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3일 사순 1주일 성서말씀 (예루살렘의 키릴주교 증거자 386년)
창세 2:15-17, 3:1-7
15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을 데려다가 에덴에 있는 이 동산을 돌보게 하시며 16 이렇게 이르셨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17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마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1 야훼 하느님께서 만드신 들짐승 가운데 제일 간교한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이 너희더러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하나도 따먹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되, 3 죽지 않으려거든 이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를 꾀었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 5 그 나무 열매를 따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 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과연 먹음직하고 보기에 탐스러울 뿐더러 사람을 영리하게 해줄 것 같아서, 그 열매를 따먹고 같이 사는 남편에게도 따주었다. 남편도 받아먹었다. 7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앞을 가렸다.
시편 32
1 복되어라, 거역한 죄 용서|받-|고 ∥ 죄의 허물 벗|겨진|이-|여,
2 복되어라, 주께서 잘못을 묻지 아니 |하시|고 ∥ 그 마음에 거짓이 |없는|이-|여.
3 나, 주님께 아뢰지 않으려 |했더|니 ∥ 온종일 신음 속에 뼈만 |녹아|나-|고
4 밤낮으로 당신 손이 나를 짓누|르시|니 ∥ 이 몸은 여름 가뭄에 풀 시들듯 진액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5 그리하여 당신께 내 죄를 고백|하-|고 ∥ 내 잘못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 “주여, 내 죄를 고백합니다”하고 아뢰|었더|니, ∥ 내 잘못 내 죄를 용서 |하셨|습니|다.
6 당신을 굳게 믿는 자 어려운 |때-|에 ∥ 당신께 기도 |하리|이-|다.
# 고난이 물결처럼 밀어 |닥쳐|도, ∥ 그에게는 미치지 |못 하|리이|다.
7 당신은 나의 은신처, 내가 곤경에 빠졌을 때 건져 |주시|어 ∥ 구원의 노래 속에 묻히게 |하셨|습니|다.
8 나는 너를 가르쳐 네 갈 길을 배우게 |하-|고 ∥ 너를 눈여겨보며 이끌어 |주시|리-|라.
9 부디 철없는 말이나 노새처럼 되|지 마|라. ∥ 재갈이나 굴레라야 그들을 |휘어|잡는|다.
10 악인들에게는 고통도 많|겠으|나 ∥ 주님을 믿는 이는 한결같은 사랑 속에 |싸이|리-|라.
11 의인들아, 기뻐하여라. 주님께 감사하며 즐거워|하여|라. ∥ 마음이 바른 사람들아, 모두 |기뻐|뛰어|라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로마 5:12-19
12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율법을 주시기 전에도 죄는 세상에 있었습니다. 다만 율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가 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14 그러나 죽음은 아담으로부터 모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을 지배하였는데 아담이 지은 것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그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원형이었습니다.
15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16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과 아담의 죄는 그 효과에 있어서 서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아담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의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은총의 경우에는 죄지은 많은 사람이 은총을 거저 입어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7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거저 얻은 사람들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노릇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큽니까!
18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 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마태 4:1-11
1 그 뒤에 예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고 나서 몹시 시장하셨을 때에 3 유혹하는 자가 와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께서는 "성서에 '1)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하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1)칠십인역 신명 8:3.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거룩한 도시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성서에, '2)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 하고 말하였다. 2)시편 91:11-12.
7 예수께서는 "'3)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도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3)칠십인역 신명 6:16.
8 악마는 다시 아주 높은 산으로 예수를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며 9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러자 예수께서는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4)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대답하셨다. 4)신명 6:13.
11 마침내 악마는 물러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들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금식하시며 유혹을 이기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도 기도와 절제로 육신의 욕망을 이기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며 영원토록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시험의 본질”- 구원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마태 4:1-11)
신앙생활이란 살아있는 인간이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죄는 그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 살아가는 일이고 그런 상태의 삶은 결국 참된 삶의 경험 없이 허망한 죽음으로 소멸될 뿐입니다. 절대자 하느님의 절대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인간의 삶이란 안개와 같은 것이지요.
구원은 그 관계가 회복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일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켜서 성령의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과 생각과 느낌과 의지를 소통하는 지극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은 이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구원입니다. 의심없이 믿고 담대히 기뻐할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구원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은 우리 머릿속 관념이 아니라 우리 일생의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의 교우들에게 말합니다.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필립2:12)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며 우리는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의 유혹의 본질을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 유혹은 신앙의 유혹(시험)인데 이는 하느님을 전혀 모를 때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개 유혹이란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비신앙 사이에서의 택일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갖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급하면 부르짖는 것이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을 통하여 평범한 삶을 일생토록 살아가는 일입니다.
신앙을 가지면서 우리는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가 마술적으로 해결되어 곧바로 구원과 생명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구체적인 삶의 과제를 손쉬운 신앙적 설명으로 대치해버리고 싶은 유혹입니다.
물론 은총으로 믿음을 통하여 구원은 즉각적으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구원은 우리 삶의 고통스런 현실들이 증발해버리고 만사 오케이의 현실만 남는다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도리어 구원은 엄연한 우리 삶의 고통을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능력으로 살아내는 일이 됩니다. 황당한 일이지만 “이미 구원 받았으므로 더 살아서 구원이 훼손되기 전에 빨리 삶을 포기하고 천국에 가기위해 자살을 하자”는 어리석은 이들이 실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받는 시험의 본질은 바로 구원에 대한 환상적인 이해입니다. 신앙적인 유혹이란 자기의 욕망과 성공을 위해서 하느님을 내세우고 하느님을 좌지우지하는 신통력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오늘 이 땅의 교회들과 신자들을 보십시오. 과연 이 유혹을 이기고 있습니까?
이 시험을 이기는 길은 평범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길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길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길 밖에 달리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순절은 다시 한번 말씀과 기도생활로 깊이 되돌아가는 시기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어내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을 통하여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을 일생 살아내는 일이 곧 십자가의 길이고 부활의 길입니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필립 2:12-13) ✠
<강론초록 2>
“유혹의 본질”- 하느님을 적절히 이용하고 무시하기 (마태 4:1-11)
구원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화해,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면 죄의 본질은 “하느님과의 불화, 곧 하느님과의 그릇된 관계”일 것입니다. 죄란 자기 자신을 절대적인 존재로 삼고자 하여 자연과 다른 사람과 마침내는 하느님마저도 자기의 욕망과 통제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태도입니다.
창세기가 들려주는 타락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죄의 본질을 밝혀줍니다. 모든 것이 충분히 아름답고 넉넉하게 허락되었으되 다만 한 가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는 따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 금지는 그 열매가 귀하고 아까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피조물로서 자신의 욕망과 판단대로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하느님과 자연과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로는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대비되는 예수님의 완전한 순종을 강조합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예수님은 철저한 순종을 통해서 인간의 참된 삶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하느님 성부께 의탁한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모든 인류에게 무한정 베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기적인 동기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비참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진정 자유롭고 풍요롭게 함을 믿는 것입니다.
구원은 겉치레의 신앙생활로서 보장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깊은 동기가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진정 이기적인 동기를 포기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재물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은 매우 신심이 깊은 태도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전히 죄에 물든 태도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유혹은 바로 이 동기에 대한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이란 결국 “하느님을 적절히 이용하고, 결정적일 때는 무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하느님은 우리에게 이용되거나 무시될 분이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의 순종을 받으시고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연약하고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우리들도 우리 삶 가운데 40일 광야 같은 고통의 순간들 마다 주님의 이 명쾌한 대답을 택하고 따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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