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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1년도설교초록

2011년 8월 28일 (연중22주일) 성서정과 및 강론초록

2011년 8월 28일 (연중 22주일) 성서말씀  / 히포의 어거스틴 주교 증거자 430년

예레 15:15-21

15 "야훼여, 주께서는 저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를 잊지 마시고 도와주십시오. 저를 못살게 구는 자들에게 원수를 갚아주십시오. 언제까지나 모르는 체하시다가 이 몸 죽는 모양을 보시렵니까? 제가 주님 때문에 수모를 받고 있는 줄을 알아주십시오. 16 말씀 내리시는 대로 저는 받아 삼켰습니다. 만군의 야훼 하느님, 이 몸을 주님의 것이라 불러주셨기에 주님의 말씀이 그렇게도 기쁘고 마음에 흐뭇하기만 하였습니다. 17 저는 웃으며 깔깔대는 자들과 한자리에 어울리지도 않았습니다. 주님 손에 잡힌 몸으로 이렇게 울화가 치밀어올라 홀로 앉아 있습니다. 18 이 괴로움은 왜 끝이 없습니까? 마음의 상처는 나을 것 같지 않습니다. 주께서는 물이 마르다가도 흐르고, 흐르다가도 마르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도랑같이 되셨습니다."
19 "그렇다면 이 야훼의 말을 들어보아라. 너의 마음을 돌려잡아라. 나는 다시 너를 내 앞에 서게 하여주겠다. 그런 시시한 말은 그만두고 말 같은 말을 하여라. 나는 너를 나의 대변자로 세운다. 백성이 너에게로 돌아와야지 네가 백성에게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12 사람이 쇠를 부술 수야 없지 않느냐? 북에서 가져온 쇠나 놋쇠를 부술 수야 없지 않느냐?
20 내가 너를 그런 놋쇠로 든든하게 만든 성벽처럼 세우리니, 이 백성이 아무리 달려들어도 너를 꺾지 못하리라.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며 너를 도와 구하여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21 나는 너를 악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주며 악한들의 손아귀에서 빼내 주리라."

시편 26:1-8

1 주여, 나의 무죄함을 /밝혀/ 주소서. ‖ 깨끗하게 살며 주님만을 /철석 ․ 같이/ 믿습/니다.
2 주여, 나를 샅샅이 캐어 보시고 /알아/보소서. ‖ 속속들이 내 마음 /뒤집․ 어/ 보소/서.
3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만을 /쳐다/보면서 ‖ 당신의 진리 따라 /살았/습니/다.
4 사기꾼들과 어울리지 /않았/으며 ‖ 음흉한 자들과 벗하지 /않았/습니/다.
5 악인들의 모임에는 끼지도 /않았/고 ‖ 나쁜 자들과 함께 앉지도 /않았/습니/다.
6 주여, 손을 씻어 나의 무죄함을 /드러/내고 ‖  당신의 제단을 두루 돌며 /노래/합니/다.
7 나에게 하신 놀라운 일들 모두 전하며 ‖ 그 고마우심을 노래로 찬미하리이다.
8 주여, 나는 당신께서 거하시는 집이 좋습니다. ‖ 당신의 영광이 깃든 그 곳이 좋습니다.

로마 12:9-21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십시오. 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고 다투어 서로 남을 존경하는 일에 뒤지지 마십시오. 11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일하며 열렬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환난 속에서 참으며 꾸준히 기도하십시오. 13 성도들의 딱한 사정을 돌봐 주고 나그네를 후히 대접하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복을 빌어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
16 서로 한마음이 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천한 사람들과 사귀십시오. 그리고 잘난 체하지 마십시오.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이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18 여러분의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19 친애하는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서에도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아주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20 그러니 "원수가 배고파하면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면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쌓아놓는 셈이 될 것입니다." 21 악에게 굴복하지 말고 선으로써 악을 이겨내십시오.

마태 16:21-28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임을 알려주셨다. 22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리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돌아다보시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하고 꾸짖으셨다.
24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25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의 목숨을 무엇과 바꾸겠느냐? 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
28 나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임금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

<본기도> 주 하느님, 성자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보여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를 새롭게 하시어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지 않고,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주님께 바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 (마태16:21-28)

예수님께서 왜 구태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되었는가?
약간 썰렁하지만 의미심장한 대답 중 하나는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기도를 잘못해서!”랍니다. “좌우지간 십자가는 결사반대입니다.” 하지 않고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하셨기 때문이라지요.

오늘 복음은 지난 주 베드로의 고백에 이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 대한 제자들의 신뢰가 깊어진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께서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다시 일으켜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때 베드로가 의연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됩니다.’고 나섰다가 예수님께 꾸지람을 듣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수난예고”란 제목이 붙은 오늘 복음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고계신 예수님의 영험한 예지능력이 초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일들을 미리 다 알고 그 예정에 맞추어 태연히 일생을 사셨다면 엄밀히 예수님은 쇼를 하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람되심은 그런 일이 아니고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살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수난의 성격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길을 고난의 길을 감수하는 길로 여기셨을까요? 왜 우리에게도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권력과 명예를 드높이고 반대자를 제압하며 구원자로서의 사역을 행했더라면 더 멋진 일 아닐까요? 우리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덕분으로 이 세상에서 복을 가득 받아 부귀영화를 누리며 건강하게 천수를 누리다가 저 세상에서도 천국복락을 누리면 좋은 일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류했던 베드로의 경망스러움을 얕보고 나무란다면 지나친 일이고 엉뚱한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사역을 위협하고 마침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주역들은 베드로가 아니라 원로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나쁜 사람들일까요? 아닙니다. 생각보다 그리고 우리보다 그들은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을까요?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세상의 죄를 대속하시려는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돕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아 피흘리게 하는 일을 맡은 것일까요?
베드로가 과연 어리석은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우리는 구원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은 세상살이를 포기하고 교회 일에만 충성을 다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은 자기를 넘어서며, 자기를 완성하는 일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일은 자포자기 하는 일이 아니라 세상이 강요하는 가짜 이미지에 속아 매달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짜는 진짜 앞에서 드러나는데 진짜는 하느님께서 말씀의 빛으로 비추어주시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구원의 삶은 진짜 자기를 깨달아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도록”이 아니라 “세상을 참되게 살도록” 구원 받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우리를 휴거(携擧)하여 하늘로 집어 올리는 일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질서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미 자기의 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충분한 자기 논리로 무장하였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시려 자신을 희생하신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해하면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의 질서를 전하시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질서를 지키려는 기득권자들과 충돌하신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가 부딪히는 경계선 위에 세워집니다. 부활의 빛에서 보면 십자가는 세상의 질서가 하느님의 질서에 의해 정복되는 중심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지만 하느님의 질서를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질서를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을 짐승의 수준에서 일으켜 하느님의 자녀로 드높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상황에 따라 우리가 선택하기도 하고 피하기도 하는 처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려면 우리의 삶 자체가 반드시 십자가의 길이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하느님 은총의 생생한 증거, 현존의 증표가 되고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께 우리 믿음을 내세워서 무엇을 구하고 얻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은 우리 삶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을 주님과 함께 걷는 일인 것입니다. *

<강론초록2>
                            예수를 따르는 길 -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라는 분의 가르침과 삶과 영을 통하여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참으로 알고 동시에 우리 인생의 삶이란 마땅히 어떠해야 하는가를 깊이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깨달음과 고백을 온 몸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인 것은 단순히 초월자, 절대자에게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여서 이를 성취한다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성황당에서 치성을 드리던 이들도 다 하던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간구하여 모두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구원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복락도 아니고 단순히 죄의식과 불안감을 벗어버린 마음의 평정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 번뿐인 이 생명,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서 죄와 죽음을 이기며 기쁨과 보람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비참하고 어두운 역사 가운데에서 하느님 나라를 소망하시며 사셨던 예수님은 스스로의 운명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인생임을 깨달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외면적으로 보여지는 것 같은 어둡고 참담한 패배의 길이 아니라 실제는 찬란한 승리로 이어지는 부활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사랑과 순종으로 기꺼이 걸어서 우리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바로 당신께서 실제로 경험하신 삶의 비결을 일러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기를 버리는 것”은 이 세상살이를 자기가 중심이 되어 이기적으로, 독선적으로, 자기에 갇혀 살지 말고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버린다고 해서 세상을 초탈한 사람처럼, 무념무상하게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은 그럼에도 주어진 인생살이에 성실하고 진지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주어지는 책임, 닥치는 고난, 맞서게 되는 시련에 우리는 더욱 의연해야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신 우리의 삶은 이제 단순한 생명의 존속이 아니라 소명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피하는 삶은 비겁한 연명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은 지혜롭고 용감한 초월입니다. *

<강론초록3>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다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내가 우선 잘되고 보아야 남도 도울 수 있고 내가 먼저 구원받아야 남에게도 구원의 도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며 조롱하던 자들도 비슷하게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은 살리면서 자기는 못 살리는구나.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고 말고."  그리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내다보시는 예수님께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하고 만류하던 베드로의 충심마저도 비슷한 생각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요? 어떻게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구분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 구원의 능력이라 할 수 있는 “힘(권력)”과 “사랑(아가페)”을 대비시킬 때 이해됩니다.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권력을 쟁취하여 힘의 논리로 해결하려드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를 희생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으로 풀어가시는 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은 “문제의 원인은 네게 있으므로 내가 아닌 네가 참고 희생해야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상대가 못 참고 대들면 내가 가진 힘으로 혼내주는 것이 인간들의 정의(正義)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네게 강요하지 않고 내가 먼저 나를 내어줌으로써 문제를 풀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마저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도 길이 참으시고 구원의 기회를 닫지 않으시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正義)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논리로 인간적인 업적을 쌓아가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우리의 삶 안에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마치 제 목숨을 잃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를 중심으로 한 좁은 시야를 버리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넓은 시야를 (그것이 참으로 사는 길임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