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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과 소신

평화의 섬 오키나와 방문 소감

오키나와 주간 안내책자

주민 약 150명이 피신해 있다가 집단자결한 동굴

일본군인들이 집단자결한 참호

 

눈부시게 아름다운 오키나와 해변

전쟁당시 상황을 증언하시는 주민

경청하는 참가자들

이 아름다운 해변은 전쟁 당시 포탄으로 파괴된 바위 사이로 오키나와 여인들이 집단투신하던 곳이었다.

평화의 탑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이 함께 지내던 동굴을 재현

한국인 참가자들이 타니 주교님과 함께

한국인 위령탑 공원. 박정희대통령 시절에 마련되었다.

한국인 위령탑. 노산 이은상의 추모글이 적혀있다.

한국인 희생자들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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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섬 오키나와 방문소감

평화의 섬, 아름다운 풍광의 오키나와에 다녀왔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에서 발생한 아픔의 역사를 돌아보고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문제점을 이해하기 위하여 일본성공회 정의평화위원회와 오키나와 교구가 공동주관하는 “오키나와 주간”연례행사에 초청을 받아 관구산하 김현호신부(TOPIK 담당), 이윤호(부산교구 교무국장)신부, 이선덕(한일협동위원)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타니 주교님을 비롯한 일본성공회 분들과 선교사로 파송된 강용구, 고영돈 신부님의 환대를 받은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내내 마음이 무거운 여행이기도 했습니다. 평화의 중요성을 되새기는 오키나와는 그만큼 참혹한 전쟁의 섬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전쟁 기지(基地)의 섬이기 때문입니다.

'경계(境界)의 섬'으로 불리는 오키나와는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고통스런 역사를 지내왔습니다. 본디 '류큐(琉球)'라는 독립왕국이었으나 1609년 일본에 정복을 당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79년 완전히 일본 영토로 편입됩니다. 2차 대전 말기에 일본 군부와 천황은 오키나와를 본토 방위와 천황제 체제 보존을 위한 방패막이로 삼고 일종의 사석(捨石)으로 활용합니다. 그리하여 일본 영토에서 유일하게 미군과의 지상전이 벌어진 곳이 되었고 전 주민이 전쟁에 동원되어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들이 발생합니다. 특히 일본군에 의해 이뤄진 학살과 '집단자결(集團自決)' 등으로 미군에 의한 것보다도 더 많은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게다가 천황은 연합군에게 항복한 뒤 맥아더에게 오키나와를 군사 점령해 일본을 방위해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다시 한번 오키나와를 버립니다. 일본은 오키나와에 대한 미군의 계속적인 점령을 용인한 대가로 경제적 번영의 길을 걷습니다. 반면 오키나와인들은 표현과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이 제약되고 토지를 강제수용당하는 등 재산권 행사를 빼앗겼습니다. 또 항공기 소음과 추락사고에 따른 피해와 미군의 성폭행을 필두로 한 인권문제 등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1972년 5월15일 오키나와는 일본으로 반환됐지만 오키나와의 군사기지화는 여전히 계속됩니다. 제국(帝國)으로서의 일본과 미국의 군사력과 군사정책이 오키나와의 운명을 희롱해오고 있는 현실입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오키나와의 아픔에 공감하고, 또한 오키나와의 역사와 현실이 실상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 특별히 한반도와 대한민국의 현실과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공유하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더하여 그리스도교 신자요 사제인 저로서는 정치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두 가지 신학적인 인식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키나와의 현장을 둘러보며 깊이 든 생각은 “전쟁은 절대적인 악”이라는 인식입니다. 물론 전쟁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경험입니다. 우리나라도 “주적(主敵)”과의 전쟁의 가능성을 전제로 온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제 의식 안에도 상황에 따라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일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에서 싸우고 희생한 덕분에 오늘 우리나라의 자유와 번영이 가능했다는 것도 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절대악(絶對惡)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에 휩싸인 나라, 전쟁에 참가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사탄의 비참한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일단 벌어지면 누가 더 옳고 그르고, 누가 이기고 지는가, 누가 무엇을 더 얻고 잃는가는 상대적인 문제에 불과하게 됩니다. 죽이지 않으면 죽게 되는 전쟁터에서 죽이는 인간과 죽임을 당하는 인간 그 어느 편도 더 이상 본래적인 의미의 인간(人間)일 수 없습니다. 죽은 이는 물론 살아남은 이의 인간성(人間性)도 붕괴됩니다. 문명과 자연과 온갖 생명이 철저히 파괴되고 맙니다. 인류의 정신적 성장, 영적 진보의 마지막 과제는 전쟁의 극복입니다.

전쟁이 절대악(絶對惡)이라는 인식은 우리가 절대선(絶對善)이신 하느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주님의 평화!”는 가벼운 인사말이 아니라 인류의 가장 간절한 고백입니다. 하느님은 싸움에서 힘을 가지고 승리한 이들의 편이 아닙니다. 절대자 하느님은 인간세상의 상대적인 다툼에서 누구의 이익을 편들지 않습니다. 흔히 하느님이 내편이라는 식의, 또는 내가 신의 편이라는 식의 믿음은 일종의 착각일 뿐입니다. 구태여 말하면 하느님은 모두의 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땅에 평화를 이루고 지키려는 일들의 편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이들만이 하느님의 편입니다.

오키나와가 주는 또 하나 교훈은 덧없는 명분에 속지 않는 참된 지혜의 필요성입니다. 모든 전쟁은 명분의 싸움입니다. 누구도 스스로 쓸데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천황을 지키고, 자유를 지키고, 영토를 지키고, 국익을 위해서! 등등 온갖 명분이 내세워집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전쟁이 과연 최선의 해결책일까요? 지혜의 예수님은 이런 예를 드신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나갈 때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적을 만 명으로 당해 낼 수 있을지 먼저 앉아서 생각해 보지 않겠느냐? 만일 당해 낼 수 없다면 적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평을 청할 것이다. (루가 14:31-32)” 동양의 병법가 손자는 말하길 “최고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누군가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따져보아야 합니다. 과연 그런가, 정말 무슨 이유로 전쟁을 해야 하는가? 전쟁을 해서 누가 어떤 이익을 본다는 것인가? 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매우 상대적인 지혜이고 한계가 있는 판단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서 현실의 참된 이해관계를 알고 있는 것! 정치가들의 선동이나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 전쟁을 막기 위한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태도입니다.

적절한 군사력과 국민들의 화합과 일치가 뒷받침된 국가와 사회의 안보는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안보의 주된 내용은 역시 한판 붙어보자는 무모함이 아니라 전쟁을 미리 막고 상생공영 하자는 지혜로 채워져야 하리라 믿습니다. 오키나와와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2:14)”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바랍니다.(골로4:15) (임종호신부/서울주교좌성당보좌사제)
* 성공회신문 729호(2010.7.18)에 실린 기고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