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6일 연중9주일 (녹) 성서말씀
신명 11:18-21, 26-28
18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일러준 이 말을 너희의 마음에 간직하고 골수에 새겨두어라. 너희의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19 이것을 너희의 자손들에게 깨우쳐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20 또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 21 그리하여야 야훼께서 너희 선조들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땅 위에 펼쳐진 하늘이 오래가듯, 오래 지속될 것이다.
26 보아라. 오늘 내가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내놓는다.
27 내가 오늘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복종하여 복을 받겠느냐?
28 아니면 너희 하느님 야훼의 명령에 불복하여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에서 벗어나 알지도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저주를 받겠느냐?
시편 31:[1-5]19-24(성공회기도서)
○ 주여, 당신께 이 몸 피하오니, 다시는 욕보는 일 /없게/ 하소서. ‖ 바르게 판정하시는 하느님, 나를 구해 주소서.
○ 귀 기울여 들어 주시고, 나를 빨리 건져 주소서. ‖ 이 몸 피할 바위와 성채 되시어 나를 보호하소서. ○ 당신은 정녕 나의 바위, 나의 성채이시오니 ‖ 주, 그 이름의 힘으로 나를 이끌어 데려 가소서.
○ 당신은 나의 은신처시오니 ‖ 나를 잡으려고 숨긴 그물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 진실하신 하느님, 나의 주여, ‖ 이 영혼 당신 손에 맡기오니 건져 주소서.]
○ 당신께서 주시는 복이 어찌 이리 크십니까: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위하여 간직하신 복을 ‖ 당신을 의지하는 이들에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푸십니다.
○ 작당하여 달려드는 자들의 손으로부터 *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그들을 보호하시고, ○ 당신의 장막 속에 숨겨 * 말 많은 자들에게서 보살피십니다.
○ 성채가 포위되고 공격받는 중에서도 * 한결같은 사랑의 기적 베푸셨으니,
○ 주여, 찬미 받으소서. * 당신께서는 정녕 나의 기도 들어 주셨습니다.
○ 나 환난 중에서 ‘주님 눈 밖에 났구나’ 생각했으나 * 당신께 부르짖었을 때 내 기도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 믿음 깊은 자들아, 주님을 사랑하여라: 그를 믿는 자들은 지켜 주시지만 * 거만한 행실은 가차없이 벌하신다.
○ 주님을 바라는 너희 모두는 * 힘을 내어라, 용기를 내어라.
로마 1:16-17, 3:22하-28[29-31]
16 나는 그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까지 믿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17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22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주셨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24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25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는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제물로 내어주셔서 피를 흘리게 하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과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를 참고 눈감아주심으로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고 26 오늘날에 와서는 죄를 물으심으로써 당신의 정의를 나타내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르시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신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27 그러니 우리가 내세울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되찾게 되었습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28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만의 하느님이신 줄 압니까? 이방인의 하느님이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과연 이방인의 하느님도 되십니다.
30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셔서 할례를 받은 사람이나 받지 않은 사람이나 다 같이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해주십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내세운다고 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줄 아십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존중합니다.]
마태 7:21-29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22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25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26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29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사오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깨달아, 반석 같은 믿음으로 우리의 삶을 견고히 세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하늘나라에는 하느님자녀가 갑니다^^
바울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느님의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것에서 복음 설명을 시작합니다. 그 절대적 사랑을 굳게 신뢰하는 일이야말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살게 하는 능력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바울로 사도의 편지가 신약성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것들입니다. 나자렛 예수가 어떤 가르침을 펼치셨고 어떤 행적을 보이셨는가는 바울로 사도의 편지에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바울로의 관심사는 역사적인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 아닙니다. 부활하시어 그리스도로 높여지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의 구원을 주시는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죄와 율법의 이중적인 굴레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서 제시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세례와 성찬례로 그리스도의 죽음고 부활에 참여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인도하심을 받는 구원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복을 받는다는 것이 당시 유대인의 확신이요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은 이제 이방인들에게까지 미치고 그 사랑을 받아누리는 방법은 단순한 율법준수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능력에 대한 깊은 신뢰와 헌신과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기자는 바울로 사도보다 3-40년 후에 마태오복음을 기록하면서 바울로의 가르침에 대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종종 그런 경향이 발견되지만 바울로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자칫 신앙이란 예수님께 관한 특정한 구원교리를 시인하는 차원인 것처럼 오해하게 쉽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만나본 일도 없는 우리^^ 이방인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고 고백하는 일은 자칫하면 “예수 = 그리스도” 라는 도식에 대한 동의에서 시작하여 그 그리스도(구원자)가 가능하게 해주는 구원의 내용을 자기들 나름의 온갖 인간적, 종교적 필요 속에서 가져다 목록을 만들기 십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금 깨우쳐 줍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즉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누리는 일은 단순히 종교적인 추구의 결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인간은 다급하면 누구나 하느님을 찾기 마련이고, 또 필요하면 모두가 하느님께 원하는 것을 요청하고 응답을 경험합니다. 우리의 외적인 신앙생활은 실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아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알되 냉혹한 심판자가 아니라 우리의 자비하신 아버지로 아는 일입니다. 그 앎을 통해 우리는 죄의 종노릇을 하거나, 율법의 하수인 노릇을 그만두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깨닫고 살아가는 일이 “올바른 관계”, 곧 구원받은 삶입니다. 하늘나라는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 자녀”가 갑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온전히 되는 일입니다. 그것은 지식과 교리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영”으로 되는 일입니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영적인 지혜, 영적인 능력을 구하며 겸손히 정성스레 귀 기울이면 우리 모두 주님 말씀의 놀라운 권능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강론초록2>
고단하고 평범한 삶 가운데 우리 신앙이 드러납니다
은연중에 우리는 신앙생활이 특별한 지식(앎)의 문제인 것처럼 접근하기 쉽습니다. 성경을 알고, 교리를 알고, 교회 조직과 생활을 점차 알게 되면 믿음이 성장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식이 특정한 분야별로 전문화되듯이 종교도 그렇게 특별하게 구분되는 삶의 한 영역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일주일에 하루(정확히는 두세시간^^) 정도는 기꺼이 할애하되, 다른 급한 일이나 여가 생활이 있으면 양자택일하여 시간사용을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차원의 문화생활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절대로 그런 것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매 주일 빠짐없이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일성수를 일상생활과 분리된 종교적 의무로서 강요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성수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한 것입니다. 한 주간의 일상생활을 정리, 반성, 승화하고 감사와 기쁨과 소망으로 다음 한 주간을 준비하는, 마치 대나무 마디처럼 자연스런 것이어야 합니다. 주일성수를 비롯한 모든 신앙생활은 교회를 위한 종교행위가 아니라 우리 삶을 풍요롭고 드높게 하는 감사와 겸손과 사랑의 수행이어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예언과 축마와 기적이라는 대단한 종교적인 활동들이 도리어 신앙생활의 중심이 아닐 수 있음을 깨우쳐주십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진짜 알맹이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우리의 삶, 곧 희노애락과 생노병사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을 통해서 드러나기 보다는 우리 내면과 우리 일상생활에서 그 열매로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날 시퍼런 작두 위에 올라가는 신기한 일이 아니고 족집게처럼 점치는 능력도 아닙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와 같은 우리 내면의 인격의 성숙을 드러내는 성품들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내 가족이 병들었을 때 내가 어떻게 기도하는가, 내가 실패하고 좌절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하느님을 여전히 의지하는가, 정말 약하고 가난하고 늙어가며 우울하고 슬프고 답답할 때 그 때 나의 믿음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들은 우리가 머리로 ‘이런 교훈이 있구나’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네 삶과 죽음을 송두리째 주님께 맡기고 따르는 일입니다. 시련의 바람, 죽음의 큰물도 어쩌지 못하는 반석 같은 믿음 위에 우리 일생을 세우는 일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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