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8월 21일 연중 21주일 감사성찬례 성서말씀
이사 51:1-6
이사 51:1-6
1 "나의 말을 들어라. 정의를 추구하고 야훼를 찾는 자들아. 너희를 떼어낸 바위를 우러러보고 너희를 파낸 동굴을 쳐다보아라. 2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우러러보고 너희를 낳아준 사라를 쳐다보아라. 내가 부를 때 그는 혼자였으나 나는 그에게 복을 내려 자손이 번성하게 하였다. 3 그렇다, 야훼가 시온을 불쌍하게 보고 다 허물어진 그 모습을 가엾게 여기리라. 그리하여 그 황무지를 에덴처럼 만들고 그 벌판을 야훼의 동산처럼 만들어 흥겨움과 즐거움이 넘치고 감사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지게 하리라.
4 뭇 백성들아, 똑바로 나를 쳐다보아라. 부족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훈계가 나에게서 나간다. 나의 법이 뭇 백성의 빛이 되리라.
5 내가 세울 정의가 홀연히 닥쳐오고 내가 베풀 구원이 빛처럼 쏟아져 오리라. 내가 팔을 휘둘러 뭇 백성을 재판하면, 바닷가 주민이 나에게 희망을 두고 나의 팔에 기대를 걸리라.
6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4 뭇 백성들아, 똑바로 나를 쳐다보아라. 부족들아, 내 말에 귀를 기울여라. 훈계가 나에게서 나간다. 나의 법이 뭇 백성의 빛이 되리라.
5 내가 세울 정의가 홀연히 닥쳐오고 내가 베풀 구원이 빛처럼 쏟아져 오리라. 내가 팔을 휘둘러 뭇 백성을 재판하면, 바닷가 주민이 나에게 희망을 두고 나의 팔에 기대를 걸리라.
6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라. 땅을 굽어보아라. 하늘은 연기처럼 스러지고, 땅은 옷처럼 해어져 주민이 하루살이처럼 꺼지리라. 그러나 내가 베풀 구원은 영원하고 내가 세울 정의는 넘어지지 않는다.
시편 138
1 주여, 내 마음 다하여 감사기도 /드립/니다. ‖ 당신을 모시고 서있는 이들 앞에서 당신을 /찬양/합니/다.
2 거룩한 당신의 궁전 향하여 /엎드/려 ‖ 인자함과 성실함을 /우러/르-/며
당신의 이름 받들어 감사기도 /드립/니다. ‖ 언약하신 그 말씀, 당신 명성보다 크게 /퍼졌/습니/다.
3 내가 부르짖을 때 당신은 /들어/ 주시고 ‖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4 주여, 당신의 언약 말씀을 듣고서 * 세상의 모든 왕들이 당신께 감사노래 부릅니다.
5 그들이 주께서 밟으신 길을 찬양하며 * “주 그 영광 크시다” 노래합니다.
6 주여, 당신은 높이 계셔도 낮은 사람 굽어보시고 * 멀리 계셔도 거만한 자 아십니다.
7 내가 고생길을 걸을 때에 이 몸 살려 주시며: 손을 드시어 살기 띤 원수들을 /치시/고
‖ 오른손으로 붙들어 이 몸 /구해/ 주십/니다.
8 주여, 모든 일 나를 위해 하심이오니: 이미 시작하신 일에서 손을 /떼지/ 마소서. ‖ 당신의 사랑 영원/하시/옵니/다.
로마 12:1-8
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하느님의 자비가 이토록 크시니 나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 2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도록 하십시오.
3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과대 평가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나누어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분수에 맞는 생각을 하십시오. 4 사람의 몸은 하나이지만 그 몸에는 여러 가지 지체가 있고 그 지체의 기능도 각각 다릅니다. 5 이와 같이 우리도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은 각각 다릅니다. 가령 그것이 예언이라면 자기 믿음의 정도에 따라서 써야 하고 7 그것이 봉사하는 일이라면 봉사하는 데 써야 하고 가르치는 일이라면 가르치는 데 써야 하고 8 격려하는 일이라면 격려하는 데 써야 합니다. 희사하는 사람은 순수한 마음으로 해야 하고 지도하는 사람은 열성을 다해서 해야 하며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태 16:13-20
13 예수께서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14 "어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15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6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17 예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18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0 그리고 나서 예수께서는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사도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 믿음의 반석으로 삼으셨나이다. 비옵나니,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보게 하시고, 거룩한 교회에서 귀중히 쓰임 받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계시를 고백에 담아 생명을 살자 (마태16:13-20)
계시를 고백에 담아 생명을 살자 (마태16:13-20)
“수명(壽命)을 살지 말고, 생명(生命)을 사십시오!” 수명은 아무리 길어도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때가 되면 황망히 결국 우리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사라져 감을 고통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생명(生命)은 우리의 생이 덧없이 흐르는 시간이 아니라, 순간순간 사랑의 완전함, 은총의 충만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음을 깨닫는 일입니다.
생명(生命)을 깨닫고 생명을 살려면? 우리는 절대의 하느님을 고백(告白)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生)이 우연하고 덧없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의 명(命)에 의해 지탱되는 소중한 기회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사는 일은 곧 우리의 고백을 사는 일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고백은 곧 우리 자신의 정체에 대한 확신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일은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경험하는 일이기에 계시(啓示)는 곧 고백(告白)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깊은 영혼에 그리고 인간들의 역사위에 결정적으로 보여주신 절정의 계시입니다.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정의, 곧 하느님의 임재와 하느님의 통치라는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그 계시가 베드로라는 한 제자의 입을 통해 고백되며 우리에게 믿음의 내용과 교회론의 근거로서 주어집니다.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구원에 대한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하여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백이 바로 교회의 토대입니다. 하느님의 계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다스림,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선교를 깨닫는 우리들이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지체가 됩니다. 우리의 삶이 바로 교회의 활동입니다. 저와 교우님들은 사도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을 “오늘의 삶”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 고백은 우리가 예수님을 삶으로 따르고 있음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느님 나라를 먼저 구하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죄와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 더 이상 남을 정죄하고 위선을 떨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개인의 깊은 내면의 욕망과 두려움을 벗어나는 일에서부터 이 땅위에 불의하고 어리석은 제도와 문화를 바로잡는 일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리라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저 수명에 연연하는 인생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과 사랑,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생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그 고백을 삶으로 사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깊은 내면의 욕망과 두려움을 벗어나는 일에서부터 이 땅위에 불의하고 어리석은 제도와 문화를 바로잡는 일까지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으로 모시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리라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저 수명에 연연하는 인생이 아니라, 충만한 기쁨과 사랑,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길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생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마음으로 고백하고 그 고백을 삶으로 사는 일인 것입니다.✠
<강론초록2>
베드로의 고백, 곧 우리의 고백 (마태16:13-20)
오늘 복음은 이른바 ‘베드로의 고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종교개혁 때에 로마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두고 주님께서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에 대한 상급으로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천국 문을 열고 닫는 권한을 주셨고, 로마 교황이 바로 이 베드로의 후계자이므로 로마교회만이 구원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들은 반석은 베드로라는 인물이 아니라 그가 고백한 믿음이므로 참 교회에는 믿음만이 중요할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 ‘베드로의 고백’에서 베드로라는 인물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고백의 내용이 중요할까요?
당연히 고백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을 야고보가 말했다면 필시 야고보의 고백이라고 전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베드로’였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을 텐데 베드로는 참 대단한 인물이어서...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잠시 후에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 이 고백에 대하여도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캐낸 신비한 정보가 아니고, 추론을 통해 갖게 된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라고 대답하며 예수라는 분의 인격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늘에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은 기적을 요구하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권세를 떨치는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머리로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수난하는 그리스도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상급을 받기에는 때 이른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주님을 따르며 삶으로 깨닫고 완성해야 할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으뜸제자 그 인물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의 대표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곧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은총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완전하게 그 의미를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그 고백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강론초록3>
당연히 고백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같은 내용을 야고보가 말했다면 필시 야고보의 고백이라고 전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베드로’였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같으면 어림도 없을 텐데 베드로는 참 대단한 인물이어서...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잠시 후에 베드로는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하고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 이 고백에 대하여도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 너는 복이 있다” 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 캐낸 신비한 정보가 아니고, 추론을 통해 갖게 된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라고 대답하며 예수라는 분의 인격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령을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으며 마침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믿음은 그 자체가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늘에 기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 사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은 기적을 요구하는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을 행하고 권세를 떨치는 그리스도를 기대하는 머리로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수난하는 그리스도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고백은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었고, 상급을 받기에는 때 이른 것이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주님을 따르며 삶으로 깨닫고 완성해야 할 고백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으뜸제자 그 인물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신앙인의 대표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곧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은총의 힘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완전하게 그 의미를 모두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우리는 그 고백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강론초록3>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태16:13-20)
믿음은 구원에 관해 더 정확한 정보를 골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정보차원에서의 “사실”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은 어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증으로 “입증”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대중들 사이에서 이러쿵저러쿵 전해지는 말을 통해 형성되는 “여론”으로써 판단될 문제도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가끔 특별한 방법으로 깨달은 하늘의 비밀을 “당신에게만 말해준다”는 식의 무슨 “천기누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전하는 성육신의 신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는 그런 정보차원의 사실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라는 “인격”과의 만남입니다. 그것은 생각(뜻)과 생각(뜻)의 만남이요, 가슴과 가슴의 만남이요, 우리 영과 성령과의 만남입니다. 그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알려주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늘 기도하시고 성령에 충분 충만하여 사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늘 일치해 계셨고 아버지의 그 사랑과 의로움으로 가슴이 불타셨습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순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믿음은 그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여서, 그 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삶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분의 사랑과 지혜에 의지하여 우리는 희노애락 가운데 생활인으로, 또한 기도하는 한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은 어쩌다 맞추게 된 퀴즈의 정답이 아닙니다. 우리 삶의 전부를 걸고 말하는 고백이요 증언일 때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내 머리로 추측하고 판단한 결론이 아닙니다. 나를 부르신 하느님이 내게 알려주신, 내 영혼에 새겨놓으신 확실한 체험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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