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11일 연중24주일 성서말씀
창세 50:15-21
15 요셉의 형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쩌면 요셉은 우리가 미워 우리에게서 당한 온갖 억울함을 앙갚음할지도 모르겠다." 하면서 16 요셉 앞에 나가 빌었다. "아버지께서는 세상 떠나시기 전에 당신의 말씀을 요셉에게 전하라 하시면서 이렇게 분부하셨습니다. 17 '형들이 악의로 한 일이건 어떻게 마음을 잘못 먹고 한 일이건 못할 짓 한 것을 용서해 주어라. 네 아비를 돌보시던 하느님의 종들이 비록 악의에 찬 일을 했지만 용서해 주어라.'" 요셉은 이 말을 들으며 울었다.
18 형들도 울며 그 앞에 조아렸다. "이제 우리를 종으로 삼아다오." 19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 대신 벌이라도 내릴 듯 싶습니까?" 20 하면서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에게 못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21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시편 103:8-13
8 주께서는 자비하시고 /은혜 ․ 로우 /시며 ∥ 화를 참으시고 /사랑이 /넘치/신다.
9 끝까지 따지지 /아니/하시고 ∥ 앙심을 오래 /품지 /않으/신다.
10 우리 죄를 그대로 묻지 /않으/시고 ∥ 우리의 잘못을 그대로 /갚지/않으/신다.
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 경외하는 이에게 베푸시는 그 사랑 /그지/없으/시다.
12 동에서 서가 /먼 것/ 처럼 ∥ 우리의 죄를 /멀리/ 치우/시고
13 아비가 자식을 어여삐 /여기/ 듯이∥주께서는 당신 경외하는 자를/어여삐/여기/시니
◎영광이|성부|와∥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그리고 영|원히,|아-|멘
로마 14:1-12
1 믿음이 약한 사람이 있거든 그의 잘못을 나무라지 말고 반가이 맞으십시오. 2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먹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은 채소밖에는 먹지 않습니다. 3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은 가려서 먹는 사람을 업신여기지 말고 가려서 먹는 사람은 아무것이나 먹는 사람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도 받아들이셨습니다.
4 우리에게 남의 종을 판단할 권리가 있습니까? 그가 서거나 넘어지거나, 그것은 그의 주인이 상관할 일입니다. 주님께는 그를 서 있게 하실 힘이 있으시니 그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5 어떤 사람들은 어떤 날을 특별히 더 좋은 날로 여기고 어떤 사람들은 어느 날이나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각각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6 어떤 날을 따로 정해서 지키는 사람도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먹는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으니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가려서 먹는 사람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먹으니 그 역시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7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죽더라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도 주님의 것이고 죽어도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10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11 성서에도, "1)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내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 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 45:23. 12 그 때에 우리는 각각 자기 일을 하느님께 사실대로 아뢰게 될 것입니다.
마태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2)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 로마 금돈의 명칭이다,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 이백 세겔이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2)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 로마 금돈의 명칭이다, 한 달란트는 육천 데나리온, 이백 세겔이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 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본기도> 주 하느님, 교회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용서와 기쁨을 얻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내일 추석명절을 앞두고 오늘 연중24주일을 맞습니다. 마침 오늘 성서정과는 가족공동체와 교회공동체에서 깨어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곧 “용서”에 관한 말씀들을 전합니다.
추석명절이 좋으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즐거우십니까? “엄마, 몇 밤만 자면 추석이야?” 하고 손꼽아 기다리는 어린이의 마음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담겨있었지만 이제 그런 아이의 부모가 되고 보니 명절을 맞는 현실적인 부담이 적지 않게 힘겹습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 대체로 가라앉은 사회 분위기입니다. 가족, 친지가 만나는 것이 즐거우십니까? 어떤 이들은 만날 가족이 없어서 가슴이 아픈가 하면, 또 어떤 이들에게는 가족과 친지를 만나는 일이 도리어 끔찍한 고통입니다. 차례를 지내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서 행복하십니까? 오순도순 송편을 빚고 덕담을 나누는 행복한 집안이 많겠지만,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음식장만, 설거지, 이런저런 잔소리를 참다 못해 명절 후에 이혼법정으로 달려가는 가정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추석명절은 햇곡식을 거둔 감사의 마음을 통하여 천지신명과 조상과 주민이 하나 되는 전통 축제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하느님과 산 이와 죽은 이, 그리고 자연과 이웃이 모두 하나 되는 큰 잔치입니다. 추석 성찬례에 우리는 조상들의 이름을 부르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안에서 그 분들의 수고를 기억합니다. 추석에 지내는 제사, 곧 차례(茶禮)는 “잘 되면 내 탓, 못 되면 조상 탓” 하는 식의 발상에 근거한 것일 수 없습니다. 조상들을 배고픈 귀신으로 여기며 혹시라도 해꼬지를 당할까봐 음식을 바쳐 달래려는 불유쾌한 시도가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나타내실 때에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으로 계시하십니다. 인간들이 겸허히 소중하게 이어가는 믿음과 전통 속에 하느님은 함께 하시고, 그 하느님을 통하여 조상들은 우리와 함께 여전히 살아계신 것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의미를 가르치시며 이 대목을 상기시키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감사성찬례는 실상 별세한 이들과 함께 바치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삶과 죽음은 별개의 일이 아니라 연결된 하나의 삶의 과정입니다. 산 이와 죽은 이는 생사의 차이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차원 안에서 소통하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와 남의 구분도 육신의 실체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영으로 서로 연결된 관계입니다. 자연과 인간도 별개로 나뉘어 자연이 인간을 위협하고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관계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자연에게 영적인 차원을 부여하여 구원하는 존재입니다. 이제 추석명절을 기념하며 우리는 이런 진실들을 되새겨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몇 번까지 용서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봅시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경우라면 좋겠습니다만, 상대방이 전혀 뻔뻔스럽고 태연하게 다음에도 같은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저지를 태세라면 어쩌겠습니까? “한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과연 현실성이 있는 가르침일까요? “한없이 용서해야 하는 현실성”은 우리가 얼마든지 무한히 다른 이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는 결코 생길 수 없습니다. 경험하고 고백하거니와 저는 한 번도 용서하기 힘듭니다. 주님께서 한없이 용서하라고 하신 까닭은 우리가 한없이 잘못을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벽한 인간들이 아니고 모자라고 게다가 이기적인 인간들입니다. 용서하는 이는 대단히 믿음이 좋고 수행이 깊고 인격이 훌륭한 것이니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형편없이 잘못을 반복하는 인간들이니 우리가 살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용서하는 길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용서로 시작되어 보살핌과 이끄심으로 이어집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없이 하느님께 용서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도 서로 용서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를 이미 완전히 용서 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고, 우리가 매일 지고 따르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매일 용서하시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어제를 내일과 화해시키는 오늘의 일입니다. 죽은 이를 산 이와 화해시키는 일입니다. 나와 남을 하나 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모시는 일이고 하느님과 함께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 서로를 용납하는 일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로 시작되어 서로를 향한 우리들의 용서로 발전해갑니다.
추석 명절을 맞으며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과 우리 사회와 우리 세상에 진정한 구원의 잔치, 화해의 기회, 용서의 마당이 이루어지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
<강론초록2>
“용서가 바로 사랑입니다”
<강론초록2>
“용서가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 613가지 계명을 예수님께서는 단 두 개로 줄여 “네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쾌한 이중계명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다시 이렇게 표현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는 마음 깊이 영원한 생명, 넘치는 축복, 행복한 삶, 완전한 마음의 평화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외면적인 조건이 충족되어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사랑(애덕)이 채워짐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사랑일 뿐인 하느님의 그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의 힘으로 삶을 살고, 그 사랑을 의지하여 기꺼이 우리의 고난과 죽음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으면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낭만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같은 편으로 서로 좋자고 대가를 주고받는 거래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그 사랑은 바로 ‘용서’라는 말과 가장 가깝습니다. 용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구원의 본질, 사랑의 본질을 드러내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6:44)는 주님의 말씀은 불가능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잘 묵상해보면 사랑이 무엇인가를 깊이 깨닫게 해줍니다. 용서는 우리가 어떤 서운한 감정을 갖고 안 갖고, 표현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는 조건을 따지고 이해관계를 따져서 중재하고 타협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용서는 의지로 결단하는 문제입니다. 나에게 가해진 손해를 너그러이 참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되갚지 않는 것입니다. 원수 같은 그 이의 운명과 변화를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는 일입니다. 모자란 듯 보여도 충분히 위대한 “용서”입니다.
흔히 죄의 문제는 당연히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아야 해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우리는 사회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무수히 많은 법과 벌칙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그 법과 벌칙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법과 벌칙 때문에 도리어 범죄가 더 무성합니다. (참조: 로마서 7장) 참으로 죄를 해결하는 길은 오로지 “용서”를 통한 한 길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을 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용서받는 편에서는 “회개”의 길이며 나날이 새롭게 걷는 “거룩해짐(성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무조건, 무제한의 용서를 말씀합니다. 우리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끝없이 잘못을 범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자녀에 대한 어버이의 사랑이 언뜻 보여주듯 참으로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
<강론초록3>
진심으로 형제들을 한없이 용서하자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주님과 이웃에게 많은 죄를 짓습니다.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실패합니다. 결국 우리는 용서받고 용서하는 “용서”의 길 밖에 달리 길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흔히 “용서”를 우리의 “밉고 싫은 느낌”을 “무덤덤함”내지 “사랑스런 느낌”으로 바꾸는 일인 것처럼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감정”을 우리가 스스로 통제하여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다친 육체가 자연스레 통증을 느끼듯이 상처 입은 마음도 “아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피해를 입어 생겨난 감정은 오랜 시간을 참고 견딤으로써 스스로 아물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억지로 감정 자체를 부정할 수 는 없습니다.
우리는 용서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감정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아픔에도 불구하고 참고 상처에 약을 바르듯이, 우리가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로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치유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아픔과 미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잘못한 그 사람을 저주하거나 그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신 그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에 맡기며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아직은 우리의 감정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미 우리는 화해와 평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처지의 인간들,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필요로 하는 형제요 자매들이 아닙니까?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내 이웃, 형제에게로 흘러야 합니다. 용서는 하느님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윤리입니다.
용서를 모르는 무자비한 인간에게 구원은 없습니다.
“먼저 용서의 속옷을 입어라. 우리가 용서하지 않을 때 더 이상 하느님 사랑의 겉옷을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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