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5일 (연중 15주일) 녹 성서말씀
보나벤투라 (알바노의 주교,학자,증거자,1274년)
사무하 6:1-5, 12-19
1 1)다윗은 이스라엘에서 정병 삼만 명을 소집했다. 1)6:2-11에 대해서는 1역대 13:6-14참조.
2 다윗은 이 전군을 거느리고 유다 바알라에 가서 하느님의 궤를 옮겨오려는 것이었다. 그 궤는 거룹을 타고 계시는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불리는 궤였다.
3 그들이 언덕 위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느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나올 때, 아비나답의 아들 우짜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몰았다.
4 우짜는 궤 옆에서 따르고, 아효는 궤 앞에서 인도했다.
5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은 수금과 거문고를 뜯고 소구와 땡땡이와 바라를 치면서 마음껏 노래부르며 춤을 추었다.
12 2)오베데돔의 집에 하느님의 궤를 모셔두었기 때문에 야훼께서 그 집 식구들과 모든 재산에 복을 내려주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 왕은 너무나도 기뻐 하느님의 궤를 오베데돔의 집에서 자기 도성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2)6:12-19에 대해서는 1역대 15:25-16:3 참조.
13 야훼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옮긴 다음 다윗은 살진 황소를 잡아 바쳤다.
14 그리고 다윗은 모시 에봇을 입고 야훼 앞에서 덩실거리며 춤을 추었다.
15 다윗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나팔을 불고 함성을 지르며 야훼의 궤를 모시고 올라왔다.
16 야훼의 궤가 다윗의 도성에 들어올 때 다윗 왕이 야훼 앞에서 덩실 덩실 춤추는 것을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려다보고는 속으로 비웃었다.
17 다윗은 미리 성막을 쳐서 마련해 놓은 자리에 야훼의 궤를 모셔놓고 야훼께 번제와 친교제를 드렸다.
18 이렇게 번제와 친교제를 드린 다음 다윗은 만군의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었다.
19 그리고 모여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녀를 가리지 않고 떡 한 개, 마른 대추야자 한 뭉치, 건포도떡 한 개씩을 나누어주었다. 백성들은 모두 이것을 받아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시편 24
1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주님의 것, ◯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주님의 것
2 주께서 바다 밑에 기둥을 박으시고 ◯ 이 땅을 그 물 위에 든든히 세우셨다.
3 어떤 사람이 주님의 산에 오르랴? ◯ 어떤 사람이 그 성소에 들어서랴?
4 행실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 허망한 데 뜻을 두지 않고 ◯ 거짓 맹세 아니하는 사람이다.
5 이런 사람은 주님께 복을 받고 ◯ 하느님께 구원받을 사람이다.
6 이런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며 ◯ 야곱의 하느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다.
7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8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 싸움에 용맹 떨치신 주님이시다.
9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래된 문들아. 일어서라 ◯ 영광의 왕께서 드신다.
10 영광의 왕이 누구신가? ◯ 만군의 주께서 영광의 왕, 그분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에페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습니다. 4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하시려고 천지 창조 이전에 이미 우리를 뽑아주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뜻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6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이 영광스러운 은총에 대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풍성한 은총으로 8 우리에게 온갖 지혜와 총명을 넘치도록 주셔서 9 당신의 심오한 뜻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시켜 이루시려고 하느님께서 미리 세워놓으셨던 계획대로 된 것으로서 10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11 모든 것을 뜻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따라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 택하셔서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12 그러므로 맨 먼저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확인하는 표로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약속하셨던 성령을 주셨습니다. 14 성령께서는 우리가 받을 상속을 보증해 주시고 하느님의 백성인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 6:14-29
14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하고 말하는가 하면 15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또 더러는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라고도 하였다. 16 그러나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17 이 헤로데는 일찍이 사람을 시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둔 일이 있었다. 그것은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18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19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그것은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여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간할 때마다 속으로는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그것을 기꺼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마침 헤로디아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 왕이 생일을 맞아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요인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나와서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매우 기쁘게 해주었다. 그러자 왕은 그 소녀에게 "네 소원을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들어주마." 하고는 23 "네가 청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주겠다. 내 왕국의 반이라도 주겠다." 하고 맹세하였던 것이다. 24 소녀가 나가서 제 어미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고 의논하자 그 어미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여라." 하고 시켰다. 25 그러자 소녀는 급히 왕에게 돌아와 "지금 곧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가져다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26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그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27 그래서 왕은 곧 경비병 하나를 보내며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감옥으로 가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다시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가져다 주었다. 29 그 뒤 소식을 들은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장사를 지냈다.
<본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신비로운 창조와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들을 채워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베푸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과 함께 주님의 축복을 나누고,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며 살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으로 이제와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우리에게 “주님께서 맡기신 말씀”이 있습니까? (마르6:14-29)
한국의 기독교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세계최대의 여의도순복음교회(조용기 목사), 세계최대감리교회 금란교회(김홍도 목사)를 비롯하여 세계 10대교회 중 6개가 우리나라에 있답니다. 쇠락해가는 서구교회와 달리 한국교회는 뜨거운 열정이 있고 현재의 대통령을 비롯하여 장로 대통령을 여럿 배출했습니다. 우리 성공회의 본산이라 할 영국 성공회의 옥스퍼드 대학 채플린과 신학교수들이 우리 서울대성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우리에게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이 부럽다며 그 비결을 물어오는 현실입니다. 나 원 참!
그런데 교우 여러분, 정말 한국의 기독교가 지금 잘 나가고 있는 것일까요?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신앙인으로서 존경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 나라의 교회가 정말 우리 사회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 조금 좁혀서 우리 성공회 이야기를 해보지요. 우리 성공회는 지금 무엇이 문제일까요? 다른 교파의 교회들은 다들 열심히 복음을 가르치고 배우며 영혼구원을 위한 전도에 힘쓰고 해외선교에까지 열성을 다하는데 우리 성공회는 성직자들이 어리석고 게을러서 맨날 감동 없는 형식적인 미사만 드리다가 그만 이렇게 교세가 약하게 되어버렸다고 생각하세요?
한국 교회는 지금 심각한 위기상황입니다. 우리 성공회도 절대절명의 위기상황입니다.... 라고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지적에 동의할 수 없는 교우 분이 계시다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저도 정말 그 분의 긍정적인 신념과 위대한 희망의 능력을 배우고 싶습니다. 교회의 사명을 무엇으로 보시는지,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고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아니 무엇보다, 성공회가 어떤 비전이 있는 것인지, 성공회 신자인 당신께서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계신지를 들려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예언자 이사야에게 하느님께서 다림줄의 환상을 보여주시는 장면이 있습니다. 다림줄은 추를 달아 늘어뜨려 수직을 재어보는 도구입니다. 다림줄 없이 벽이나 축대를 쌓다가는 큰 붕괴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 위험은 대강 눈으로만 보아서는 알기 어렵습니다. 사회 속에 종교의 존재이유, 교회와 신앙인의 존재이유는 바로 이 다림줄의 존재와 같습니다. 신앙인들은 우리 사회가 지켜야 할 것과 바로잡아야 할 것들을 반드시 지키고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을 양보없이 타협없이 말하는 이들입니다. 신앙인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구분으로 서로를 가르고 거기에 사로잡힐 수 없습니다. 지킬 것은 지켜서 보수(保守)해야 하고, 바로 잡아야 할 것은 바로 잡아 개혁(改革)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다림줄에 두 방향을 가리키는 추가 매달려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의 추만이 수직 여부를 알려줄 뿐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언자의 전통을 잇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세례요한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벽이나 축대에 붙이는 장식물이 아니라 벽과 축대의 안정을 보장해주는 다림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이의 이런 반론이 예상됩니다. 예언에 대한 관심은 구약적인 이야기이고 신약시대에는 영혼구원이 중요한 문제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어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이 참된 구원이라고, 그리스도교회는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공동관심사인 개인영혼의 구원을 위한 기관이라고...
거기다 어떤 이는 한 술 더 떠서 내세는 물론 현세의 삶도 중요하지 않느냐고, 그러하니 긍정적, 적극적인 신념을 통해서 예수를 잘 믿으면 영혼 구원뿐 아니라 물질과 건강까지 얻는다는 삼박자 축복이 성경에 약속되어 있노라고 말합니다...
교우 여러분이 차분히 생각해보시고 판단하실 일입니다.
오늘 에페소서는 우리의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신 일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곧 하느님의 백성을 이룬 표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여 우리 마음에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실체로서의 우리 영혼이 천국의 입국허가를 받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가 바라는 물적, 영적 필요가 충족되기를 바라고 추구하는 일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의 물적, 영적 필요가 하느님이 원하시는 내용으로 올바르게 변화되기를 구하는 일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요즘 세상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하여 폄하하여 말하면 쓸데없는 개죽음입니다. 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꼭 짚어 지적하여 권력자의 비위를 거슬려서 목이 쟁반에 오르는 신세가 됩니까? 점잖게 몇 가지 기적적인 능력을 보이고 내 말을 잘 들으면 살아서는 부귀권세를 잘 누리고 죽은 후에는 하느님의 자비로 영혼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순수하게 영혼구원을 위한 순복음과 삼박자 축복만 전했더라면 아마도 궁정의 수석예언자가 되어 존경받으며 잘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민중도 권력자도 그것이 개죽음이 아닌 것을 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는 그들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난 것이다”고 생각했다고 전합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는 것,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이라는 것, 예언자의 죽음은 하느님께서 기억하시고 되갚으신다는 것을 하느님을 아는 사람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전혀 마음에 거슬리거나 거북하지 않다면 우리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완전한 성자이거나 완고한 악인이거나!
하느님나라에 관해 알리시고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우리 삶 속에서 기억하고 우리 삶 가운데 적용해야 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 나라를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일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해 사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언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진리를 오늘 말씀과 성사 가운데 되살려야 합니다. 부활하시어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는 왕으로 즉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축복을 척척 내려주시는 내 맘에 드는 하느님이 아니라, 내가 걸어야 할 생명의 길을 알려주시고 인도하시는 절대 주권의 하느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화려한 성전과 수많은 교인들, 그러나 “사랑과 진실이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이 땅의 하느님나라는 무시하고 그저 저 세상에서 누리는 천당복락만을 강조하며 스스로 세상의 물량적 성공기준을 추종하여 자기를 자랑하는 교회라면 이것이 될 말이겠습니까? 이런 수준의 교회라면 세례자 요한의 말씀을 청해 듣기는 커녕 그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달라고 청했던 간악한 헤로디아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이 못 다한 말을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으로서 말씀하신다고 여김을 받으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 우리는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마 약속하시고 하늘에 오르시며 이 땅의 일을 우리에게 맡기실 때 세상에 전하라고 맡기신 말씀을 우리는 과연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무슨 내용입니까?
서두에 우리 성공회의 위기를 말씀드렸지요. 오해하지 마셔야 합니다. 개신교처럼 물량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공회가 위기인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에게 맡기신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여 세상이 혼란과 고통 속에 신음하는 때에 분명히 하느님의 말씀을 은혜롭게(!) 선포하지 못하는 것이 본질적인 위기입니다. 주님의 예언자로서 복음의 날 선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일을 회피한 것보다도 그저 세상이 찬탄할 만한 물량적인 성공을 이루지 못한 것을 더 아쉬워하며 엉뚱한 회개와 반성(?)을 하고 있는 우리의 속마음이 우리 위기의 단면이 아닐까요? ✠
<강론초록2>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으로 말하는 신자 (마르6:14-29)
사람이 조심해야 할 것 중의 으뜸은 ‘혀’입니다. 말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미움이 생기고 다툼이 생깁니다. 인간은 ‘관계의 존재’이고 인간의 말은 이 관계를 맺어주는 것인데 거짓말, 공허한 말, 무의미한 말을 주로 하며 살다보면 결국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사람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는가가 우리의 삶의 수준과 내용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통하여 세례자 요한이 어떤 인물인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한 마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한 예언자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언자를 미리 앞일을 점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예언자의 본뜻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편이 정확합니다. 한자로 보면 미리 예(豫)자 예언자(豫言者)가 아니라 맡길 예(預)자 예언자(預言者)인 것이지요. 물론 미리 예자 예언자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당연히 어제, 오늘과 연결된 내일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겨 선견자(先見者)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높이는데 관심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데에 전념한 참된 예언자입니다. 오늘 구약의 예언자 아모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직업적인 예언자가 아니었죠. 그는 스스로를 “양떼를 몰고 다니다 야훼께 사로잡힌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임금이 죽고 나라가 망하리라는 예언을 감히 인간의 생각으로 지어내서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스스로도 두려운 그 말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기에 말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말하는 그이기에 참된 예언자인 것입니다.
헤로데는 기분에 들떠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헤로디아는 기회를 이용하여 세례 요한의 머리를 잘라달라고 청합니다. 인간의 말로써 그들이 과연 어떤 내용을 소통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기분과 체면에 따라 말을 내뱉고, 교활한 계산과 욕심을 따라 말을 전하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인 우리들의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맡기시는 말들이 채워지도록 마음을 엽니다. 우리 입술을 통하여 하느님의 그 말씀들이 전해지도록 “사랑으로 진리를” 말합니다. 사람의 말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세상엔 하느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고 자기들끼리 무의미한 말, 공허한 우스개, 감정을 배설하며 남을 상처 주는 말들을 주고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그 말씀이 필요한 때를 따라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
<강론초록3>
우리들의 그림자, 살로메
오늘 복음서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정치권력과 문화권력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즉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권력의 이면에 더 큰 힘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통념과 가치의 문제를 두렵게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라와 사회의 형편을 두고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물으며 흥분합니다. 더럽고 치졸하고 어리석고 무책임한 사람들이라고, 온갖 욕설과 비난을 다 퍼붓습니다. 그러나 정치인을 욕한다고 절대로 우리나라 정치와 이 사회가 나아지지 않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의 원천은 국회와 정당에 속한 직업 정치인에게 있지 않습니다. “본래 그러한” 그들을 뽑아 세우고 그들에게 끝없이 이것저것을 요구하는 바로 우리들의 사고방식, 가치관이 본질적으로 더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헤로데 같은 정치인 곁에는 반드시 헤로디아 같은 비정상적인 요부,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 같은 요사스러운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정치인들을 세웠습니다. 내가 정치가들을 통하여 무언가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요구합니까? 나의 기득권을 지켜주기를 요구합니다. 나의 잘못된 것은 그냥 덮어주기를 요구합니다. 나를 거슬리는 사람의 요구는 묵살하고 나의 편안한 삶을 위협하는 이는 차라리 없애주기를 요구합니다.
나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이 혹하는 아름다운 춤입니다. 그 춤은 물론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욕망을 자극하는 원초적인 춤입니다. 우리들은 모두 그 춤사위에 얼이 빠져있습니다. 그 춤은 속삭입니다. “욕망을 채우라, 남보다 먼저, 남보다 많이, 남보다 오래! 내 욕망을 채우는데 거슬리면 그 누구라도, 하느님의 사람이라도 없애버려라! 내 욕망을 채우는데 환경파괴가 무슨 대수냐? 다른 생명들이 죽고 다치는 것이 뭐가 그리 큰 문제냐? 어차피 잠깐의 내 인생, 살아서 나부터 잘 먹고 잘 살아보자! ”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했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를 보고 "저, 저런 나쁜 X"이라고 쉽게 욕할 수 있지만 ... 아프고 슬프게도 헤로디아와 그 딸은 바로 우리들의 그림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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