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일 (연중13주일/ 녹) 성서말씀/ 맥추절
사무하 1:17-27
17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
18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이 노래는 야살서에 기록되어 있다.
19 너 이스라엘의 영광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아, 용사들은 쓰러졌구나.
20 이 소문을 갓에 알리지 말라. 아스클론 거리에 퍼뜨리지 말라. 불레셋 계집들이 좋아하고, 오랑캐 계집들이 좋아 날뛸라.
21 길보아 산악에는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아니하고, 소나기도 쏟아지지 아니하리라. 거기서 용사들의 방패는 더러워졌고, 사울의 방패는 기름칠도 않은 채 버려졌구나.
22 요나단이 한번 활을 쏘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살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사울이 한번 칼을 휘두르면 사람들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고, 그 칼에는 적군 용사들의 기름기가 묻고야 말았는데.
23 사울과 요나단은 살았을 때 그렇게도 정이 두텁더니, 죽을 때도 갈라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날쌔고, 사자보다도 힘이 세더니.
24 이스라엘의 딸들아, 주홍색 옷을 입혀주고 그 옷에 금장식을 달아주던 사울을 생각하고 통곡하여라.
25 아, 용사들이 싸움터에 쓰러졌구나. 요나단이 산 위에서 죽었구나.
26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은 나를 즐겁게 해주더니.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27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
시편 130
1,2 주여,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을 부르오니: 주여, 이 부르는 소리 들어 주소서. ◯ 애원하는 이 소리, 귀 기울여 들으소서.
3 주여, 당신께서 사람의 죄를 살피신다면, ◯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4 그러나 용서하심이 당신께 있사오니 ◯ 이에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5 나는 주님 믿고 또 믿어 ◯ 나의 희망 그 말씀에 있사오니,
6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보다 ◯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옵니다.
7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 이스라엘이 주님을 기다리옵니다.
✤ 인자하심이 주님께 있고 ◯ 풍요로운 속량이 그에게 있으니
8 그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리라. ◯ 그 모든 죄에서 구하시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2고린 8:7-15
7 여러분은 모든 일에 뛰어났습니다. 믿음이나, 언변이나, 지식이나, 열성이나, 우리에 대한 사랑에서 여러분을 따를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 은혜로운 모금 사업에 있어서도 뛰어나기를 바랍니다.
8 이것은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이 일에 열성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러분의 사랑은 얼마나 진실한가를 알아보려는 것뿐입니다.
9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10 이 구제 사업에 대해서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이 일은 일 년 전에 여러분이 먼저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또 자원해서 한 일이니 여러분이 완성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11 이제 그 일을 마무리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에 품었던 의욕을 실천에 옮겨 자기 힘이 자라는 대로 그 일을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12 마음이 내켜서 하는 일이라면 가진 것에서 얼마를 바치든지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으실 것입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내라는 말은 아닙니다.
13 내가 지금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해주면서 여러분에게만 괴로운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공평하게 하려는 것뿐입니다.
14 지금 여러분이 넉넉하게 살면서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면 그들이 넉넉하게 살게 될 때에는 또한 여러분의 궁핍을 덜어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공평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15 이것은 성서에,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고 기록된 대로입니다.
마르 5:21-43
21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다시 가시자 많은 사람들이 또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호숫가에 계셨을 때에
22 야이로라 하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23 "제 어린 딸이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 집에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병을 고쳐 살려주십시오." 하고 애원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를 따라 나서시었다.
24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밀어대며 따라갔다.
25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26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27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여 따라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28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9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30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서서 군중을 둘러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31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32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33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 드렸다.
34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35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저 선생님께 더 폐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6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시고 회당장에게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37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따라오지 못하게 하시고
38 회당장의 집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울며불며 떠드는 것을 보시고
39 집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왜 떠들며 울고 있느냐?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0 그들은 코웃음만 쳤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내보내신 다음에 아이의 부모와 세 제자만 데리고 아이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셨다.
41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고 "탈리다 쿰."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소녀야, 어서 일어나거라.'라는 뜻이다.
42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나서 걸어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놀라 마지않았다.
43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시고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본기도> 주 그리스도여, 주님은 어려움 중에 있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시나이다. 비옵나니, 어떤 처지에서든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기도하게 하시어 주님의 도우심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부정함을 거룩함으로 바꾸시는 예수님 (마르 5:21-43)
오늘 복음이“현대의학이 치료 못하는 질병도 신앙에 의지하면 기적적인 능력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말씀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살펴봅시다. 예수님 당대보다 지금의 의료기술이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납니다. 영양개선, 환경관리, 의학의 발전에 힘입어 평균수명도 훨씬 늘어났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늘 날도 수많은 질병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충분히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나라에서는 굶주림과 전염병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이들도 무수히 많습니다. 과연 이 세상에 “병들어도 어쩔 수 없는 사람,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이 어떤 사람의 질병과 죽음을 마땅한 것으로 원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짐짓 “어떠어떠한 이들은 병들어도 할 수 없고, 죽어도 할 수 없다”는 냉혹한 판단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완악함을 하느님의 자비로 녹여내시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혈증을 포함한 많은 질병을 예수님 당시의 율법은 “부정하다”고 규정합니다. 죽은 이에게 손을 대는 것도 “부정”한 일입니다. 오늘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는 실은 “부정한” 상태에서 예수님께도 부정을 끼친 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여인의 행동으로 부정을 탄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치유의 은총”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부정을 은총의 기회로 바꾸어 주시는 거룩한 분이셨던 것이지요. 예수님은 금기(禁忌)를 범한 그 여인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그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곧 용서요 회복이고 축복입니다. 병을 저주받은 것으로 여겨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다가가 하느님의 은총을 입는 기회로 삼은 것이 훌륭한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죽은”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십니다. 율법에 정통한 회당장인 야이로의 눈에 그것은 부정한 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에 율법의 부정 규정이 문제이겠습니까? 예수님은 부정을 타시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함을 거룩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믿음도 그러해야 합니다.
“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일이 특수한 사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재물과 권력 또는 어떤 자격이 있어야만 혜택을 보는 일일 수 없습니다. 그 일은 희안하고 드문 마술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기울이는 지혜와 생명존중과 이웃사랑을 통해서 이 땅의 고통받고 죽어가는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늘 가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햇빛처럼 단비처럼 온 세상에 넘쳐야 합니다. 그 은총의 흐름을 막지말고 온 누리에 넘치도록 하는 일이 우리 신자와 교회의 사명입니다. ✠
<강론초록2>
병, 죽음, 기적, 믿음 (마르 5:21-43)
병이 들고 죽음을 맞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럽고 냉엄한 인간의 현실입니다. 하느님께 부르짖고 매달리는 우리의 태도는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간혹 병과 죽음에 직면하여 신앙에 의지하는 이를 보고 연약한 인간의 어리석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라고 냉소적으로 말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에게 병고와 죽음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직접 체험하게 되는 기회였습니다.
신앙이 없는 이들에게 병고와 죽음은 그저 팔자일 뿐입니다. 어쩌겠습니까? 과연 “신앙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 병고와 죽음을 해결하는 지혜일까요?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그 병고와 죽음을 통하여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깊게 하지 못하고 그저 인생은 그러한 것이라는 체념이나 더욱 더 현실의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기를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병고와 죽음은 이와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지혜서는 “하느님은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자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고 말합니다. 현실은 분명히 병과 죽음이 인간을 위압하는 힘이 아니냐고, 왜 이 세상은 병도 죽음도 없는 완전한 세상이 아니냐고 우리가 불평을 한다 해도 그 책임을 하느님께 돌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서는 이어서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악마의 시기 때문이니 악마에게 편드는 자들이 죽음을 맛볼 것이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병에서 병고(病苦)를, 죽음에서 두려움과 슬픔을 먼저 봅니다. 병고에 가려진 생명의 힘을, 죽음에 가려진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평화를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병고에서 건강의 가치를, 죽음에서 삶과 사랑의 귀함을 본다면 우리는 신앙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병고와 죽음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병고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거나, 우리가 병을 앓거나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믿음이 모자라거나 하느님의 저주 때문이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건강한 삶을 기뻐하시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원하십니다. 그런데 생각하면, 병고와 건강은 사실 우리 몸 안에서 하나입니다. 죽음과 삶도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병이란 우리 몸은 내 것인 동시에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이 우리의 것인 동시에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 이치, 곧 우리의 몸, 우리의 인생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과 관계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입니다.
왜 “믿음이 있어야 기적이 가능하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가 하면, 바로 이런 깨달음이 있어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건강과 영원한 생명을 원하심을 알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예수님과 성령님께 내맡겨 그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며 병고와 죽음을 초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론초록3>
믿음의 힘 -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르 5:21-43)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이것은, 죽어가는 딸을 포기하려는 회당장에게 우리 주님께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이것은 혈루병 여인의 병을 고쳐 주신 후에, 그를 돌려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믿음을 분량이나 정도로 재려고 듭니다. 큰 믿음, 적은 믿음, 뜨거운 믿음, 미지근한 믿음, 굳센 믿음, 약한 믿음 등으로 비교하고 말하길 좋아합니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우리가 그렇게 분량이나 정도로 측정할 수 있는 외형적인 덕목이 아닙니다. 믿음은 다른 이에게 보여지는 종교적인 행위로 측정될 수 없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각자의 삶의 고난과 위기 속에서 하느님 앞에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진심으로 따를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믿음보다 더 중요하고 더 먼저인 것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믿어주시는 하느님의 믿음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우리가 얼마나 선하고 지혜롭고 의지가 굳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께서 절대적인 선함과 지혜와 의지로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체험하고 신뢰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맹신(盲信)이 아니고, 광신(狂信)일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은 내 믿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와 사랑과 능력의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의 믿음을 내세우거나 자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고작해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 산더러 저리로 옮겨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이며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그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믿음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능력이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위대하신 주님의 능력을 우리가 힘입는 길은 "믿음" 밖에 없기에 우리는 "주님,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주십시오(마르9:24)" 하고 예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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