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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성소주일 공동설교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웃나라 일본에서의 들려오는 원자력발전소 사고 소식으로 온 세계가 불안해하며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미 일본정부는 사고등급을 지금까지 최악의 사고로 꼽히는 1986년 체르노빌 사고와 같은 7등급으로 정하여서 그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짐작 하게 합니다.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 규모가 히로시마 원자폭탄의 200배에 달한다고 하니 앞으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피해 확산이 더욱 염려됩니다.

이번 사고가 각국의 원자력 발전소 정책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는데 독일의 경우는 향후 10년 안에 모든 원자력 발전소를 폐기하고 대체 에너지 개발에 힘쓰겠다고 합니다.
원자력 발전소는 그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가장 효율적인 전력생산 방법으로 선택되어졌습니다. 그것은 효율과 성장을 절대적 가치로 중시한 이 사회가 필연적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위험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를 슬프게 하는 뉴스가 한국 최고의 수재들이 공부한다는 카이스트라는 학교로부터 들려왔습니다. 이 역시 경쟁과 성공이라는 가치에 내 몰린 젊은이들이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여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인데, 이는 어느 특정한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 교육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래를 이끌어나갈 청년들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꿀 여유도 없이 눈앞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비극이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때 일수록 교회는 새로운 가치와 희망을 선포해야 합니다. 손으로 만져지고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가치들이 있음을 말해야 합니다. 경쟁과 효율, 성공에 대한 집착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이 죽음의 땅에 생명의 가치들을 심어서 부활의 열매를 거두어야 하는 임무가 우리 교회에 주어졌음을 심각하게 느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하늘의 가치들은 모두가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손을 만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가치들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결과에 목을 매는 세상을 향해 맞서야 할 때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흩어져 있는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보지 못하면서도 믿고 있으며 또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넘쳐 있습니다.” 하며 위대한 믿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눈으로 확인하거나 손으로 만져지는 결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야말로 그리스도를 본 일이 없으면서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믿고 있습니다. 또 보지 못한 그 분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눈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훌륭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토마에게 하셨던 “너는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은 위대한 믿음을 가진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은 가시적인 성과와 눈으로 확인되는 결과만을 가지고 가치를 평가합니다. 이 평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낙오자, 약자, 실패자로 분류됩니다. 가시적 성과를 이루고 경쟁에서 성공한 사람만이 인정받고 존중받는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혼을 팔고 양심을 팔아서라도 그 무리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영원, 사랑, 희망, 정의 이런 것들은 불필요하고 불편하며 무가치 한 것일 수 있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가치들을 얻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삶에서 정작 중요하고 본질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이 아니던가요? 부모의 사랑, 부부의 신뢰, 자녀에 대한 희망, 친구 사이의 우정, 미래의 꿈. 이런 가치들이야 말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 아닙니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졌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공허하고 우울하며 불행해집니다. 숫자로 산출되거나 손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가치들이야 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샘물입니다.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하는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물질적인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어른들에 어린왕자가 들려주는 말을 귀담아 들어보십시오.  

[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말해주면 그들은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물어 보지도 않는다.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는 어떤 놀이를 좋아하니? 나비 채집도 하니?” 이런 질문을 그들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그 애는 몇 살이니? 형제는 몇이니? 몸무게는? 그 애 아버지의 수입은 얼마니?” 하고 묻는다. 오직 이런 숫자들로만 그들은 그 애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는 제라늄 화분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어요.” 하고 말하면 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전혀 상상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2만 달러짜리 집을 보았어요.” 하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면 그들은 “야, 그것 참 훌륭한 집이구나!”하고 감탄한다. ]

물질적인 가치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에 대한 적절한 풍자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도 그 사람의 경제력, 학벌, 아파트 평수, 자동차의 크기로 평가하는 사회에서는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진정한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진정 행복을 느끼는 가치들은 무엇입니까? 구원, 용서, 평화, 응답, 자비, 소명... 이런 가치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교회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규모와 수치적 성장에 집착함으로 보이지 않는 이런 신앙적 가치들을 상실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 수명을 다 한 것입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가치들을 이 땅에서 이루고 또 전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소주일(聖召主日)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응답하는 날입니다. 우리 모두는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성소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 곧 소명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이 소명에 응답하는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는 세상의 유익이나 성공이 보장되어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손해보고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부름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저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대마다 사람들을 부르시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셨는데 그 소명에 응답한 이들의 공통점은 비록 현재 상황은 막막하고, 자격이 없지만 하느님의 약속과 능력을 믿고 부르심에 응답했다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앞날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 나섰습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지는 것만 믿는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어리석은 선택이지만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더욱 위대합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야훼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처음에는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그럴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 말을 믿지 않으면 어찌합니까? 저는 말주변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고난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러 이집트로 돌아갔습니다.
이사야는 어떻습니까? 그가 성전에서 야훼를 만났을 때 그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야훼께서 그의 입술을 정결케 해주시며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 하고 부르실 때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응답하였습니다.

이 거룩한 부르심의 맥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에게로, 또 수많은 성인들에게로 이어져 오늘의 교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그 부르심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거룩한 역사를 이어가기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응답할 차례입니다. 

성소(聖召), 이 단어는 두 가지 믿음을 전제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부르셨다. 둘째, 이 부르심은 거룩하다.

남의 권유나 나의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부르셨다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성소는 내가 잘나서 나의 재능으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해야하고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부르심은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을 통해서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이루고자 하는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세속적인 부와 힘, 존경과 심리적 만족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의 목적은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성소를 받았지만 예언자들이나 제자들처럼 특별한 임무를 위해서 부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소주일은 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순종할 뿐만 아니라 교회공동체의 사목을 위해서 특별히 부르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날 이기도 합니다. 성직자들과 성직후보자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많은 성직자들이 교우들의 기도와 헌신에 힘입어 훌륭히 성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에서 기도와 학문과 공동체 훈련을 통해서 성직을 준비하는 성직후보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을 후원하고 격려하여 훌륭한 성직자로 양성하는 책임이 교회에 있습니다. 이들이 우리 공동체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자는 세상의 가치인 눈에 보이는 성과들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지 못했다고 해서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가치를 넘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가치들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예수께서 보여주신 부활이요 생명의 삶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교회와 교우들을 부르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부활의 열매로 맺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소주일 공동설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