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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5월 29일 (부활 6주일) 성찬례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5월 29일 부활 6주일 성서말씀

사도 17:22-31

22 바울로는 아레오파고 법정에 서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내가 보기에 여러분은 여러 모로 강한 신앙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23 내가 아테네 시를 돌아다니며 여러분이 예배하는 곳을 살펴보았더니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 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24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으십니다. 25 또 하느님에게는 사람 손으로 채워드려야 할 만큼 부족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26 하느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 온 땅 위에서 살게 하시고 또 그들이 살아갈 시대와 영토를 미리 정해 주셨습니다. 27 이리하여 사람들이 하느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계십니다.
28 '우리는 그분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 하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의 어떤 시인은 '우리도 그의 자녀다.' 하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29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느님을, 사람의 기술이나 고안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가지고 만들어낸 우상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30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무지했던 때에는 눈을 감아주셨지만 이제는 어디에 있는 사람에게나 다 회개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31 과연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분을 시켜 온 세상을 올바르게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고 또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그 증거를 보이셨습니다."

시편 66:7-18

8 민족들아, 우리 하느님을 /찬미/하여라.   * 소리 높여 /찬양/하여/라.
9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해/ 주시며   *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13 그러므로 내가 번제를 드리러 당신 /집에/ 왔습/니다.  * 서원한 것 /바치러/ 왔습/니다.
14 괴로울 때 내 입으로 /맹세/한 것,  * 내 입술로 아뢰었던 것을, /바치러/ 왔습/니다.
17 내 입은 그분께 /부르짖었/으며,   * 내 입술은 그분을 /찬양/하였/다.
18 나 만일 나쁜 뜻을 /품었/더라면   * 주께서는 아니 들어 /주셨/으리/라.

1베드 3:13-22

13 여러분이 선한 일에 열성을 낸다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14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다 해도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협박하더라도 무서워하거나 흔들리지 마십시오.
15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우러러 모시고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16 그러나 답변을 할 때에는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사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헐뜯던 자들이 바로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17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
18 그리스도께서도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하느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몸으로는 죽으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사셨습니다.
19 이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갇혀 있는 영혼들에게도 가셔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20 그들은 옛날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었을 때 하느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셨지만 끝내 순종하지 않던 자들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 빠지지 않고 구원을 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뿐이었습니다.
21 그것은 오늘날 여러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몸에서 더러운 때를 벗기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양심으로 살겠다고 하느님께 서약을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셔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세력과 능력의 천신들을 당신에게 복종시키셨습니다.

요한 14:15-21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면 다른 협조자를 보내주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계시도록 하실 것이다.
17 그분은 곧 진리의 성령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사시며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18 나는 너희를 고아들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기어이 너희에게로 돌아오겠다.
19 이제 조금만 지나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지만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터이니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20 그 날이 오면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과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21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나도 또한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를 나타내 보이겠다."

<본기도> 
사랑의 하느님,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넘치는 기쁨을 주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이 세상 무엇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더 크신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                                       협조자 성령님 (요한 14:15-22)

부활6주일입니다. 이제 다다음주에 성령강림주일을 맞게 됩니다. 부활절기는 성령강림주일을 포함합니다.  부활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일입니다. 십자가의 참혹한, 참담한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도리어 그 십자가의 길을 걸어 예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부활체험이 제자들이 육신의 눈으로 예수님의 다신 사신 육신을 본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활체험은 제자들이 영적인 눈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영적인 현존을 알아 본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눈으로 보면 무엇을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지과학의 상식으로도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 대하는 물건을 보거나 처음 경험하는 사태를 통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고 경험한 정보를 동원해서 해석을 할 수 있는 개념과 틀을 가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눈으로 본 것을 규정짓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상식은 우리의 부활체험에도 적용이 됩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한다 해도 그저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난 것 이상의 아무런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님께 모든 구원의 소망을 걸었고 그것이 세상의 힘에 의해 십자가에서 참담하게 깨져버렸다고 하는 절망의 현실 속에서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증언한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의 시신이 되살아났다는 사실성을 받아들이고 전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보여주신 하느님의 나라와 이 땅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요청되는 십자가의 길이 곧 참으로 구원의 길임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 부활사건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도 여전히 체험되는 일임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보통 우리는 부활사건을 예수님께만 초점을 두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거봐,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시잖아. 그러니까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부활을 하신 거지. 부활은 예수님이 신의 아들이란 증거야. 그러니 부활로서 확증된 신의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제 우리는 무조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되고 그러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야. 그게 바로 복음이야.”라고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금은 불충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설명입니다. 좀 더 신중하고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해서 모든 복음서, 모든 신약성서는 구원사건을 예수님께서 혼자 벌이신 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속해 사는 우리를 향해 이루신 사건입니다. 구원의 본질은 저 세상에서 천국에 들어가거나 이 세상에서 소원대로 만사형통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히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사는 인생, 다른 이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그 사랑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인생 그것이 구원의 본질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하느님과의 일치, 다른 이들과의 하나됨”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것은 강제적인 복종이나 강요된 획일화가 아닙니다. 자유로이 나누는 친교이고 자발적으로 드리는 헌신입니다. 구원의 본질로 이해되는 그러한 일치와 친교와 헌신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서로를 향하여 이루고 계시는 “일체성, 곧 하나됨”에서 비롯합니다.

세상의 권세는 하느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이루어지는 사랑의 일치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깨뜨리려고 듭니다. 사랑의 일치가 깨어져야 그 불화와 불안과 갈등의 핑계로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이 세상을 자기의 논리, 곧 미움과 싸움의 지옥으로 만들고 죄와 고통과 죽음의 권세를 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사건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 이루셨던 그 사랑의 일치, 우리 모든 신자에게 그러한 일치를 이루도록 기도와 순종과 선행을 가르치셨던 주님의 그 사랑의 일치는 세상의 발악적인 저항,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참람한 반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로잡는 구원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혼자서 황홀경의 심리상태에 빠지는 일이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적인 의미에서 참된 일치는 매 순간, 매 사태에서 우리가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인생임을 의식하면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킬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와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면 그것은 일치가 아니라 도리어 불일치를 확인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는 일은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삶은 결정적으로 우리의 판단이나 의지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살아가는 일, 그것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저 멀리 초월해 계신 신으로 머물러 계시지 않기에 가능합니다. 그 절대적인 초월성과 아울러 주님은 무한한 내재의 힘으로 우리와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유한한 현실 가운데 사람으로 자신을 낮추어 오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로, 그리고 우리를 휘감고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시고 우리와 소통해주시는 성령 하느님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도우미가 되심을 넘어섭니다. 필요할 때 청하면 소원을 들어주시는 마법사의 역할을 넘어섭니다. 예수님은 참된 협조자, 우리의 보혜사(保惠師), 우리를 보호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우리를 떠나실 때 또 다른 협조자 곧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을 되새겨서 우리가 하느님과 영적인 일치를 이루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지탱해시고 우리의 구원을 보장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지혜나 능력을 의지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의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그저 이천년전 예수님의 부활을 머리로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고백하고 살아가는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를 우리는 무슨 금과옥조인 것처럼, 무슨 구원의 주문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우리의 믿음보다 더 중요하고 심오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로잡으시는 구원의 능력, 곧 “오직 성령으로!”입니다. 사실 “오직 믿음”의 본래 의미도 내 믿음을 내세우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은 오직 우리 전부를 성령께 내맡기는 믿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라는 의미도 내가 믿음이 좋아서 성령을 받고 내가 받은 성령체험을 통해서 주관적인 확신을 가지고 방언을 하고 능력을 떨칠 수 있다는 수준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일이고,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사로잡는 하느님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고백하는 겸허한 내어맡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성령체험은 우리의 믿음을 넓고 깊고 풍요롭게 해갑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교회가 다함께 환경주일로 지킵니다. 성령께서는 단순히 나의 심리적인 문제만을 주로 다루시는 분이 아니심을 깨닫고 고백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영하시고 지탱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영혼구원은 이 세상과 초연히 관계를 끊고 그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을 때 저 세상에서 낙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혼구원은 우리의 영이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서 온전히 전적으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이 과연 성령께 사로잡힌 삶을 사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역시도 여전히 세상의 악령에 사로잡힌 채 그저 명분의 신앙만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넘어서서 끝없이 불필요한 욕망을 지어내고 자극하고 그 충족을 위해서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합니다. 그 결과로 자원은 고갈되고 환경은 파괴되어 인류의 건강한 생존이 위협받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지하여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겸손한 삶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서로 나누고 섬겨야 합니다. 참된 행복은 경쟁적으로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는데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행복은 함께 소박한 삶을 살며, 부족한 필요로 고통 받는 이와 나누고 감사하며 사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 시대에 우리 성공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가 이른바 4대강 개발문제 등을 신앙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무슨 정책에 대하여 이해관계를 가지고 정부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차원일 수 없습니다. 왜 교회가  정치적인 입장을 내세우냐고 따지는 일은 오해에서 비롯한 일입니다. 교회와 신자가 의지하는 유일한 식별의 기준은 성 삼위일체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총제적인 삶의 태도를 반성해보는 일 뿐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영이시고, 창조질서를 보존하고 유지해 가시는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야 합니다. 시골의 개발이나 도시의 재개발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을 우리가 하느님과의 하나됨, 이웃과의 하나됨, 곧 “사랑의 일치”를 기억하며 행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기억하고 뒤따르는 일입니다. 이천년 전 일어난 사건의 흐름은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과 공생애의 사역, 십자가 처형과 부활사건, 그리고 성령강림사건의 순서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구원의 사건이 인식되는 차례는 성령강림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현존하시는 부활사건이 깨달아지고, 그 부활의 빛에서 십지가 사건의 의미가 밝혀지고, 그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느님나라의 일들이 이해되고, 그 하느님나라의 이해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 곧 예수님의 탄생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력의 시간은 이제 부활일에서 성령강림일로 계속 연결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주일로 이어지고 그 삼위일체 하느님과 구원의 길을 동행하는 연중주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온 몸으로 살아갑니다. 밋밋한 시간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매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의 순간들, 곧 “주님의 시간”,“주님의 날”을 살아갑니다. 고통이든 즐거움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리는 늘 “영원한 순간”,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강론초록1>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계신 협조자 성령님 (요한 14:15-22)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통속한 유행가 가사입니다.^^ 자, 하느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본래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바다같이 넓고 깊은 단절이 있었습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의 유한함과, 절대자 앞에 교만하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죄성이 그 간격을 메울 수 없는 심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느님께서 몸소 그 심연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증언합니다. 구약의 신앙인들은 자신들을 “노예상태”로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풍요로운 새 나라”로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만군의 주님”으로 경험합니다. 그 유일하신 분을 성전제사와 율법준수를 통하여 섬기기로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의 간극은 사라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영(靈)이신 것과 우리 인간이 또한 영적(靈的) 존재인 것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드리지 못하는 성전제사는 도리어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이 빠진 율법준수는 헛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때를 따라 하느님께서는 결정적으로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예수님을 “우리 곁에 오신 하느님”으로 보내주신 일입니다.
이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되는 일, 다시말해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자유로 응답하고 기쁨으로 순종하며 사랑을 누리는 일을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 하느님나라를 가르치시고, 그 하느님나라를 드러내 보여주시고 그 하느님나라를 향한 길이 되셨습니다.

그 “하느님나라를 살아가는 일”을 예수님은 “사랑의 일”이라고 하시고, 우리들은 “계명의 일”이라고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교회가 명하는  이런저런 계율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일로 모든 계명의 목적이 완성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하면 건강과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는 일, 곧 하느님나라를 누리는 일, 영원한 생명을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 일은 우리가 노력으로 성취하는 일이 아니라 협조자 성령님의 도움으로 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영, 곧 예수님의 영은 우리를 사로잡아 “일치와 친교”를 이루십니다. 우리의 구원의 내용인 하느님나라, 영원한 생명은 바로 성령께서 우리를 사로잡아 이루시는 일입니다.

그 성령께서 사랑의 계명을 사랑의 기쁨으로 실천하게 하십니다.
그 성령께서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주님 몸의 지체가 되게 하시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우리 공동체를 주님의 몸으로 일치되게 해주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서 “성령님”을 깨닫는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과 기쁨의 일치를 경험합니다.✠

<강론초록2>
                                        협조자 성령님을 의지하는 삶 (요한 14:15-22)

하느님의 사랑은 한결 같으시지만,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여 우리네 신앙생활에는 파동이 있게 됩니다. 고양되는 믿음의 시기가 있고 때로는 침체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침체된 시기의 우리 마음에 여운 깊은 아픈 울림이 됩니다.

머리로(知)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분명 이해합니다. 우리의 찬양과 사랑을 원하셔서 우리를 지으시고, 하느님을 떠나 죄와 고통과 죽음에 신음하는 우리를 구해주시려 외아들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랑과 용서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가슴으로(情) 우리는 그 사랑에 깊이 감동합니다. 이 세상 그 누가 이 보잘 것 없는 우리에게 그토록 사랑하기를 간청하고, 또 그토록 엄청난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줍니까? 우리가 어버이의 사랑을 찬탄하고 기리는 것도, 첫눈에 반해 자신을 불사르는 연정을 노래하고 동경하는 것도,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러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절대적인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 자유로운 의지로써(意) 결단을 합니다. “주님 사랑을 깨달았으니 이제 내 일생을 주님께 바칩니다.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새사람 저는 주님 안에서 순종하고 사랑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겠나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아직 우리의 삶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머리에는 끝없이 이런저런 의심이 일어납니다. 뜨거웠던 감동도 시간이 흐르면  차츰 약해지기 마련이고 다 강력한 체험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우리의 다짐도 세상의 유혹과 시련에 가시덤불 속의 씨앗처럼 숨 막힙니다.


주님께서 연약한 우리의 이 모든 사정을 모르실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또 다른 협조자”,“진리의 성령”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홀로 고통의 바다를 떠돌며 신음하고 눈물짓지 않습니다.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 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와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 주님의 모습은 뵈이지 않고, 유혹과 시련이 삼킬 듯 몰려올 때, 정녕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의심이 들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협조자 성령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습니다.

생활이 힘겹고 우울하며, 병고가 닥치고 경제적인 궁핍에 두렵고 심란할 때, 우리를 지키시고 이끄시는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을 부르십시다. 세상 일, 가정 일은 고사하고 내 육신, 내 마음조차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와 함께 사시며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신” 성령님을 의지합시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가장 큰 축복과 은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