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15일 사순 6일 (화) (자) 성서말씀
이사 55:10-11 [야훼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10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뜻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시편 34:4-6, 21-22
4 주님 찾아 호소할 때 들어 주시고 ◯ 몸서리쳐지는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5 그를 쳐다보는 자, 그 얼굴 빛나고 ◯ 부끄러운 꼴 당하지 아니하리라.
6 가엾은 이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 주께서 곤경에서 건져 주셨다.
21 악인들은 그 행실로써 죽음을 당하고 ◯ 의인을 미워하는 자 멸망하리라.
22 주께서 당신 종의 목숨을 구하시니 ◯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처음과 같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아멘
마태 6:7-15 [주의 기도 (루가 11:2-4)]
7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8 그러니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구하기도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1)(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후대의 사본들에만 이 말이 들어 있다.
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본기도> 자비하신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사십 일을 금식하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에게 극기의 은총을 내리시어 성령을 따라 살게 하시고, 하느님의 거룩하고 의로우신 뜻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
크로싼 지음 <가장 위대한 기도> 프롤로그 중에서
가장 이상한 기도
'주님의 기도'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기도이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이상한 기도이기도 하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에는 '그리스도'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들이 그 기도를 바치지만, '교회'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일날마다 그 기도를 드리지만, '주일'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라고 불리지만, 그 기도에는 '주님'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근본주의 그리스도인들도 드리는 기도이지만, 영적인 감동[靈感]에 의해 기록된 성경에는 틀린 말씀이 전혀 없다는 무오성(無誤性)이나, 동정녀 탄생,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죽음이나 몸의 부활을 언급하지 않는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기도를 드리지만, '복음'(evangelium)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오순절 계통의 그리스도인들도 그 기도를 드리지만, '성령'이나 입신상태의 희열을 언급하지는 않는다.
'주님의 기도'는 로마 가톨릭, 회중교회, 장로교회, 성공회 신자들도 드리지만, 사제, 주교, 교황, 회중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저런 교리 때문에 서로 갈라진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런 교리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으심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에는 그리스도, 대속, 희생, 속죄, 죄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천당이나 지옥에 가서 내세(來世, next life)를 지내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의 기도'를 드리지만, 천당이나 지옥, 내세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처럼 '주님의 기도'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을 믿고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그 기도가 강조하는 것을 무시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열심히 이 기도를 드린다.
물론 이런 모습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주님의 기도'는 유대인이었던 예수가 드린 유대식 기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 안에 그리스도교적인 단어들이 나오지 않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도'가 안고 있는 이상함에 대해 또 다시 묻게 만든다. 즉 '주님의 기도'가 유대인 예수가 드린 유대식 기도라면, 왜 언약이나 율법, 성전이나 토라(Torah), 할례나 정결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유대인들을 위한 유대식 기도가 아니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교의 기도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대교의 중심에서 나온 기도로서 그리스도교인들의 입을 통해 세상의 양심을 향해 드리는 기도라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만일에 '주님의 기도'가 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인류를 위한 급진적 선언(a radical manifesto)이며 희망의 찬가(a hymn of hope)로서 온 세상을 향한 기도라면,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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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선언(a revolutionary manifesto)이며 동시에 희망의 찬가라고 믿는다. '주님의 기도'가 혁명적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전통의 핵심인 정의에 대한 급진적인 비전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이 기도가 찬가인 이유는, 이 기도가 이스라엘의 성서 시(詩) 문학의 핵심인 시적 기법(poetic techniques)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언어 사용에서 "정의"라는 말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으로는 보복적인 정의, 즉 처벌을 뜻하는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 프롤로그를 2009년 9월 27일,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쓰고 있었는데, {덴버 포스트} 일요일 판의 머릿기사는 "정의"에 관한 것으로서, 모든 피고인들에게 처벌이 공정하게 또한 평등하게 부과되는지를 논의하고 있다. 그 머릿기사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정의"라는 말을, 재판에 의한 처벌을 뜻하는 것으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정의"의 일차적인 의미는 보복적인(retributive) 것이 아니라 분배적인(distributive) 것이다. 즉 정의롭다는 것은 모든 것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 나누는 것을 뜻한다. "정의"의 일차적 의미는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든, 심지어 보복이나 처벌을 생각한다 할지라도, 공정하게 나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일종의 말장난이라고는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이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즉 성서 전통은 하나님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으로 말한다(시편 99:4; 이사야 33:5; 예레미야 9:24). 이 두 단어는 똑같은 것을 말한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은 옳은 것을 행하심으로써 정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정의로운 것을 행하심으로써 옳은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세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공정하고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성서의 많은 구절들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내가 성서 전통이나 예수, 혹은 '주님의 기도'와 관련하여 "정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거의 전적으로 분배적인 나눔의 정의를 염두에 두고 사용하는 것이다.
성서 전통이 분배적 정의에 대한 혁명적인 비전을 선언할 때, 그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원리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며, 보편적인 인권을 상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적인 비전은 제대로 운영되는 가정, 집안 살림살이, 혹은 가족의 농토에 대한 일반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비전이다. 만일 당신이 어느 집안에 들어갈 때, 무엇을 기준으로 그 집주인을 판단할 것인가? 그 논밭이 잘 가꾸어져 있는가? 가축들이 제대로 살이 쪘는가? 건물들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는가? 자녀들과 딸린 식솔들이 제대로 먹고 있으며, 옷을 제대로 입고 있으며, 잠 잘 곳은 마련되어 있는가? 아픈 이들은 특별한 돌봄을 받고 있는가? 책임에 따른 보상은 공정하게 이루어지는가? 모두가 넉넉한가? 특별히 그 집주인을 판단하게 되는 기준은 모두가 넉넉한가, 아니면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차지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너무 적게 받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성서 전통이 하나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이처럼 제대로 운영되는 집안, 공정하고 공평하며 온당하게 관리되는 가정에 대한 비전이다. 하나님은 세계라는 집의 주인이며, 어느 집주인을 판단하기 위해서 앞에서 물었던 질문들을, 이제는 지구적인 관점과 우주적인 규모에서 다시 물어야만 한다. 즉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넉넉하게 갖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성서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세상에서 공정하고 공평하며 정의롭게 자기의 몫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 '주님의 기도'는 혁명적인 선언이며 희망의 찬가로서, 그에 필요한 변화를 선언하고 있다.
누구든 이것이 자유주의로 바꾸는 것이라거나, 사회주의로 바꾸는 것, 혹은 공산주의로 바꾸는 것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게 하라. 만일 어떤 이념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주의(Godism), 한살림주의(Householdism), 혹은 무엇보다도 충분주의(Enoughism)일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식구들에 대한 성서의 비전을 평등주의(Egalitarianism)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충분주의가 보다 정확한 용어일 것이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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