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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초록/2012년도설교초록

2012년 12월 16일 대림 3주일(다해) 성서말씀 / 석포리성당 축성



 

2012년 12월 16일 대림 3주일(다해) 성서말씀 / 석포리성당 축성

 

스바 3:14-20

14. 수도 시온아, 환성을 올려라. 이스라엘아, 큰소리로 외쳐라. 수도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축제를 베풀어라. 15. 야훼께서 원수들을 쫓으셨다. 너를 벌하던 자들을 몰아내셨다. 이스라엘의 임금, 야훼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니 다시는 화를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16. 그 날이 오면, 예루살렘에 이렇게 일러주어라. "시온아, 두려워 마라. 기운을 내어라. 17. 너를 구해 내신 용사 네 하느님 야훼께서 네 안에 계신다. 너를 보고 기뻐 반색하시리니 사랑도 새삼스러워라. 명절이라도 된 듯 기쁘게 더덩실 춤을 추시리라."
18. "나는 너에게 내리던 재앙을 거두어들여 다시는 수모를 받지 않게 하리라. 19. 그 때가 되면, 너를 억누르던 자를 다 없애버리고 절름발이는 고쳐주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내어 고국으로 데려오리라. 그 때가 되면, 온 세상에서 내 백성은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20. 그 때가 되면, 내가 너희를 데려오리라. 너희를 이리로 모아들이리라. 내가 너희의 면전에서 너희에게 광복을 안겨줄 때, 너희는 세계 만방에서 칭송을 자자하게 받으며 이름을 떨치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환희의 송가 (이사12:2-16)

◯ 진실로 하느님은 나의 /구원/이시니 ‖ 굳게 의지하여 나 겁내지 /아니/하리/라
◯ 하느님은 나의 힘과 /노래/이시며 ‖ 나의 /구원․이/ 되십/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기뻐/하며 ‖ 그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 그 날에 너희는 이렇게 /말하/리라 ‖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분의 이름을 /높이/ 불러/라’
◯ ‘그 분께서 이루신 일을 만민에게 /알려/라 ‖ 그 이름을 높이 기리도록 /선포/하여/라
◯ ‘시온의 백성들아, 소리 높이 기쁨의 노래를 /불러/라 ‖ 너희가 기리어야 할 분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시다.
◉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 영/원히/ 아~/멘

 

필립 4:4-7

4.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5.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에게 보이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6.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으로서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루가 3:7-18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8.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리고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다.' 하는 말은 아예 하지도 마라. 사실 하느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10. 군중은 요한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1. 요한은 "속옷 두 벌을 가진 사람은 한 벌을 없는 사람에게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도 이와 같이 남과 나누어 먹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2. 세리들도 와서 세례를 받고 "선생님, 우리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3. 요한은 "정한 대로만 받고 그 이상은 받아내지 마라." 하였다. 14. 군인들도 "저희는 또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요한은 "협박하거나 속임수를 써서 남의 물건을 착취하지 말고 자기가 받는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하고 일러주었다.
15.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던 터였으므로 요한을 보고 모두들 속으로 그가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16. 그러나 요한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그분은 나보다 더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 17.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 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다." 18. 그 밖에도 요한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권하면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죄악으로 인해 선이 가려진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자를 보내셨나이다. 비옵나니, 모든 불의와 부정을 성령의 불길로 정결하게 하시고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기쁘게 우리 삶에 모시는 주님 (루가 3:7-18)

 

성탄일은 단순히 예수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12월 25일은 예수님이 실제로 나신 날이 아니라 태양신의 축제일이었다지요. 교회가 이 날을 성탄일로 삼은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세주로, 곧 이 어두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음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 땅에 “임마누엘” 의 약속, 곧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실현되었음을 기념하는 것이지요.

 

“임마누엘”은 이미 성취된 약속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질문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건 바로 우리 곁에, 우리 안에 오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우리 삶의 현실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소원을 척척 들어주시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이렇게 이루어주시고 저것을 저렇게 해결해주십사 많은 기도를 바칩니다. 어쩌면 임마누엘 하느님을 맞이하는 마음도 “하느님이 가까이 오셨으니 이젠 좀 더 손쉬운 청탁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저 세상에서 우리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돌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일도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셔서 그 보혈의 공로로 우리 죄를 씻어주셔서 우리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시기 위함이라고 믿고 감사합니다. 교우 여러분은 어떤 기대를 가지고 계신지요. 위의 두가지 기대는 모두 중요한 믿음이긴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를 가지고 과연 예수님께서 어두운 이 세상에 참 빛으로 오셨다는 고백과 선포가 충분히 가능할까요?


오늘 대림3주일에 우리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임마누엘 하느님, 곧 예수 그리스도 께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기대를 바로 살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세례자 요한의 선포는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여라!”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믿음은 하느님을 저 밖에 저멀리 계신 능력자로 두려워하며 섬기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 오시는 하느님을 내 맘에, 우리 삶에 기쁘게 모셔들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면과 삶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해 필요한 아픔과 수고를 회피한 채,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통해 밖으로 주어지는 해결책을 구하고, 마음에는 가짜 위안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 신앙에는 열매가 없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통해서 하루하루 새롭게 변화되고 성숙하는 우리의 영(靈)과 삶! 이 대림절기에 우리가 설레임으로 품고 키워가는 영원한 소망입니다.*

 


<강론초록2>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 (루가 3:7-15)

 

우리는 ‘회개했음’을 눈물을 흘리거나 다짐의 말로써 표현합니다. 죄의 고통과 용서의 은총을 생각하면 당연히 눈물이 흐릅니다. 결단의 마음을 맹세의 말로 표현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빨리도 그 뜨거운 감동이 식어 버리고 너무도 쉽게 다짐의 말을 어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흐르는 눈물이나 외치는 맹세가 아니라, 다만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가 회개의 증거임을 되새기게 됩니다.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 세례자 요한의 외침입니다. 징벌을 피하고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인정받을 만한 특별한 행업(行業)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도리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사는 일은 이런저런 종교적 의례를 바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은 우리 삶의 태도를 바꾸는 일입니다. 율법준수, 십일조와 제물봉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살이에서 바르게 살려는 마음, 본분을 다하며 더불어 사는 태도,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종 “은총”의 경험을 종교적인, 주관적인, 심리적인, 어떤 느낌으로 좁혀 이해하곤 합니다. 가령 예배가 은혜로웠다는 표현은 예식이나 말씀이 내게 어떤 감동을 주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에 감동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은총의 감동이 내 삶을 실제로 어떻게 얼마나 변화 시켰는가 입니다. 감정의 기복을 넘어서 이 세상에 대한, 재물과 권력과 명예에 대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태도와 실천이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진실로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의 내면과 삶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변화시키고 성장시키고 성숙시키는 일입니다. 자아를 포기하는 아픔과 자기를 봉헌하는 수고를 통해서 우리는 변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길입니다. 온전히 변화되지 않았으면서 변한 척 내세우는 것은 ‘위선(僞善)’입니다. 자신의 변화 없이 다른 사람의 변화를 강요하는 일은 ‘정죄(定罪)’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싫어하시고 걱정하신 행태입니다.

우리는 종종 변화의 아픔과 수고를 회피한 채, 그저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통해 위안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집니다. 마치 동호회에 가입하듯 교회를 선택하고 내 생각과 정서를 만족시키는 메시지를 요청합니다. 하느님께 조건을 걸고 거래하듯 기도하며 그 응답을 계산하여 감사를 표시합니다. 기쁨 없이 두려움을 감춘 채 생활합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외침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의 증거를 행실로 보이라!” 참으로 회개하는 이만이 늘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을 누리며 삶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전지 전능하신 하느님은 반드시 때를 따라 우리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은 동시에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덧없는 맹세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도무지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연약한 우리임을 겸손히 아룁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내맡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이런 일들이 대림절에 다시금 되새기는 참된 회개의 내용입니다. 참된 회개로 준비하는 대림3주간을 통해 우리 마음과 삶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성탄의 기쁨이 더욱 깊고 풍성하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