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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11월 4일 (연중 31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2년 11월 4일 (연중 31주일) 녹 성서말씀 / 강남성당 축성, 제주교회 설립

 

룻기 1:1-18

1 1)영웅들이 세상을 다스리던 시대에 나라에 기근이 든 일이 있었다. 그 때 유다 베들레헴에 살던 한 사람이 모압 시골에 가서 몸붙여 살려고 아내와 두 아들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1)천주교에서는 "판관", 개신교에서는 "사사"라고 불러 왔다.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며 아내는 나오미, 두 아들은 마흘론과 길룐이었는데, 그들은 유다 베들레헴 태생으로서 에브랏 집안 사람들이었다. 모압 시골에 가서 얼마 동안 지내다가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4 그 뒤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맞았는데 하나는 오르바요, 다른 하나는 룻이었다. 거기에서 십 년쯤 살다가,
5 마흘론과 길룐 두 사람도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나오미는 남편을 여읜데다 두 아들마저 잃고 말았다.
6 그 무렵 야훼께서 당신의 백성을 돌보시어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모압 시골에 들려왔다.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고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시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7 나오미는 두 며느리를 거느리고 살던 고장을 떠나 유다 지방을 향하여 길을 떠나가다가
8 두 며느리에게 이제 친정으로 돌아들 가라고 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죽은 내 아들들과 나에게 그토록 고맙게 해주었으니, 야훼께서도 그처럼 너희를 보살펴 주시기를 바란다.
9 너희 둘 다 새 남편을 맞아 보금자리를 꾸밀 수 있게 해주시겠지." 그리고는 두 며느리를 끌어안자 두 며느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10 말했다. "안 됩니다. 저희는 어머님을 모시고 어머님 겨레의 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
11 "너희는 돌아가야 한다, 얘들아. 어쩌자고 나를 따라가겠다고 하느냐?" 하며 나오미는 며느리들을 타일렀다. "내 태중에 너희 남편이 될 자식이라도 있는 줄 아느냐?
12 악아, 어서 돌아들 가거라. 나는 이렇게 늙어 이젠 재혼할 수도 없는 몸이다. 나에게 무슨 희망이 더 있겠느냐? 오늘 밤에라도 내가 남편을 맞아 자식을 낳는다 하자.
13 그것들이 자랄 때까지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느냐? 그걸 바라고 재혼도 하지 않고 어떻게 지낼 작정이냐? 악아, 그건 안 될 말이다. 제발 나를 더 괴롭히지 말아다오. 나는 이처럼 야훼께 얻어맞은 신세란다."
14 그들은 다시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껴안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서 자기 겨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15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제 겨레와 제 신에게 돌아가지 않았느냐? 그러니 너도 네 동서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저에게 어머님을 버려두고 혼자 돌아가라고 너무 성화하시지 마십시오." 하며 룻이 말했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겠으며,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제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
17 어머님이 눈 감으시는 곳에서 저도 눈을 감고 어머님 곁에 같이 묻히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안 됩니다. 죽음밖에는 아무도 저를 어머님에게서 떼어내지 못합니다."
18 이토록 끝내 따라 나서겠다고 버티자 나오미는 더 할 말이 없었다.

 

시편 146

1,2. 알렐루야! 내 마음 주님을 찬양하리라. 한평생 주님을 찬양하리라. ◯ 이 목숨 있는 동안 수금 타며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3.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마라. ◯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
4.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고 ◯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5. 복되어라, 야곱의 하느님께 도움 받을 사람! ◯ 자기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
6. 하느님은 하늘과 땅, 바다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 언제나 신의를 지키시고
7.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8. 주님은 묶인 자들을 풀어 주신다. ◯ 주님은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9.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신다. 주님은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나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주, 영원히 다스리시니 ◯ 시온아, 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알렐루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히브 9:11-14

11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존재하는 모든 좋은 것을 주관하시는 대사제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사제로 일하시는 성전은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창조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12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13 부정한 사람들에게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뿌려도 그 육체를 깨끗하게 하여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있다면
14 하물며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흠없는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는 데나 죽음의 행실을 버리게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겠습니까?

 

마르 12:28-34

28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 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첫째 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31 또 둘째 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32 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4 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본기도> 평화의 하느님, 이 세상을 사랑으로 다스리시며 구원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세상의 헛된 권력에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하느님의 정의와 진리를 지켜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사랑, 존재의 이유, 삶의 근거 (마르 12:28-34)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11:28)는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지요. 그런데 이 “무거운 짐”의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경제적인 생활고나 내적인 죄책감을 뜻하는 게 아니라, 당시에 사람들의 삶을 규정했던 “율법체계” 자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화목하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율법이 예수님 당시에는 도리어 사람들을 정죄하고 위협하고 저주하는 정반대의 기능을 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내용으로 강요되는 율법으로는 인격의 변화도, 사회의 변혁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예수님은 이른바 “사랑의 이중계명”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613가지 계명을 하나로 줄이면 “절대의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고 이 계명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이 보충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에 대해 두 계명이 결국은 하나라는, 즉 하느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난다는 해석도 있고, 약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해서 수직적인 하느님과의 절대관계가 먼저이고 수평적인 이웃과의 관계는 두 번째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모두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이 계명을 해석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이 계명을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계명은 쉽지 않고 어쩌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불완전한 우리가 어떻게 절대의 하느님을 사랑하며, 이기적인 우리가 어떻게 원수를 사랑합니까? 그렇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저는 은연중 사랑의 계명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밖에서 강요되는 부담스런 계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그에 따른 어떤 보상을 얻기 위해 꾹 참고 견디며 수행해야 할 과제가 아닙니다. 사랑의 계명은 나의 존재의 이유이고, 내 삶의 행복을 보장하는 근거입니다. 사랑의 계명은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당부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무슨 실체가 아니고 주체와 주체 간의 상호관계를 일컫는 것입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의 관계, 곧 사랑을 받는 대상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라”는 계명을 “사랑을 받으라”는 말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도 모든 것을 다해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포기하며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과 같은 뜻인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도 “너도 이웃을 통하여 그의 몸처럼 사랑받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뜻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자, 이렇게 읽어도 사랑이 부담스런 계명일까요? 이룰 수 없는 환상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을 초월하여 나타나고 동시에 인간의 사랑을 통하여 체험되는 현실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하는 존재의 이유이고 진정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는 근거인 것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습니다” 로 시작해서 “믿음과 희망 사랑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로 마무리 되는 사랑의 송가를 전합니다. 요한의 편지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사랑이 있는 곳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찬양합니다. 믿음 없는 인생이란 “(인간의) 사랑에 속고 (세상의) 돈에 울고”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의 인생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기쁘고,  (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