 일생을 보냈겠어요?")
주님과의 사랑을 구원으로 알면 좋았을 것을 그만 착각하여
배제하고 독점하는 권리를 구원으로 안 것은 유감입니다.
그러니 저 세상 천국은 이런 독실한 분들께 양보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 이루어지길 기도하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 은총의 나라에 살아가십시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흠없는 완전함과 흠까지 포함한 온전함의 차이를

벌레먹은 나뭇잎을 통해서도 깨닫습니다.

신의 은총은

상처 입은 세상살이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http://blog.daum.net/simshwan/13143074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 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이생진 시 ' 벌레 먹은 나뭇잎' 전문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복음이 기쁜소식이라니 마냥 헬렐레한 이야기로 알기쉽다. 가령 예수 믿으면 천당가는데 질믿으면 현세 소원성취도 덤이라는 헛소리는 그리스도교 메시지가 조.중.동(朝中東)스럽게 변질된 것이다.
복음은 세상의 실상, 삶의 진실을 온몸으로 깨닫는 일이다.
세상에 철저히 속아왔구나 하는 각성이다.
신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신의 자비는 차별이 없다....
우리의 고통과 기쁨을 함께 하는 신.
그 신은 선동하는 사람으로 재판에 져서 처형된다.
오늘도 참된 희망으로 사는 사람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향해가며 부활을 꿈꾸는 예수의 마음을 함께 한다.
그게 쇼도 아니고 낭만도 아니니
참된 희망은 깊은 분노다.

공유하는 글을 나는 부끄러운 내 양심에 들려주는 위대한 설교로 읽었다.

더 보기

특근 하느라 지난 십수년간 투표한 기억이 없다는 사람

세상 소식은 TV뉴스 보는게 전부고 어쩌다 신문을 보게 되면 주변에 널린 조중동만 봤다는 사람

일용직으로 전전하다가 2012년 자동차 하청회사 비정규직으로 입사하여 특근 포함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200만원 받으며 겨우 카드 돌려 ...막기로 살던 사람

열심히 일한 덕에 작년 정규직이 되고 자동으로 금속노조원이 되었지만 특근 때문에 집회에는 한번도 참석 해 본 적이 없는 사람

십년전 이혼 하고도 명절과 휴가는 두딸과 보내고 간혹 전처까지 동행하여 짧은 나들이 갖다오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 이었던 사람

전교 50등안에 들면 담배 끊겠다고 맏딸과 약속 했는데 그 딸이 70등한후 담배 끊을 것을 요구하자 대견 하면서도 담배 더 피우고 싶어 50등을 고집했다는 사람

아빠 고생하는 것이 안쓰러워 대학 안가고 취직하겠다는 맏딸을 설득해서 딸아이가 대학생이 되는 게 삶의 목표였던 사람

안주없는 깡소주를 마셔야 잠을 자는 습관 때문에 건강이 나빠져 회사앞 국궁장에 입회비 없이 월3만원 내고 가입하여 활쏘기를 취미로 했던 사람

전원 구출 됐다는 소식에 안도하고 야근후 취침에 들어 간걸 가슴치며 후회하는 사람

건저 올린 시신이 취재차량과 고위인사들 차량에 막혀 2시간 넘게 꼼작 못하자 남경필 지사의 마이크를 뺏아 차량부터 빼줄것을 호소 했다는 사람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체육관에 들렀을때 구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알리려 손들고 일어서자 곁에 있던 정보과 형사들로 부터 완력으로 제지당해 분통을 터트렸던 사람

청와대에서 대통령 면담때 그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진상규명 약속을 믿었던 사람

그 사람이 조중동에선 민노총 극렬 노조원이 되고 이혼후 가족을 돌보지 않아 자식들로 부터도 외면 받는 냉혹한 아빠가 되었으며 그럼에도 보상금에 눈이 멀어 극렬투쟁을 일삼는 인격파탄자가 된다 감히 남경필 지사의 마이크를 뺏고 대통령에게 욕지거리는 하는 무뢰배! 국궁은 어느새 부자들이나 할수 있는 사치성 취미로 둔갑하여 유민 아빠는 투쟁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귀족 노동자(?)가 된다. 그가 단행한 죽음의 단식은 뒤로 호박씨 까는 대국민 사기극! 조중동과 일베충들이 그려 낸 유민 아빠의 모습이다.

조중동과 TV뉴스가 세상의 전부 인줄 알았던 이 가난한 노동자를 더욱 분노케 한 것은 차디찬 바다에 맏딸 유민이를 잃었다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고직후 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는 진실, 그리고 자녀들의 죽어가는 상황속에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는 무력감, 이후 그 죽음의 원인을 밝히려는 유족들의 노력이 권력과 그 권력에 아첨하는 모리배들에 의해 처참하게 세월호속 아이들 처럼 짖밟히고 내팽겨치고 있는 현실, 그래서 또다시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

아!~ 내 딸이 이렇게 죽었겠구나. 밖에 떠 있는 헬기를 보고 구조되는 것으로 믿고 있다가 그렇게 허망하게 힘 한번 못써보고 원망 한번 제대로 해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갔겠구나. 정말 외롭게 죽음과 싸우다 이렇게 맥없이 나처럼 죽어갔겠구나.

새누리당 한 국회의원이 유족들이 국회에서 목소리를 높이자 그들을 향해 했다는 한마디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정말 뒤집힌 세상이다. 세월호가 뒤집히기 오래전에 우리 사회는 이미 뒤집혀 있었던 것이다. 정의가 뒤집히고, 부끄러움이 뒤집히고, 진실이 뒤집힌 세상에 우린 살고 있었던 것이다.

ㅡ보헤미안ㅡ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http://cafe.daum.net/WorldcupLove/Knj/1662134?sns=facebook

 

역사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다. 100년 안팎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세대에 세대를 이어 살아갈 때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 물음과 대답이 거기에 근거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답이 나 개인의 성공과 행복과 평안의 여부로 찾아질 수 있을까? 더 넓고 높고 깊은 차원, 즉 모두가 함께 더불어 참된 평화를 이루는 일로 그 기준을 삼으려면 역사에 기대어 "우리의 선배들은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지금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깊이 성찰해야 하리라.

역사학자 임종국 선생을 존경의 마음으로 기억한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서울교구 성직자 그리고 교우 여러분께

 

♱ 사순절 끝자락 성삼일을 보내시고 계신 모든 성직자들과 교우들에게 곧 맞이할 부활의 큰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성주간 동안 주님께서 고난 받으심과 십자가에 대하여 깊은 묵상을 하는 가운데 너무도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수학 여행길에 올랐던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승선한 여객선이 침몰하여 어린 학생들이 목숨을 잃고 또 실종되었습니다. 배가 침몰하는 상황 속에서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였을 어린 학생들을 생각하며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전히 상황은 유동적이지만 이미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지연되고 있는 구조 상황이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는 소식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며 기적과 같이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있기를 손 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번 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감당할 수 없는 큰 슬픔과 아픔에 빠져있는 부모들과 가족들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주님의 손길이 거친 풍랑을 잠잠케 하여 주시고, 어둠을 밝혀주시어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위험 속에서 구조 활동을 펼치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도 주님께서 힘과 용기를 더하여 주시고, 그들을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대한성공회 모든 성직자 그리고 교우들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이번 사건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모두 희생자와 실종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성주간 전례와 부활주일 감사성찬례 가운데 희생자들과 실종자 그리고 그 가족들의 슬픔을 기억하고 기도하여 주시고, 교회마다 계획된 부활절 축하 행사가 있다면 여객선 침몰 사고로 고통 받는 이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마음으로 행사를 연기하거나 간소하게 치러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여객선 침몰사고로 희생된 모든 이들의 영혼과 실종자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머리 숙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4년 성 금요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교구장 김근상(바우로) 주교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4년 4월 6일 (사순 5주일) 성찬례 강론

 

요한 11:1-45

1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가 사는 베다니아 동네에 라자로라는 병자가 있었다. 2 앓고 있는 라자로는 마리아의 오빠였다.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드린 적이 있는 여자였다. 3 마리아와 마르타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하고 전했다.
4 예수께서는 그 전갈을 받으시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 예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고 계셨다. 6 그러나 라자로가 앓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계시던 곳에서 더 머무르시다가 이틀이 지난 뒤에야 7 제자들에게 "유다로 돌아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8 제자들이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 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 하고 걱정하자 9 예수께서는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낮에 걸어다니는 사람은 세상의 빛을 보기 때문에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10 그러나 밤에 걸어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하시며 11 이어서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12 그러자 제자들은 "주님, 라자로가 잠이 들었다면 곧 살아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13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라자로가 죽었다는 뜻이었는데 제자들은 그저 잠을 자고 있다는 말로 알아들었던 것이다.
14 그래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라자로는 죽었다. 15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 곳으로 가자."
16 그 때에 쌍둥이라고 불리던 토마가 자기 동료인 딴 제자들에게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 보니 라자로가 무덤에 묻힌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뒤였다.
18 베다니아는 예루살렘에서 오리밖에 안 되는 곳이어서 19 많은 유다인들이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마르타는 마중을 나갔다. 그 동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21 마르타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주실 줄 압니다."
23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24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5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26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마르타는 27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이 말을 남기고 마르타는 돌아가 자기 동생 마리아를 불러 귓속말로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고 일러주었다. 29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달려갔다.
30 예수께서는 아직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마르타가 마중 나왔던 곳에 그냥 계셨던 것이다. 31 집에서 마리아를 위로해 주던 유다인들은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그가 곡하러 무덤에 나가는 줄 알고 뒤따라 나갔다. 32 마리아는 예수께서 계신 곳에 찾아가 뵙고 그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34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들이 "주님, 오셔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35 예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36 그래서 유다인들은 "저것 보시오. 라자로를 무척 사랑했던가 봅니다." 하고 말하였다. 37 또 그들 가운데에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라자로를 죽지 않게 할 수가 없었단 말인가?" 하는 사람도 있었다.
38 예수께서는 다시 비통한 심정에 잠겨 무덤으로 가셨다. 그 무덤은 동굴로 되어 있었고 입구는 돌로 막혀 있었다.
39 예수께서 "돌을 치워라." 하시자 죽은 사람의 누이 마르타가 "주님, 그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 하고 말씀 드렸다.
40 예수께서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하시자 41 사람들이 돌을 치웠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42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43 말씀을 마치시고 "라자로야, 나오너라." 하고 큰소리로 외치시자 44 죽었던 사람이 밖으로 나왔는데 손발은 베로 묶여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감겨 있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45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본기도> 생명의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성령의 참 자유를 주시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일생 거룩한 생활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라자로가 앓는다는 전갈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다. 그것으로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느님의 아들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틀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합니다.
 "라자로는 죽었다. 이제 그 일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내가 거기 있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이다. 그 곳으로 가자."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시더니, 태연하게 이틀 만에 “라자로는 죽었다”고 하십니다.


지금 성남 영생원에서 우리 교우 두 분의 화장이 진행 중입니다.
제가 이 가정에 한 달 전에 대심방을 드렸습니다.
특별히 두 분의 건강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엊그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장례식장을 찾아가며 가족들의 슬픔을 헤아리자니, 제가 어떻게 기도했던가, 무슨 기도를 드린 것인가 당황스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교우 여러분은 비슷한 경험이 없으신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열심히 기도했지만, 바라는 대로 결과를 얻지 못한 경우 말입니다.
피하고 싶고 원하지 않던 결과가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일까요?
우리의 믿음과 정성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요?


구해달라고 기도했는데 망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는데 죽어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그런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마르타도 울며 말하고, 마리아도 울며 말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안계셔서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주님이 냉정하셔서 제가 실패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슬픔과 좌절에 가득 차서, 원망과 불신과 회의를 억누르며, 라자로를 손발을 베로 묶고, 얼굴을 수건으로 감아서 무덤에 넣었습니다.
슬픔과 고통과 불신과 회의 모두를 담아서, 무덤에 넣고, 돌을 굴려 가두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라자로는 그렇게 무덤에서 재빨리 “처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버린 인생, 그렇게 사랑했던 주님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것 같은 인생, 그 라자로를 빨리 묻어버려야 합니다. 죽은 이의 자리를 치우고 다시 생활을 정비해야 하는 게 살아남은 이들의 태도입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하지요. 사람들은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 라자로를 잊어버릴 것입니다.


라자로를 사랑하는 마르타와 마리아도 라자로의 팔자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무덤에서 썩어서 냄새가 나는 시체가 우리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오빠 라자로 라는 사실은 참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으로 이어진 우리의 인생에 대해 예수님은 새로운 인식을 가르치십니다. 살든지 죽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하느님의 함께 하심을 누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마르타에게 깊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라자로를 사랑하시던 기억을 떠올리시며 비통한 마음으로 눈물 흘리시며 무덤을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사랑의 기억으로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네가 믿기만 하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라자로를 불러 내십니다. “라자로야, 나오너라.”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어떻게 믿어지세요? 예수님께서 도대체 무슨 일을 했다고 생각하세요?

라자로가 걸어나온 그 무덤은 돌로 만든 무덤 자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라자로가 묻혔던 그 무덤은 죽은 이를 산 이와 분리시키고, 단절시키고, 침묵시키는 인간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죽음이 두렵고 불편합니다. 죽음은 삶을 끝장내는 일로 여깁니다. 은연 중 우리는 죽음을 형벌과 저주의 결과로 생각합니다.
무덤은 그 죽은 이를 모시는 곳이지만 동시에 그 죽은 이에 관한 모든 기억을 가두는 곳이 됩니다.
죽은 이를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기억하여 우리의 삶 속에, 우리의 관계 속에 계속 불러내는 일은 산 자들에게는 무척 불쾌하고 부당한 일로 여기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은 이를 지금 이 곳으로 당신의 사랑 안에서 우리의 기억 속으로 불러내는 분이십니다. 죽은 이를 불러내시는 주님은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우리 삶의 구조와 차원을 단지 살아있는 이들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더 깊고 높고 넓은 차원에서 다시 살피도록 요구합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가진 자와 못가진 자,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를 모두 포함하는 더 큰 차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보도록 요청합니다.


라자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통해, 예수님의 기억과 두 자매의 기억과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다시 살아서 걸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를 풀어주어 가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베로 묶인 라자로의 손발을 풀고, 얼굴에 감인 수건을 벗겨 그를 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었던 사람의 시신이 소생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시체를 살리는 주님을 전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이 말씀을 믿게 하려는 이야기입니다.


라자로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로 연결하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살아있는 이들이 사랑으로 모입니다. 지금 장례를 치르는 고인들은 딸만 넷을 두셨는데, 따님들과 사위들이 함께 기도할 때마다 모두 너무너무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따님들이야 당연하다지만, 사위들이 그렇게 슬퍼하는 일은 드물게 보았습니다. 그 슬퍼하는 이유가 아름답습니다.
장인께서 너무너무 착한 분이셨고, 장모께서 너무너무 사랑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자녀들의 슬픔은 원통한 울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의 큰 사랑을 기억하고, 한없이 받기만 한 그 사랑을 다 갚을 수 없어서 감사하며 흘리는 자연스러운 눈물이었습니다.
그 슬픔의 기억은 돌아가신 이들을 무덤에 가두지 않고, 오늘 우리들의 마음과 관계와 삶 속에 불러내줍니다. 자녀와 가족들은 고인들을 기억하며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활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죽음을 통해서, 더욱 생생한 기억을 공유하는 일입니다. 죽음과 실패를 부인하고 외면하는 일이 아닙니다. 도리어 죽고 실패한 그 사람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허락하신 생명과 은총이 얼마나 귀하고 강한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제 고인의 시신은 소렴과 대렴을 거치며 준비된 수의로 잘 싸매여 졌습니다.
그러나 고인들의 영은, 하느님 안에서 드린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함께 확인하고 공유한 사랑의 기억을 통해서, 자유와 평화를 얻었습니다. 꽁꽁 동여맨 수의는 한편으로 정성스럽지만 한편으로 더 이상 우리와 관계없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는 냉정한 단절을 상징합니다.
죽은 이들에게는 산 이들이 평가가 마치 묶인 베와 감긴 수건처럼 옥죄입니다.


세상의 모든 억측과 오해와 사람들의 공허함과 두려움을 무기로 삼아 우리를 옥죄이는 죄의 권세를 꺽고 풀어내는 일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사랑의 승리입니다.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온 고인을 산 이들이 사랑으로 기억할 때 고인의 영은,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살아있는 이들과 돌아가신 이들이 모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이 감사성찬례는 바로 주님의 죽음을 “사랑 가득한 슬픔”으로 기억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께서 버리신 것처럼 여겨진 십자가의 죽음이 도리어 하느님께서 가장 깊은 차원에서 함께 하신 영광스러운 일임을 깨닫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의 고통과 불안”을 봉헌합니다. 이 봉헌을 예수님의 “사랑 가득한 슬픔”을 통해서 하느님께 바칠 때에 성령께서는 이를 “은총 가득한 기쁨”으로 변화시켜 우리에게 되돌려주십니다.
이 성찬례는 마지막 만찬을 기억하는 식탁인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부활의 잔치입니다.


우리 교우들의 죽음과 부활을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로 비추어 볼 수 있음은 감사한 일입니다.
라자로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음도 복된 일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우리의 참된 구원이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경륜에 따른 신비의 결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든지 죽어있든지, 늘 주님께서 사랑으로 기억해주시는 그 은총 안에 남아있기를 원합니다.
“네 실패와 죽음의 무덤에서 걸어 나와, 나와 함께 사랑의 기억을 채워가자!”
부르시는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듣고, 소망 없는 시체 같은 몸을 일으켜 생명의 몸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임종호신부)*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흰손

 

                                       함석헌

 

내 마음의 벗아, 영원의 길 동무야,

가림 없는 말 가림 없이 받을 너 참 맘아,

옷깃을 헤치고 오라,

내 꿈을 노래하리라.

내 꿈을 꾸었노라,

가는 해 채 가기 전, 오는 해 채 오기 전,

잠도 아닌 깸도 아닌 황홀경(恍惚境)에서

무서운 꿈을 내 꾸었노라.

*

영원의 문이 열리었더라.

지극한 영광의 보좌 보이더라.

그날, 무섭고도 즐거운 그날,

모든 만물의 큰 마감을 보시는 날.

땅 위의 모든 영혼 하나하나 불러내어

장막에 있을 동안 한 대로 갚으시는 날.

참을 한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거짓을 한 자에게 영원한 사망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

거룩과 사랑이 넘치는 아버님,

크고 작음 그 눈에 있으리오.

곱고 미움 그 맘에 있으리로.

한결같이 보시는 사랑에,

한 끝같이 다스리는 의에,

 

무서움 기쁨은 제 맘의 얻은 것,

받는 제 맘에 따라 받아진 것.

천사야 그 거룩을 노래하자,

성도야 그 사랑을 찬양하자,

만물이 우리 아버지 앞에 빨까숭이로구나

부끄럼 없이 제대로 드러내는 어린 맘이로구나.

 

그 앞을 홀로 나오지 못하고

떼 지어 오는 자들은 누구냐?

밀며 밀리면서, 끌며 끌리면서,

취한 무리처럼 오는 자들은 누구냐?

 

어깨는 걸었건만

한 손은 아니로구나.

걸음은 맞추건만

한 발은 아니로구나.

입은 제각기인데 말은

왜 한 말을 하느냐?

한 말은 한다면서

눈치는 왜 서로 다르냐?

개체도 아니요, 전체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국민도 아니요,

떼지어 먹는 동물의 떼냐?

그 떼 물속에 몰아넣는 레기욘이냐?

머리 위에 빛 가리워 날리는 큰 기

금으로 수놓은 거룩한 부호 보좌의 빛 다투려 하고,

한 가지 그림 판에 찍어내어 손에손에 들고 흔드는 표지

나부끼는 그 모양 늦은 봄 흩날리는 꽃인 듯구나.

멀리서부터 머리 조아려 조아려

걸음마다 떨며 부르는 합창소리,

"감사와 찬송을 드리옵니다.

영광과 존귀를 세세에 드리옵니다."

"죽을 죄인들 아무 공로 없사오나

우리 주 예수 흘린 피 믿습니다.

모든 죄 대속해 주심 힘 입어

의롭다 해주심 얻을 줄 알고 옵니다."

 

()와 인조석(人造石)으로 쌓아올린 교회당의 반향(反響)하는 천장 밑에서

연습 또 연습해 기계처럼 곡조 맞춘 그 합창,

문 밖에서 들을 땐 천사의 음악인가 했건만

영원의 문턱 넘는 그 순간 그 소리 변해 버렸네.

 

높고 낮은, 세고 약한, 억만 가지 가락 청을

낱낱이 제대로 울려내도록 지어진

이 천장 없는 무한의 무대위에서

땅 위의 조화 도리어 부조화되었네.

 

스스로 의심 든 맘 제 가리를 채리지 못하고

어긋나는 장단 억지로 맞추려 조급히 애쓰나

애쓸수록 마치 해진 그물 서로 당기는 듯해

당길수록 생명의 산 생선 점점 빠져 나갔네.

 

혼란의 공기 우수수 갈바람처럼 무리 사이에 돌 때

문득 우레 소리 보좌에서 나와

때문에 온 누리 여섯 가지로 흔들리고

눈 부신 번개 속에서 말씀 나와,

 

"나는 영이로다, 참이로다,

생명이로다, 인격이로다.

내게 오는 자 참으로 오라, 영으로 오라, 자유로 오라.

맘을 다 뜻을 다 성품을 다 힘을 다한 사랑으로 오라."

 

"내 사랑의 피 네 과연 믿고 왔느냐?

어디 보자, 내 앞에 서라, 하나씩 서라.

아들답게 똑 바로 마주서라.

내 아들 본 듯 너를 보마, 네 속을 보아주마."

 

"얼굴을 들어라,

내 아들에 입 맞춘 네 눈동자를 보자.

손을 내밀어라.

그 피를 움켜 마셨을 그 네 손을."

 

"황공 황송하옵니다.

어찌 감히 드오리까?

한 것 하나 없고 오직 이름 믿습니다.

값 없이 그저 주시는 아버지라 해서 왔습니다."

 

"피는 들었다면서

네 손이 희구나.

네 입술이

그늘에 시드는 나뭇잎 같구나."

 

", , 저희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십자가만 믿고 왔습니다.

이것만 가지고 가면, 그저 살려준다더라 해서

그저 이 증명의 표만 얻어가지고 맘 놓고 왔습니다."

 

"누가 그러더냐?

누가 네 믿음 보장하더냐? '한다더라'가 뭐냐?

이거면 된다는 증명 누가 하더냐?

내 한 것 못 미더운 듯 또 다른 증명 어느 놈이 하더냐?"

 

"나 아닌, 지은 나 아닌, 어떤 놈이

네 마음 감히 안다더냐?

알아서 감히 믿음이고 무덤이고 이름 짓더냐?

너희끼리 사사로이 주고 받을 맘들이더냐?"

 

"증명의 표!

이 음녀의 다리 밑에 종살이하는 놈들,

싸인이 뉘 싸인이냐?

내 아들 예수 눈 감고 찍는 도장 찼다더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님도 아드님도 다 아닌 줄은 아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거룩한 사자 그리했습니다.

우리가 그들 다수가결로 뽑아 거룩한 목자로 세웠습니다."

 

"그들 우리가 세워 당신 명령 대신 행하는 자로 알잔

우리들의 힘의 표, 우리 임금입니다.

말썽되는 인격의 자주권(自主權) 한번 넘겨 그에게 맡긴 후는

문제 없이 눈 감고 따라가니 참 태평입니다."

 

"세상 아무래도 괴롭삽기,

인간은 아무래도 하나님은 아니옵기,

지옥 같은 이 세상 천당처럼 살아보려

자유하는 인격은 버리기고 '더라'만 믿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놈들아, 이 짐승들아

그건 그림장 아니냐 어디 피냐?

그것을 파는 놈은 장사꾼 아니냐?

속여먹은 삯꾼 아니냐?"

 

"그 손을 봐라, 기계 아니더냐?

교묘 정확은 하건만 차지 않더냐?

그 몸짓을 봐라, 틀에 박히지 않았더냐?

천성을 이룬 배우 아니더냐?"

 

"내 아들의 십자가,

천하를 다 준대도 아니 바꾼다는

제 목숨 내건 그 십자가,

너희는 그림장에 팔고 사누나."

 

", 내 아들 피 본다 했지,

내 아들 귀여워 그 귀여운 맘에

방울마다 생명 든 그 피 보아주마 했지,

어디 붉은 물감 가져오라더냐?"

 

"방울방울 참이 들어,

방울방울 사랑이 사무쳐,

영글고 영근 생명의 구슬

한 알을 땅에 버려둘 길 없어,"

"그 한 방울만 들고 오면

그 피 귀여운 값에

가지고 온 그 맘 또 구슬같이 귀여워,

길이 살려 내 안에 둔다 함 아니냐?"

 

"이거면 된다 해서 왔삽는데,

그저 주시는 아버지라 해서 왔삽는데,"

 

"이놈들아 '이거' 란 무어냐?

말라빠진 나뭇잎새 말이냐?"

 

"마른 나뭇잎조차

다른 잎으론 못 바꿀 개성이 있거든

너희는 꼭 같이 판에 찍은 그림으로

영원한 생명 사려느냐?"

 

"날카로운 서리 칼 맞아

흘린 피로 시드는 강산에 한때 산 기운을 돌리는

떨어지는 단풍잎조차 맘 넣어보면,

제각기 다른 상처 입은 제 주먹 제가 각기 쥐지 않더냐?"

 

"너는 꼭 십자가 신앙 판에 박아 다량 생산해

제각기 제 병 들어 제각기 고민하는

하다많은 영혼 한꺼번에 건지려

마술의 부작처럼 삼키게 하려느냐?"

 

"이놈들아 내 아들의 피를 가지고 와.

너 위해 흘린 내 아들의 산 피, 영원히 산 피.

짐승의 피도 안된다 했거든

하물며 그림 가지고 될 일이냐?"

 

"나를 자비한 아버지라고!

제법이다만 내 자비를 네가 아느냐?

너는 내 자비를 배워 얻으라.

자비를 배우기 전, 배우기 위해, 참을 배워라!"

 

"참을 배워라" 그 소리 발할 때

무서운 불 같은 서릿바람 어디로선지 모르게 와

섰는 무리 엄습해

놀라운 현상 일어났네.

 

들었던 표지들 빼앗은 이 없이 스스로 떨어져

늦은 가을날 날리는 낙엽 같고,

뼈를 에는 추위에 그 얼굴 맞아

사막에 불리는 백골인 듯 떨었네.

떨며 절망에 우는 소리 "예수의 피야

이천 년 전 갈보리 산 위에 흘려

그 땅에 다 잦아 벌써 다 없어진 피

그 피를 지금에 어디 가 찾으리요?"

 

"이놈들아 갈보리에 흘렸던 피

그 피 네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 위해 네 몸 위에, 네 혼 위에, 흘려

네 피 된 산 피말이지?"

 

"네 만일 그 피 마셨다면이야,

(, 내 살 먹어라 내 피 마셔라 않더냐?)

그러면야 지금 그 피 네 속에 있을 것 아니냐?

네 살에, 뼈에, 혼에, 얼에 뱄을 것 아니냐?"

 

"바늘구멍만한 상처 네 손에 나봐라,

댓 줄기처럼 그 피 아니 내 쏘랴?

네 온 몸 그 피 입어 그 피에 젖을 것 아니냐?

네 손이 왜 희냐?"

 

"피는 한 방울 아니 묻고 표지만 든 흰 손,

아니 흘려서 아니 묻었구나.

네 피 흘릴 맘 한 방울 없어

그저 남더러 대신 흘려 달래 살고 싶더냐?"

 

"십자가 소리만 들으면 눈물나지!

네 푸른 입술이 히스테리로 떨지!

우는 말 말아라.

눈물 소리 말아라."

 

"차디찬 녹슨 함석집 처마 눈썹도

아침마다 해만 뜨면 흘리더라, 더 잘 울더라.

닳았다 식는 밖엣 날씨 보고

흐르고 맺는 눈물 무슨 소용이냐, 피만 마른다."

 

"대속(代贖)이라!

둘도 없는 네 인격에 대신을 뉘 하느냐?

내게 진 빚 나 모르게 너 혼자 줄치면

그 청장(靑帳)을 내 안다더냐?"

 

"힘이 아니 들이고 빌어 삶,

생각은 아니하고 '더라'만 외는 빎,

이름은 빌 망정

삶을 어찌 빌 수 있느냐?"

 

"예수는 예수요

너는 너요,

멎음 없는 역사의 흐름 흐르는 언덕

저쪽엔 그가 서고 이쪽엔 네가 서고,"

 

"그 흐름 그대로 굽어보면서

그 언덕 그대로 딩굴면서

외침을 외친단들

내 속이 어찌 대속이냐?"

"'사랑하는외' 딸 얼굴에 든 허울도

어미 사랑으로도 바꾸진 못해

제 얼굴 제각기 쓰고 건너다보다가

한숨으로 헤어지는 인생 아니냐?"

 

"심장의 육비(肉碑)에 새긴 기록을,

영혼의 미간에 박힌 죄악의 허물을,

대신을 누가 대신한단 말이냐?

맘은 있다손 어떻게 하느냐?"

 

"너는 너 아니냐?

너만이 너 아니냐?

나는 나 아니냐?

나는 나만 아니냐?"

 

"예수 예수요 네가 넌 이상은,

상대의 바다에 서로 떠 바라는 한은,

그는 우뚝 서시는 섬산 바위요,

너는 까불리우는 조각배요?"

 

"멀어도

배는 배 바위는 바위.

가까워도

바위는 바위 배는 배"

 

"하늘 땅 부르짖어도

그 배 그 바위 그대로 아니냐?

발을 동동 굴러도

그 바위 그 배 그대로 아니냐?"

 

"너 살고 싶으냐?

대들어라, 부닥쳐라.

인격의 부닥침 있기 전에

대속이 무슨 대속이냐?"

 

"그의 죽음 네 죽음 되고

그의 삶 네 삶 되기 위해

부닥쳐라, 알몸으로 알몸에 대들어라!

벌거벗은 영으로 그 바위에 돌격을 해라!"

 

"너는 그것을 했느냐?

이 스스로 정통 자랑하는 자야!

정통은 빈 통이다

이 표지 든 흰 손아!"

 

"이 거지놈들.

예복 안 입고 얻어먹으려 드는 놈들.

너의 조상은 땅 위에 내 집 강도굴로 만들고,

너희는 하늘 위에 내 나라 거지 수용소로 만들려고."

 

"나를 모욕하는 놈들.

내 쓰는 선심 악용하는 놈들.

그저라니 맘도 그저인들 알았더냐?

어서 피를 가져와, 뜨끈 뜨끈한 산 피를?"

 

"나는 여호와 하나님임 벌써 잊었느냐?

내 제단 늘 더운 피로 젖어 있기 요구하는 하나님임을

내 제단 너는 어디서 보느냐?

기쁨 슬픔의 옥과 돌을 피 반죽으로 쌓는 네 양심의 터에서 아니냐?"

 

"산 피 가지고 내 제단에 서자는 너 영원의 대제사(大祭司)!

너는 피 어디 담으려느냐?

그릇에냐? 그림에냐? 죽은 짐승에냐? 죽은 신앙개조(信仰個條)에냐?

네 염통을 쪼개라 그밖에 어디냐?

 

"생명은 생명에서만.

피는 피에만.

네 피 없는 예수의 피 어디 있느냐?

네 십자가 아닌 예수 십자가 어디 있느냐?"

 

"지지 않고 십자가 맛 네 무엇으로 하느냐?

맛 모르는 십자가 네 어이 믿느냐?

허공에 바라는 십자가의 예수 뜬 예수

가슴에 등에 안고 진 십자가의 예수 너와 하나로 산 예수."

 

"나는 너 위해 내 맏아들 죽였거늘

너는 내 막내 아들 위해 땀도 아끼느냐?

내가 값 없이 준다해서

네가 나를 그림으로 사려느냐?

 

"내가 자비라니 얼굴 봄이냐?

맘을 봄 아니냐?

내가 그저 준다니 혼 두고 함이냐?

연약한 몸을 두고 함 아니냐?"

 

"없이봐서 불쌍이냐?

귀히 여겨서니라.

놀리려고 그저냐?

값으론 치지 못할 네 혼 통째로 찾으려 해서니라."

 

"내게 그림이 웬일이냐? 내가

돌리지 못하는 눈알 놀리지 못하는 손에 그림쪽을 붙여

영원불변을 형상에 박아 지니노라 거짓을 하는

저 우상이냐?"

 

"여봐라!

"- -"

", 이 흰 손 가진 우상교도 놈들을 끌어내어

거룩한 내 집을 더럽히게 말라!

그들은 속보다 껍질을 더 좋아하더니

잘 됐구나 바깥이 그 영원한 집이 됐구나.

그들이 힘쓰는 인격을 마다 하더니

좋구나 어둠 속에 길이길이 놀며 울 게 됐구나.

완전 요구하시는님을 그저 주는 반편으로만 알았으니

있는 자 더 주고 없는 자 빼앗는 진리를 톡톡히 알아야 하겠고,

있어서 있는 님의 모습 제 혼에서 스스로 깎았으니

끝없는 매임 속에 쪽쪽 옮이 마땅한 일이로다.

 

"아이, 아이, 아이구,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가 믿지 않았읍니까?

당신의 교회 바리십니까?"

 

"믿어! 너희가 믿었느냐?

내 뜻대로 살았느냐?

나는 영원히 일하는 영, 사는 영,

흰 손 가진 너희를 나는 모른다."

 

"네가 나를 믿거든 내 뜻을 온전히 이루라,

내 내 뜻을 ''의 안에 말해 세상에 보냈노라.

네 내 아들 믿거든 그가 되라.

그가 죽었으면 너도 죽어라."

 

"그의 십자가 바라만 보느냐?

인생에게 지기 명하는 십자가의 명령 아니냐?

시체를 뜯어먹는 독수리 심산(深山)에 숨듯

교회당의 탑 속에 숨어, 죽은 예수 이용해 먹지 말라."

 

"내 교회 바리느냐고?

내 교회를 네 보느냐?

세운 날 없는 내 교회

무너질 날은 있을소냐?"

 

"성하고 쇠하는 교회

그것은 내 교회 아니요 너희 인간의 교회니라.

너희 세운 너의 교회 나 기다릴 것 없이

너희가 스스로 헐고야 마느니라."

 

"교회, 교회는 왜 찾느냐?

깃발은 벌써 역사의 쓰레기통에 든 지 오래다.

아비의 죄 자식에게도 묻지 않는 나 아니냐?

각 사람 다, 사람이거든 제대로 나오너라."

 

"내 교회 너희 안에 있음 선언한 것이

벌써 언제냐?

둘은 설 수 없는 인격의 시온 산 끊어진 꼭대기에

나는 내 말씀 내리는 교회를 세우노라."

 

"잔말 말고 어서 나와,

핑계 말고, 주저 말고 나와,

서로서로 미루는 믿음 너를 구원 못해,

나서라, 벌거벗고 알 영으로 나서라."

 

"여럿이 깃발 들고

'우리 교회, 우리 교회'

수로써 나를 엎누를 터이냐?

나는 투쟁에 못견디는 너희의 지배자와는 다르다."

 

"너희가 고운 목소리로 합창을 불러도 내 맘은 아니 풀린다.

우주만물이 밤낮 없이 하는 영원의 코러스에

너희는 공연히 딴청만을 넣지 않느냐? 듣기 싫다.

각각 해라 네 노래, 네 하소연을 네 청으로."

 

"전체의 가시 숲 속에 올빼미처럼 숨어

부끄런 몸을 감추려는 놈들,

책임 없는 외침으로 없는 기세 올려보는

이 개성 없는 비겁한 놈들."

 

"보아라 이 나라에선 개개가 전체다.

'우리 교회'의 단체 교섭은 소용이 없다.

들어라, 오늘은 영원의 현재,

역사적 전통의 특전은 벌써 빈말뿐이다."

 

"각각 나오너라.

솔직히 나오너라.

담대히 나오너라.

내가 빛이니 너도 빛을 발하라."

 

"아이, 아이, 이게 웬일이야요?

주님 주님,

이럴 줄은 몰랐어요,

우리가 믿지 않았어요?"

 

"아니 거기 끌려가는 건 누구야요?

우리들의 거룩한 목자! 교황님! 신부님!

당신두 같은 운명,

글세 이게 웬일이야요?"

 

"아하, 아이,

아니야 우리가 바울한테 속았어,

행함으로 아니요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니 나도 그랬지.

그저 얻는 것이니 복음인 줄만 알았지."

 

"그러나 속았어,

하나님 그런 하나님 아닌걸,

무서워 무서워,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두는 폭군이여"

 

"바울 선생은 지금 어디 계신가?

인제라도 만나면 물어라도 보련만!

믿기만 하면 그저 구원 얻는다 큰말을 한 이여

우리 위해 한 마디 해 주셔요."

 

"여봐라!"

"--"

"너 저놈의 입을 찍어라,

저 진리의 사도를 모욕하는 놈을."

 

"이놈아,

네 놈이 바울을 속였지,

그래 바울이 너를 속였느냐?

이 바울을 봐라!"

 

"이 욕 먹고, 매 맞고, 터지고,

쫒겨다니고, 사슬 지고, 갇히우다가,

마침내 목을 잘리운 이 바울을

이 피투성이의 사람을."

 

"이가 말꾼이냐?

그림 장수냐?

제 주관에 취하는 자냐?

지저를 좋아하는 게으름쟁이냐?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한 이 노력의 사람을

네가 속여 만병약으로 팔아먹으며

놀고 먹다가 온 네가 아니냐?

네 흰 손 푸른 얼굴이 너를 증거 않느냐?

 

"내 오늘이야 내 바울을 위해

변명하고 분을 풀어주리라,

싸구려 싸구려의 약장수 놈들 게 끌려

이십 세기의 거리거리에 구경거리가 된 내 바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제 몸에 채워

영광으로 기뻐하는 그를

놈들이 손뼉치며 잘한다 잘한다 하면서

가까이만 가면 슬슬 피해 정말 구경거리를 삼았지."

 

"앞엣 것 잡으려 뒤엣 것 잊고 달리며

아직도 못 잡았노라 애쓰는 그 늙은 용사를

놈들이 우야우야 깃발 두르면서도

뛸 생각은 않으며 상 타면 가로채려고 참말 바보 대접을 했지."

 

"동포의 구원 위해서람 간절한 맘

저주의 자리에도 가겠다던 이 사람,

약한 형제의 믿음 위해서람 겸손한 맘,

일생 고기 아니 먹겠다 하던 이 사람."

 

이 사람, 이 행함의 사람을 너는 알았느냐?

팔아먹을 대로 팔아먹고

이용할 대로 다 이용한 다음

이제 또 무엇을 이 순교자에게 넘겨 쒸운단 말이냐?"

 

"이놈들, 믿음을 놀음으로 바꿔놓는

이 안일교도(安逸敎徒) 놈들,

아버지 형상 몸에 지키는 참 맘 보면 교만이라 비꼬아 몰고

스스로 거짓 겸손 자랑하는 너야말로 인간주의자들.

 

"저놈들을 내가 모른다, 저 염소들을,

내 모습 스스로 버리고 내 약속 맘대로 내 버린 저놈들,

나는 저놈들을 모른다, 바깥으로 내 몰아라.

거기서 영, , 영 슬피 울도록."

*

내 꿈을 노래했노라,

이따가 오는 무서운 일

꿈 속에 본 무섭고도 기쁜일

철 없는 요셉처럼 내 일렀노라.

철 없는 꿈꾸는 자를 교만타 말라,

하나님 모르는 무리에 팔지 말라.

이따가 오는 기쁨의 날을, 내 형제야,

너희가 부끄럼으로 맞을까 두려워하노라.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2013. 12. 22 (대림4주일)/ 이사7:10-16, 로마1:1-7, 마태1:18-25

 

 이 시대의 요셉이 되어라!

 

불교 신자들은 인사할 때 “성불 하십시오”라고 인사를 합니다. 불교의 궁극 목표인 큰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라는 말입니다. 번뇌를 넘어 해탈에 이르시라는 덕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이런 인사가 있습니다.

성찬례 때 마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인사를 합니다. 이 말은 곧 우리 안에 “‘임마누엘’이루어지기를 빕니다.”라는 말입니다. “주님과 하나가 되십시오.” 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인사인지 모르겠습니다. 불교 신자가 성불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면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주님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주께서 주시는 축복과 평강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치유되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참된 진리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영원 생명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임마누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임마누엘이 어떻게 우리 안에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약혼자였던 마리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기를 갖게 된 것을 알고 남몰래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문제만은 법대로 할 수는 없었습니다. 법대로 하기에는 너무도 마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은밀히 파혼하려고 마음먹었던 것 같습니다. 이 결단은 요셉이 마리아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요셉에게 명령합니다. 지금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처구니없는 제안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천사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현실, 자신의 자존심, 다 접어두고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분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말이 눈에 뜁니다. 이 일 때문에 임마누엘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이 일이란 어떤 일일까요? 물론 성서 전체를 보면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이지만, 마태복음은 요셉의 순종입니다. 

루가 복음은 마리아가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요셉이 주인공입니다.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도 중요하지만 그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한 요셉의 순종도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임마누엘”의 예언이 완성되려면 마리아의 순명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요셉의 순종도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태와 루가는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사할 때마다 임마누엘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요셉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야할 신앙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와 요셉의 순명을 통해 비로소 임마누엘 약속이 성취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떤 여인입니까? 예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여인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천사가 제안한 이 선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인지 알았습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길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수락하는 순간 마리아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요셉도 그리고 가족도 친구도 다 포기해야만 합니다. 또 여자로서의 순결과 체면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간음한 여인으로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라는 한 아기를 이 땅에 때어나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고난을 감내해야만 하는 선택한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2천 년 전 예수의 어머니로만 남아 있을까요?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서는 소설책이거나 동화책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서를 지금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마리아는 2천년에도 있었고 오늘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2천 년 전 마리아를 통해 오늘 이 시대에 존재하는 마리아를 찾아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수많은 마리아가 있습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기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이 시대의 마리아라고 생각합니다.

도봉교회에 있을 때, 의정부 교도소에 가서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도봉교회 교우님이 선교하시는 곳인데 몇몇 사람이 돈을 모아 푸짐한 음식과 선물을 준비해서 그들과 함께 성탄을 축하했습니다. 비록 한 때 실수로 이곳에 와서 살게 되었지만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저는 이들이야 말로 이 시대의 마리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가끔 안나의 집 수녀님들을 생각합니다. 안나의 집은 평균 연령이 75세가 넘습니다. 때문에 일 년 내내 수족을 쓰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한두 분 정도는 늘 계십니다. 그런데 땀을 뻘뻘 흘리면서 할머니를 씻기고 그들을 보살피는 수녀님들을 볼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있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일을 해보았지만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난 자식도 하기 어려운 일인데 일 년 내내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왜 수녀님들이 이런 곳에서 남들이 하지 않는 이 일을 하고 있는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싶었고, 그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 시대의 마리아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의 헌신입니다.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하고 보듬는 그들의 헌신으로 인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이들은 마리아입니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기쁨을 주기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있는 저들이야 말로 오늘의 마리아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던지 생명질서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이 시대를 사는 마리아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말 많은 마리아가 있습니다.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 전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가 그렇고, 인술을 펼치다 별세하신 장기려 박사야 말로 오늘의 마리아입니다. 요즘 국가 정보기간이 불법적으로 대선에 관여한 것을 놓고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사실 국가 기관이 대선에 불법으로 관여하게 되면 민주주의의 근본 질서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목소리도 이 시대의 마리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예언자로 수도자로 봉사자로 살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 주변에는 언제나 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것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가난한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들을 돕겠다고 자선냄비 앞에서 추위를 이기며 종을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올해도 작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비록 작은 정성이지만 이 곳에 헌금을 할 수 있는 그 정성, 바로 오늘의 요셉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자신은 그 일을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오늘의 요셉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처음에 임신한 마리아를 보고 요셉이 어떻게 하려고 했습니까?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습니다. 마리아와의 관계를 끊겠다는 말입니다. 파혼을 하면 요셉은 마리아에 대하여 그 어떤 의무도 가질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 순간부터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그런데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와 함께 모든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누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의 기쁨은 임마누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임마누엘이 이루어집니까? 요셉이 기꺼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마리아에게 요셉이 필요합니다.

 

교우 여러분이 우리는 이 땅의 마리아를 위해 요셉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복음을 전하며 사랑을 실천해가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도자로 혹은 선교사로, 노숙자와 장애자를 위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는 자들을 위해 자신을 바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발에 밀려 죽어가고 있는 환경을 살리기 위해, 사회의 정의를 올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을 바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요셉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박성광 신부님께서 노숙자를 위해 겨울 헌옷을 모아달라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노숙자를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 박 신부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마리아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위해 헌옷 하나 모아주는 행위가 바로 오늘의 요셉이 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람들의 요셉이 되어 줄 때 비로소 임마누엘의 역사가 이 땅에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인사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마리아가 되고 요셉이 될 것을 서로 격려하는 인사입니다. 우리가 서로 마리아와 요셉이 되어 줄 때 그리스도의 평화와 그리스도의 생명은 이 땅위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성탄을 맞이하는 사람들,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이 시대의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여 이 땅에 임마누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

이 말씀은 2천 년 전에 요셉에게 한 말씀이 아니라 바로 오늘 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기꺼이 요셉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임마누엘 성탄을 만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성공회 안중교회 관할사제 최은식 신부)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http://cafe.daum.net/anglican-church/O0Ce/107

성공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다음 까페)에서 달팽이^^교우의 글을 옮깁니다.

 

긍정적인 밥

                                            함민복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함민복 시인의 시처럼 이 세상을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해 봅니다.

행복은 일상에 늘려 있는 소소한 것들에서 얻는 것이라 하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일상의 작은 행복에 눈이 멀고 잡히지 않는 미래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오늘의 삶을 희생시키는 것 같습니다.

 

현재 자신이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할 가능이 커고, 현재 행복하지 않은데 미래에 행복해 질 것이라는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세를 지나 바로코 시대에 유행했던 구호로

가르페 디엠(carpe diem) ' 오늘을 즐겨라,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속담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한경쟁의 신자본주의 아래에서 우리의 삶은 가진 자는 더욱더 많이 가지고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은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거스리는 삶의 대안이 이 시에 녹아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탐욕과, 경쟁이 아닌 지금 가진 것에서 넉넉함을 창조하는 능력, 여유로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능력인 것 같습니다.

행복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시집이 한 권 팔리며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삼백원이 있어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삶,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2013년 한 해도 보름 남았습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하게 됩니다.

그 모든 삶의 여정에서 "나는 행복한 삶을 살아노라" 고백할 수 있는 있는 삶이 되었으면 합니다.

 

2013년 12월 15일...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15098.html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시국선언문

"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아모스 5:24

 

 

지금은 정의와 평화의 사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대림절입니다. 대림절은 설렘과 희망의 절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은 절망적입니다. 우리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은 지난 9월에도 국정원 선거개입 사태를 우려하고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시국 선언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난 대통령 선거가 국정원뿐 아니라 정권 전반이 연루된 총체적 부정선거였음이 속속 드러나고 있음에도 그 수혜자인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사태 해결을 위한 진정성 있는 자세를 버린 채 검찰수사를 방해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더욱이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각계의 우려와 정당한 요구를 종북 몰이, 국가 정통성에 대한 도전,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으로 호도하며 공안정국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날로 가중되고 있는 경제난과 더불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불필요한 정쟁을 양산하며 결국 이 사회를 수 십 년 전으로 후퇴시키는 근원적 뿌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모든 종교인들이 지키고 추구해야 할 첫 번째 덕목입니다. 사회가 부패할 때는 소금의 역할을, 진실이 탄압받는 어둠의 시대에는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 종교인들의 소명입니다. 따라서 천주교, 불교, 개신교의 시국 선언과 그들의 행동에 대해 대한성공회 정의 평화사제단은 전적인 지지와 신뢰를 보내며 그들과 함께 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은 세계 성공회 일치의 상징인 켄터베리 대주교(저스틴 웰비)의 "정의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입니다.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과 함께 보다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정체성의 근본입니다. 정의가 사라지면 희망도 없습니다. 정의가 존중받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가집니다." 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적극적 행동을 주문하고 있는 이웃 종교 지도자들, 사회 각계의 염원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며 다음과 같이 우리의 요구를 밝히는 바입니다.

 

하나,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통령 선거 기간 중에 일어난 국정원과 군 정보기관을 비롯한 정부 기관들의 선거 개입에 대해 공정한 수사를 보장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등 그 선거의 최종 수혜자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하나,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정의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각 계 국민들의 정당한 비판과 요구에 대한 마녀사냥식의 종북 몰이와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키는 선동과 탄압을 즉각 중단하기 바랍니다.

하나, 정치인들과 언론인 여러분에게도 부탁드립니다. 진실, 오직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그것이 민주주의이며 정의이고 평화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만약 대통령과 정부여당이 끝까지 진실을 외면하고 사태를 호도하려 든다면 이 정권은 더 큰 국민적 저항에 맞닥뜨릴 것임을 경고합니다. 우리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역시 대통령직 사퇴를 포함한 더 강한 요구로 나서게 될 것임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2013년 12월  12일
대한성공회 정의평화사제단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성공회대학교는 정부의 발표대로 부실대학인가

http://blog.daum.net/yiwoosong/13483476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성공회대학교 2014학년도 정부재정지원 제한대학 관련 안내
 
성공회대학교의 공지사항에서 옮깁니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http://ch.yes24.com/Article/View/22552?pid=130405

오늘날 고전문학은 현대인들이 다시 배우고 알아야 할 지혜가 담겨있다고 하지만 사실, <열하일기>나 <동의보감>을 처음부터 끝까지 실제로 읽어 본 사람 드물 듯 한데요. 고전읽기를 시도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가장 해 볼만한 일은 지성을 통해서 세계와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공부고, 수행이고, 구도이자 진리에 대한 열정이죠.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어요. 먹고 살기 힘들고, 가족을 부양한다고들 했죠. 하지만 지금은 이유가 점점 없어지는 시대가 아닐까요. 어쩌면 전 인류에게 남은 유일한 길은 진리의 구도자가 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것 말고는 차이를 만들어 낼 수가 없거든요.

오히려 전 요즘 부자들이 안됐어요. 어떻게 자기를 표현해야 되죠? 어떻게 해야 이 가난한 사람과 달라져요? 요즘에 달라지는 건 감옥에 가는 거 말고는 없을 것 같은데요(웃음).

부자들이 차별화했던 그 화려한 것이 스마트폰에 다 들어가 버렸잖아요. 그러면 이제 남은 건 진짜로 나만의 고유한 인생을 사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다산과 연암은 학문과 지성을 통해서 자기 인생을 구원한 인물들이에요. 그들 역시 자기 운명의 코스를 바꾸지는 못했어요. 유배지에 가는 걸 막을 수 없었죠. 사람들은 운명을 개척하는 걸 길흉을 바꾸는 거라고 착각해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요. 다산이 유배를 가지 않으려면 주변 인간의 삶이 다 바뀌었어야 했어요. 그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걸 통달한 사람도 자신에게 오는 인연은 단 하나도 막을 수 없어요. 다만 그걸 어떻게 다른 사람과 다르게 받아들이고 활용하느냐에 달린 거죠. 유배 생활 18년을 현명하게 사용한 것이 다산을 만든 거예요. 누군가는 분통이 터져 죽고 누군가는 사약을 받고 누군가는 폐인이 됐어요.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이때 비로소 학자로 거듭났어요.

연암 역시 그 무엇도 평생의 가난함을 바꿀 수 없었어요. 하지만 연암 자신은 그 가난을 수행의 장으로 삼았죠. 당시에는 모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됐어요. 누구도 불가능하지 않죠. 이제 한 개인이 자신의 삶에 고유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여부는 스스로가 얼마나 진리를 열망하는가에 달렸어요.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삶 속의 여섯가지 착각(錯覺)
 
 
 
- 사치(奢侈)한 生活을 하면서 幸福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 사람을 속이면서 자신의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 탐욕(貧慾)이 발동하여 치부(致富)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수완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 소심(小心)한 성격 탓에 만사를 소극적으로 대하면서 자기가 신중파(愼重派)나 숙고파(熟考派)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 늘 다른 사람과 하찮은 일을 가지고 툭하면 싸우면서 마치 자신의 행동을 용감한 처세(處世)를 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 상급자가 아랫사람을 쓸데없이 나무라는 것으로 마치 자신의 위엄(威嚴)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이상 여섯 가지 ...착각은 중국 청나라 말 김난생(金蘭生)의 격언연벽(格言聯壁)에 있는 '六錯(여섯 가지 착각)'에 나오는 글이다.
 
 
그러나 현대의 삶속에는 또 다른 여섯 가지가 있다.

- 육체적인 쾌락을 즐기면서 인권(人權)으로 착각하고,
 
- 타락한 삶을 살면서 문화(文化)라고 착각하고
 
- 유행에 민감하고 따라하는 것을 진보(進步로 착각하고
 
- 도덕적인 삶을 보고 반동(反動)으로 착각하며
 
- 자신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것을 정의(正義)라고 착각하고
 
- 폭리와 부당이익을 챙기면서 시장경제원리(市場經濟原理)로 착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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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 신경회로는 착각의 거미줄...

착각을 벗어나 정각(正覺)으로 살고 싶지만...

이 욕망 또한 착각일지도...
 
 
제 생각에...

"영혼은 양심이고, 신앙은 식별입니다.
 
은총 안에서 사랑과 진리를 배우는 일이 인생입니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스크랩] 도올 - 한국전쟁, 동아시아 30년 전쟁

http://blog.daum.net/ssqkth/12606534

 

상식을 토대로 부분과 전체를 아울러 살필 수 있는 지혜...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런 생각으로 소통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멀쩡한 아이들을 "닭대가리" 로 만들려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현재 정치경제문화의 기득권을 가진 권력자들의 음모라고 봅니다.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옮김] 영혼

옮긴글 2013.06.14 14:18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2474&gubun=01


현행 가톨릭 교리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트리엔트 공의회 ≪로마 가톨릭 교리서≫(우리나라에서는 ≪천주교 요리문담≫)에 따르며, “사람은 영혼과 육신이 결합한 자니라”라고 되어 있고, 현행 ≪가톨릭 교리서≫에도 “하느님은 육체와 영혼으로 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으며 그리고 “영혼은 죽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이부(二部)구조적인 인간관은 창세기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론에 근거를 두는 것이지만 이 교리가 형성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우선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 철학에서는 영혼을 인간생활의 원칙으로 보았는데 플라톤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영혼자체가 삼부(三部)구조로 되어 있어서 감각적인 욕정의 원리인 탐욕혼이 복부에 자리 잡고 있고, 용기와 정기의 원리인 기혼(氣魂)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생각의 원리인 지혼(知魂)이 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지혼은 불멸의 신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자연철학적인 원리인 질료형상론(質料形相論, Hylemorphism)으로 설명한다. 모든 사물의 구조원리가 그렇듯이 모든 생물의 구성원리는 원질(原質) 혹은 질료와 체형(體形) 혹은 형상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모든 생명체의 체형 또는 형상이 혼이다. 따라서 식물에게는 생혼(生魂)이 있고, 동물에게는 각혼(覺魂)이 있으며 이 각혼은 생혼의 기능을 동시에 한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혼(知魂)이 있는데, 지혼은 생혼, 각혼의 기능을 동시에 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은 중세기를 거치는 동안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로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정립하는 데 초석이 되었다.

사도 바울로도 심령과 영혼과 육신의 삼부구조적인 인간관을 데살로니카인들에게 가르쳤다(1데살 5:23). 그러나 그의 용어에서 심령(spiritus)은 영혼의 자연적인 생활과 대조적으로 초자연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혼과 육신의 자연적인 생명에 성령의 영을 받은 심령을 역설하는 종교적인 인간관을 설파한 것으로 보인다. 성서적인 인간관을 학문화하는 과정에서 초대 교부(敎父)들은 이교도들의 유물론적 범신론적 또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가미하여 구구한 학설이 나왔다. 테르툴리아노(Tertullianus)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들어 영혼의 육체성을 주장하였고, 성 이레네오(St. Irenaeus)도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리제네스(Origenes)는 플라톤 학파의 영향을 받아 영혼의 전생설을 지지하고 전생의 죄 때문에 영혼이 육체 속에 갇히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잡다한 교부들의 설은 니체아 공의회 뒤 거의 없어지고, 니사의 그레고리오와 성 아우고, 네메시우스(Nemesius, 4세기)와 증거자 성 막시모(St. Maximus Confessor, 6세기)에 이르러 이미 중세 스콜라 철학적인 영육의 이부구조적인 인간관이 형성되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의 자연철학을 따르면서 인간혼은 개성을 가진 영체로서 육신의 체형 또는 형상이 된다고 정의하였다. 영혼은 죽은 뒤에라도 육신과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하나 살아있는 동안은 육신과 합하여 완전 일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영혼은 그 자체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육체와 합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이 점에서 영혼 자체는 순수 영체로서 불사불멸하지만 천사와는 다르다. 영혼이 어떻게 생겨서 육체와 결합하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으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창조설로 낙착되었다.

   ① 전승설(傳承說, traducianism) : 니사의 그레고리오(4세기), 테르툴리아노(2∼3세기) 등 초대 교부들이 주장했던 설로서 부모의 생식행위 때 부모의 영혼이 유전적으로 전승된다는 주장이다. 이 설은 원죄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장한 것으로 아우구스티노는 이것을 영적으로 해석하였다. 교황 아나스타시오 2세(재위 : 496∼498)는 이 설을 오류로 단정하였다. 이 설은 19세기에 로즈미니(Rosmini-Serbati)를 위주로 하는 몇몇 신학자들이 다시 주장하면서 인간혼은 부모들이 아기를 낳을 때에 감각적 영혼으로 만들어졌다가 하느님의 빛을 받아 영적인 영혼으로 변화한다고 주장하였다.

   ② 생식설(generatianism) : 이 설은 전승설의 완화된 주장으로 “육신이 육신을 낳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혼은 영혼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니사의 그레고리오, 마카리우스(Macarius, 4세기), 루피누스(T. Rufinus, 345?∼410), 네메시우스 등이 이 설을 주장하였고, 19세기 로즈미니의 전승설과 함께 또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인간의 영혼은 하느님의 부분이 아니고 무에서 부터의 창조물이다”라고 선언한 성 레오 9세 교황(재위 : 1049∼1054)의 선언(Denzi. 348)을 지지하는 교회의 교리에 위배되는 오류로 인정되고 있다.

   ③ 유출설(emanatism) : 신플라톤 학파 특히 알렉산드라아 학파에서 부르짖은 학설로서 플로티누스(Plotinus, 205?∼270)가 주창자이다. 이 설에 따르면, 만물은 절대자인 일자(一者, One)에서 나왔는데 첫 유출물은 정신(Nous)이며 정신에서 세계혼이 유출되며 세계혼은 물질화하려는 경향에 따라 각개의 영혼을 유출시켜 모든 사물의 형상을 이룬다.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이 설은 뒤에 프로클루스(Proclus, 410?∼485), 가(假) 디오니시오 등 신플라톤 학파의 교부들이 그리스도교화 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에서 오류로 판정되었다(I. De Deo rerum omnium creatore, can. iv).

   ④ 진화론 : 진화론은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의 모든 것은 하등동물에서의 진하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설은 가설로서 교회는 단지 인간혼은 하느님이 창조하셨다는 것과 영혼이 물질에서 나올 수 없다는 것과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이다(비오 12세 교황의 Humani generis 1950). 그러므로 하느님이 원초적인 생물체에서 인간생물체로 진하 발달하도록 안배하여 창조했을지 모른다는 종교적인 진화론은 가톨릭 신앙과 위배되지는 않는다.

   ⑤ 창조설(creationism) : 교회의 정통사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설로서 인간의 육신과 영혼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은 창세기를 기반으로 한 교리이지만 각 사람이 태어날 때 그 영혼이 어떻게 생겨나느냐 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어 왔다. 이에 대하여 락탄시오(Lactantius), 암브로시오(Ambrosius), 예로니모(Hieronymus) 등 교부들의 주장을 종합하여 롬바르도(Petrus Lombardus, 1100?∼1160)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각 사람의 영혼은 육체에 부여되어 창조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설을 지지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으로 철학적인 설명을 하였다. 즉 영혼은 육체의 체형이며 육체와 함께 인간개성의 실체를 이룬다. 육신과 영혼은 일체를 이루는 공동구성 원리이기는 하지만, 영혼은 영체이기 때문에 육체를 떠나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다[죽음]. 그러나 영혼은 어디까지나 자기 육체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것이 천사와 다르다. 아퀴나스의 인간관은 스콜라 학파의 일관된 주장이며 교회는 이 설을 정설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白敏寬)

   [참고문헌] A. Pegis, St. Thomas and the Unity of Man, in J. McWilliams, ed., Progress in Philosophy, pp.153-173, 1955 / Centre Catholique des intellectuels francais, L'ame et le corps, 1961 / C. Tresmontant, La Metaphysique du Christianisme, 1961 / R. Rahner, Theological Investigations, IV, 1966.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

 

 

                  교회는 목욕탕이다

 

교회를 한마디로 비유하라면 목욕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목욕탕은 우리의 더러움을 씻는 곳이요 피로를 푸는 곳입니다. 어느 설문조사는 군인들이 외출 시에 가장 하고 싶은 일 세 가지가 자장면 먹는 것, 이발하는 것, 그리고 목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목욕탕에서 우리는 편안함과 자유함을 누리고 또한 깨끗함까지 얻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옷을 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어야 몸을 물에 담글 수 있고 때를 벗길 수도 있는 것이지요.


옷을 벗으면 흉터나 점, 문신 또는 왜소한 부위 등 우리 몸의 모든 부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목욕탕에서는 옷을 벗어야 편안합니다. 만일 욕탕 안에서 옷을 입고 있다면 그보다 불편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물이 옷에 젖을까봐 행동은 얼마나 불편할 것이며, 물이 옷에 닿았을 때의 느낌은 또 얼마나 나쁘겠습니까?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생수로 목욕하는 곳입니다. 우리 영혼의 때를 벗기기 위해서는 위선과 가식과 허세의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옷을 벗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옷 벗은 다른 사람을 놀리는 사람들, 자신은 벗지 않고 다른 사람의 벗은 몸을 흉잡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도 불편하고 다른 사람도 옷을 못 벗게 방해하므로 모든 사람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자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합니다. 교회에 모인 사람은 모두 아픈 곳이 있거나 수치스런 죄를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죄를 고백하거나 상처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자신의 성공을 자랑하려 하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목욕탕에서 옷을 입은 사람과 같습니다. 목욕탕에서 옷 입고 있는 것이 불편하듯, 그런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할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에서는 가식과 허세의 옷을 벗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안에서 우리는 회복과 치유,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한없는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우리는 예수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 생활과 묵상 1권 (성공회영성센터)  112-113쪽 에서

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