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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5월 13일 (부활 6주일) 성찬례 성서정과



2012년 5월 13일 (부활 6주일) 성서말씀

 

사도 10:44-48

4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동안에 성령이 모든 청중에게 내려오셨다. 45 신자가 된 유다인으로서 베드로와 함께 왔던 사람들은 성령의 은혜가 이방인들에게까지 내리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46 그것은 이방인들도 기이한 언어로 말하며 하느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베드로가 47 "이 사람들도 우리처럼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이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며 48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일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자기들과 함께 며칠 더 머물러달라고 간청하였다.

 

시편 98

1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여라: 놀라운 기적들을 이|루셨|다. ∥ 그의 오른손과 거룩하신 팔로 |승리|하셨|다.
2 주께서 그 거두신 승리를 알려 |주시|고 ∥ 당신의 정의를 만백성 앞에 드러내셨다
3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다던: 그 사랑과 그 진실을 잊지 않으셨|으므|로 ∥ 땅 끝까지 모든 사람이 우리 하느님의 승리를 |보게|되었|다.
4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을 |올려|라. ∥ 기뻐하며 목청껏 |노래|하여|라.
5 거문고를 뜯으며 주님께 노래 |불러|라. ∥ 수금과 많은 악기 타며 |찬양|하여|라.
6 우리의 임금님, 주님 |앞에|서 ∥ 은나팔 뿔나팔 불어대며 |환호|하여|라.
7 바다도 그 속에 가득한 |것들|도, ∥ 땅도 그 위에 사는 것들도, 모두 환|성을|올려|라.
8 물결은 손뼉을 치고 산들은 다 같이 환성을 |올려|라, ∥ 그가 세상을 다스리러 오시니, 주 앞에서 환|성을|올려|라.
9 온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시|고 ∥ 만백성을 공정하게 다|스리|시리|라.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요한 5:1-6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자녀를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4 하느님의 자녀는 누구나 다 세상을 이겨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5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6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셔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수난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이십니다. 그분은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뿐만 아니라 세례도 받으시고 수난의 피도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요한 15:9-17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11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13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14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15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다 알려주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17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본기도> 1) 사랑의 하느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택하시어 벗이라 불러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새 계명을 따라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썩지 않는 열매를 맺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2) 주 하느님, 모든 근심하는 이들의 참된 위로가 되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지치지 않는 용기와 주님의 때를 분별하는 지혜를 주시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뜻과 평화를 이루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주님의 벗이 되어 누리는 기쁨과 감사 (요한 15: 9-17)

인간의 구원(救援)이란 생각보다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구원에 대한 제일 흔한 설명은 우리가 죄에 물든 존재로서 죽은 후에 영혼이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받을 운명을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공로를 힘입어 용서받고 천국에 올라가 온갖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이야기는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은가 지혜로운가의 문제입니다) 유치한 수준인 것은 분명합니다.

 

성경을 찬찬히 읽어보면 역시 구원의 문제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깨어져 어긋난 관계가 회복되어 올바른 관계로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어떤 일들은 옳지 않다는 규정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어떤 일이 사랑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즉 믿음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죄가 단순히 어떤 금령을 어기는 일이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죄를 범하지 않게 되겠지요. 실제로 어떤 이들은 죄를 안 지어 천국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세상과 관계된 어떤 일 하지않고 모든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이상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착각입니다.

죄의 문제는 잘못이나 실수 자체가 촛점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계를 살아가는 가가 초점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란 우리가 완벽해져서 아무런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도리어 그런 기대나 노력이야말로 여전히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됩니다. 하느님처럼 완벽해지려는 것은 교만한 의도입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우리의 상대적인 한계를 절감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총을 받아들임으로 성립합니다. 우리는 죄를 짓고 그 죄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야 하고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구원은 없습니다. 그것은 곧 바로 우리는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서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진실을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형제자매요 자신의 벗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본성을 지니셨다는 표현을 예수님이 하느님처럼 완벽하신 능력을 지니셨다는 의미로 생각하곤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신적인 능력이 우리의 구원에 가장 중요했다면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이루시기 위해 오셨고 가르치셨고 일하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인간들에게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가르치시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하늘에서 성부와 성자가 이루셨던 일치의 신비 보다도 이 땅위에서 사람으로 사셨던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이루셨던 관계의 신비입니다.

 

첫 유혹부터 마지막 유혹까지 예수님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본분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첫 번째 기적부터 마지막 부활의 기적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당신을 통해 나타나도록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동안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했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에서 누리는 그 기쁨을 우리들도 누리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은 어떤 사업을 일으키고 사람을 조직하여 목적달성을 하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제자로 불러 그 올바른 관계를 경험하고 누리도록 이끄시는 일에 관심을 두셨습니다.

 

올바른 관계에 머무는 일이 곧 사랑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무슨 징계가 두려워 계율을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그 경청과 순종을 통해 주님과 점점 깊어지는 사귐을 갖는 수준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귐이야말로 우리를 성장시키고 성숙시킨다는 점입니다. 상과 벌을 의식하여 종처럼 일하는 데 머물면 일은 해낼지 몰라도 우리 자신의 변화와 성숙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주님은 어떤 일의 성취 자체에 관심을 두고 그 일을 위해 우리를 종으로 부리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벗으로 자라나기를 원하시기에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주님의 뜻을 기쁘게 순종하는 그런 벗으로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가 전하는 놀라운 구원의 소식입니다.

 

천국의 소식은 금은보화, 기화요초, 오곡백과가 풍성한 곳에서 슬픔 고통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어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다는 소식, 예수님이 우리를 벗으로 여겨주신다는 소식이 하늘나라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관심과 사역은  우리를 당신의 추종자로 만드셔서 당신의 교회사업에 우리를 이용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뿐입니다. 우리를 완전한 인간, 곧  조건없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인간으로 변화시켜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관계”란 말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바른 관계란 스스로를 변화시킬 마음이 없는 두 실체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거래관계가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도 하느님을 저멀리 두고 우리는 이곳에서 그 분의 마음에 들도록 무언가를 바치고 지키는 삶을 살아서 하느님께 복을 받고 구원을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와 우리 모두의 존재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되었고 하느님 안에서 지탱되며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깊은 사랑으로 연결되어있다는 것, 달리 표현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성장하고 성숙하여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란 상대의 사랑을 받고 상대를 사랑함으로써 내가 깊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때 붙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올바른 관계”의 본래 표현인 “하느님의 의(義)”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고 감시하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존재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눈길처럼 차별 없는 사랑으로 나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대해야 한다는 깨우침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대상에게 관심과 집착을 보이는 일이 아닙니다. 대상과 내가 하나임을 깨달아서 서로가 서로를 풍성하게 해주는 사귐을 통해 변화하고 성장하는 일입니다. 우리 교우들은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서로 경청하고 서로 순종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내 마음에 들고 저 사람은 공연히 싫다는 것은 신앙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기원하는 일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볼 일은 우리의 필요와 욕망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리하며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 사신 예수님의 경험이요 고백이요 지혜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아니셔서 우리의 연약한 처지와 필요를 모르실까요?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보다 깊은 가난과 고독과 슬픔과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신 예수님께는 우리가 변명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우리의 모든 간구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표현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예수님이 함께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도 원하시고, 나아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는 그런 수준으로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찬례를 통하여 우리를 벗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고 되새기게 됩니다. “벗을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은 저 같은 설교자가 그냥 말로 전하는 수준의 따분한 설교가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성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의 벗으로서 깊은 기쁨을 누리며 그 만큼의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 주님의 벗으로 부끄럽지 않게 사랑의 향기를 품고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영혼으로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

 

<강론초록2>

                           참된 신분상승(身分上昇) (요한 15: 9-17)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은 그래야 한다는,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이지 세상이 정말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21세기인 오늘날은 옛날 같이 귀족-천민, 양반-상놈 같은 신분차별이 없을까요?  물론 법적으론 모두 평등하지만 정직하게 말하면 실제 삶에서는 지금도 사람들은 ‘끼리끼리’ 살아갑니다. 자기들끼리의 수준을 정하고 그 끼리끼리에 함부로 다른 생활수준의 사람들을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도 자신의 신분상승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재테크와 자녀교육이 관심사의 전부인 우리들은 결국 마음으로 끝없는 신분상승을 꿈꾸는 것 아닐까요?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의 마음 한구석에 신분상승의 욕망이 없을까요?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차원의 신분상승을 이미 이루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벗이 되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지존하신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그 일이 신화적인 일이 아니라, 그저 상징적이고  종교적인 교양을 갖추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삶에 가장 큰 기쁨이 된다는 것을 체험하고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교 신자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란 역사상 유일하게 그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모임이라고 합니다. 끼리 끼리만으로 닫힌 것이 아니라, 기존 성원의 목숨을 내걸고 새로운 이를 공동체에 받아들이며, 낮고 천한 곳을 향한 사랑을 실천하는 열린 모임입니다. 이는 교회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는 고백 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는 계명을 지키며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통해 알려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온전히 내맡기는 일입니다. 그 내맡김은 곧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일입니다.
그 신뢰는 또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하신 그 사명과 약속을 경험하는 참된 신분상승의 비결입니다.✠

 

<강론초록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왔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오늘 복음의 말씀은 지난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라는 말씀에 이어집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흐르는 생명이 사랑이고, 포도나무인 예수님에게서 그 가지인 우리에게로 흐르는 생명도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들 사이에도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예수님에게로, 또 예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1요한 4:10)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스스로를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기적이고 이해 타산적입니다. 우리도 사랑할 때는 관대하지만, 그것은 우리 중심으로 제한되어 있는 관대함입니다. 걸핏하면 철회되는 관대함입니다. 그런 우리의 불완전한 사랑은 하느님의 관대하심이 흘러들어 구원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부르시며 사셨고 제자들도 하느님 아버지와의 사랑 안에 살도록 하시려고 애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영, 성령을 통해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들에게 바라셨던 하느님 아버지와의  올바른 관계, 사랑의 관계를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두려워서 하느님을 달래드리려는 동기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우리를 온전히 내맡길 뿐입니다.
병고와 재앙과 불행이 닥칠지라도 우리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은 결코 우리를 죽음의 운명에 버려두시지 않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계명, 즉 “우리를 위한 사랑”을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복음은 그 순종이 바로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 안에 머물 것을 권합니다.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