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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10월 2일 (연중 27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10월 2일 연중 27주일 성서말씀 / 상주성당 축성 /노인의 날
 
이사 5:1-7

1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2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포도가 웬 말인가?
3 예루살렘 시민들아! 유다 백성들아! 이제 나와 포도밭 사이를 판가름하여라.
4 내가 포도밭을 위하여 무슨 일을 더 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해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는가?
5 이제 내가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너희에게 알리리라. 울타리를 걷어 짐승들에게 뜯기게 하고 담을 허물어 마구 짓밟히게 하리라.
6 망그러진 채 그대로 내버려두리라. 순을 치지도 아니하고 김을 매지도 않아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덮이게 하리라. 구름에게 비를 내리지 말라고 명하리라.
7 만군의 야훼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가문이요,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무는 유다 백성이다. 공평을 기대하셨는데 유혈이 웬 말이며 정의를 기대하셨는데 아우성이 웬 말인가?

시편 80:7-15

7 만군의 하느님, 우리를 다시 일으|키소|서. ∥ 당신의 밝은 얼굴 보여 주시면, 우리가 살아 |나리|이-|다.
8 에집트에서 뺏어 온 포도|나-|무, ∥ 이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에 |심으|시-|고,
9 그 앞의 땅을 가|꾸시|어 ∥ 뿌리박고 널리 퍼지게 |하셨|습니|다.
10 산들이 그 그늘에 |덮이|고 ∥ 울창한 송백 숲도 그 덩굴에 |가려|있으|며
11 그 가지는 바다에까지 |뻗었|고 ∥ 햇순은 강가까지 |미쳤|습니|다.
12 그런데 어찌하여 그 울타리를 부|수시|어 ∥ 지나는 사람마다, 그 열매를 따먹게 |하시|옵니|까?
13 멧돼지들이 나와서 휩쓸게 |하시|며 ∥ 들짐승들이 먹어 치우게 |하시|옵니|까?
14 만군의 주, 다시 한번 돌이키시어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 이 포도나무를 |지켜|주소|서.
15 손수 심으신 이 |줄-|기, ∥ 몸소 굳건히 세우신 이 햇가지를 |붙드|소-|서.
필립 3:4하-14
4하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 5 나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에서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 사람 중의 히브리 사람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파 사람이며 6 열성으로 말하면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7 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8 그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해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10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와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11 그러다가 마침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12 나는 이 희망을 이미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또 이미 완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달음질칠 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붙드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13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고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면서 14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그것이 나의 목표이며 내가 바라는 상입니다.

마태 21:33-46

33 "또 다른 비유를 들겠다. 어떤 지주가 포도원을 하나 만들고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큰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는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34 포도 철이 되자 그는 그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하나는 때려주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쳐죽였다. 36 지주는 더 많은 종들을 다시 보냈다. 소작인들은 이번에도 그들에게 똑같은 짓을 했다. 37 주인은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알아보겠지.' 하며 자기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아들을 보자 '저자는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이고 그가 차지할 이 포도원을 우리가 가로채자.' 하면서 서로 짜고는 39 그를 잡아 포도원 밖으로 끌어내어 죽였다. 40 그렇게 했으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오면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제때에 도조를 바칠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한 말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 43 잘 들어라. 너희는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길 것이며 도조를 잘 내는 백성들이 그 나라를 차지할 것이다.
44 (그리고 그 돌 위에 떨어지는 사람은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그 돌 밑에 깔리는 사람은 가루가 되고 말 것이다.")
45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46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서 손을 대지 못하였다.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께서는 하늘의 집을 위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어 하느님의 성전을 이루는 산돌로 쓰임 받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감사와 찬양의 도조(賭租)를 바치는 인생 (마태 21:33-46)

오늘 복음서의 맥락을 살펴보자면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정화사건을 통하여 유대의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으시면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있는 시점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훗날 성령강림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재확인하고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깊이 깨달은 연후에는 예수님의 그 모든 구원사역이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해석은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을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께서 모든 일을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행하는 연극배우처럼 행동하신 것으로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실제로 직면하신 상황은 훨씬 구체적이고 긴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서 짜여진 각본을 따라서가 아니라 매우 자유롭고 지혜로운 판단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추상적인 조건이 아니라 실제 힘을 가진 인간들의 선입견과 정죄와 판단과 한계라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시고 행하셨습니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소유욕을 넘어선 유순한 이미지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권위를 성전제사와 율법준수라는 제도를 통해서 직접 행사하는  막강한 권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홀홀단신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의식 하나로 도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승리”를 알고 있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갈릴리 출신 사나이의 무모하고 가소로운 도전임이 분명합니다.

오늘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포도원에, 하느님을 포도원주인으로,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포도원소작인들로, 주인의 종들을 예언자들로, 주인의 아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제 때 도조를 바칠 새 소작인들을 예수님의 제자들로” 비유하여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제도화된 종교로서 주인을 배반하고 소작인들끼리 주인노릇하려는 포도원의 현실과 비슷합니다. 실상 우리 성공회를 포함하여 모든 제도화된 종교는 비슷한 위험을 예상해야 합니다. 누가 주인인가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일하고 얻은 것들이 주님께서 허락하여 가능한 것임을 기억하여 주님의 몫을 돌리고 바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잊어버린 이들, 나아가 주님께 반역하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깁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자면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흥, 뭔 소리냐, 그 따위 종교적 훈계를 알게 뭐냐, 나는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살 뿐이다. 얄팍한 위협으로 내 소유와 평안을 깨뜨리려는 거냐?” 이런 논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자연인, 즉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안쓰러운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오늘 비유말씀의 “도조(賭租)” 를 바치는 일이 “교회제도”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쁠 것 없어 보이는 이 경우에도 심각한 문제가 종종 생깁니다. 나쁜 지도자들이 그들의 선의를 악용하여 교회를 신자들의 이익집단처럼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들의 도조는 “바치는 만큼 받으리라”는 기대로 드리는 뇌물에 가깝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자기의 복을 구하는 동기로 합니다. 그런 사람을 성경은 신앙은 가졌지만 여전히 육적(肉的)인 신자라고 표현합니다.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참 좋은 경우는 하느님을 살아계신 사랑의 하느님으로,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로 깨닫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한 이들입니다. 그들의 도조는 이익을 탐하거나 징벌이 두려워 드리는 뇌물이 아니라, 선물로 주신 삶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답례입니다. 그들은 참된 도조가 자신들 소유의 일부가 아니라 실상 자신들의 삶 자체, 산 제물, 곧 주인과의 고마운 관계임을 잊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우리의 머리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지체로 삼아주신 신비체임을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부르신 하느님의 자녀들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며, 성령께서 임재한 각 사람으로서 하나로 모여 성령의 공동체를 이룹니다. 그들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랑의 삶에 만족하며, 합당한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도조를 잘 내는” 백성입니다. 성경은 이런 이들을 신자로서 영적(靈的)인 사람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참으로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일은 그 영적인 의미로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려 계획하신 일로 고백되지만, 실제 일어난 일로는 바로 신앙적으로 육적인 유대교 신자들이 자연인들의 동조를 얻어 저지른 일입니다. (1고린 2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바로 육적인 인간과 자연인의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구원은 당연히 우리가 영적인 인간으로 거듭나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일을 가능케 하신 일이 바로 부활사건이고 성령강림의 사건이고 우리 신앙의 사건입니다. 십자가사건 -부활사건 -승천사건 -성령강림사건 -우리 신앙 -세례와 성찬례는 하나로 연결된 구원사건입니다.

우리는 감사와 찬양의 도조를 제 때 바치는 영적인 신자들입니다. *

<강론초록2>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높은 곳으로 (마태 21:33-46 )

오늘 서신의 필립비서에서 바울로가 자신에 대해 구태여 언급하는 것은 오만과 자랑의 동기로 자기를 뽐내려는 뜻이 아니라, 겸손과 믿음으로 자기의 권위와 소명을 확인하고 보증하려는 의도로 보아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세속적인 것을 가지고 자랑하려 든다면 나에게는 자랑할 만한 것이 더 많습니다.(...)그러나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해물로 여겼습니다. (...)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같이 나누고 그리스도와 같이 죽는 것입니다.”
참으로 절절한 고백입니다.

연구에 따르면, 현대의 거의 모든 제도적 교회는 80%의 떠돌이신자와 20%의 성숙한 신자로 구성된다고 합니다. 그 20%의 신자가 열심히 생산한 교회 내의 봉사를 나머지 80%의 신자가 소비하는 구조를 갖고 있다지요.

20%의 신자가 세상의 기준을 버리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비해, 80%의 신자는 여전히 세상의 기준을 중심으로 살며 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으로 가지고 들어옵니다.
전통적인 사목은 그 80%의 떠돌이신자의 종교적 욕구(주로 현세 삶에서의 물질적 축복과 내세 영혼의 천당 보장)를 채워줌으로써 그들의 출석율을 높게 유지하고 헌금을 많이 거두는 것에 초점을 둡니다. 신자들을 참된 그리스도인, 성숙한 주님의 제자로 양육하는 것은 미루어지거나 포기됩니다.

그 결과는 큰 재앙이며 낭패입니다. 교회는 사회 속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지 못하여 있으나마나 한 존재가 되고, 신자들도 결국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실패하여 참된 구원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가 크고 작음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자로 이루어진 교회인가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어떤 신자입니까? 우리는 과연 80%의 떠돌이신자에 해당합니까, 20%의 성숙한 신자에 속합니까?
신앙생활의 오래된 햇수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로의 고백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부르셔서 높은 곳에 살게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높은 곳으로 이끄시는 주님만을 향해 가면서 자기 욕망과 집착을 기꺼이 포기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덕을 힘써 갖추려 합니까?
내 욕심대로 “하느님나라”를 통째로 가지려고, 예언자들과 예수님의 가르침마저 아랑곳 않는 욕심 많은 백성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랑의 삶에 만족하며, 합당한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도조를 잘 내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