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3일 (연중 30주일) 성서말씀
복계리성당 축성
레위 19:1-2, 15-18
복계리성당 축성
레위 19:1-2, 15-18
1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백성 온 회중에게 이렇게 일러주어라.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15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지 마라. 영세민이라고 하여 두둔하지 말고, 세력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봐주지 마라. 이웃을 공정하게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겨레 가운데서 남 잡을 소리를 퍼뜨리지 마라. 이웃을 죽을 죄인으로 고발하지 마라. 나는 야훼이다. 17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마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주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벗는다. 18 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마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아껴라. 나는 야훼이다.
시편 1
1 복되어라. 악을 꾸미는 자리에 따라 가지 않고: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않으/며 ∥ 조소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
2 주께서 주신 법을 낙|으로| 삼아 ∥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3 그에게 안 될 일이 무엇이랴: 냇가에 심어진 나무 |같으|니 ∥ 그 잎사귀가 시들지 아니하고, 제 철 따라 |열매|맺으|리.
4 사악한 자는 그렇지 |아니|하니 ∥ 바람에 까불리는 |겨와|도 같|아,
5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머리조차 들지 |못하|고, ∥ 죄인이라 의인들 모임에 끼지도 |못하|리-|라.
6 악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르|나, ∥ 의인의 길은 주께서 |보살|피신|다.
○ 영광이 |성부|와 ∥ 성|자와|성령|께 처음과 같이 |지금|도 ∥ 그리고 영|원히,|아-|멘
1데살 2:1-8
1 교우 여러분, 아시다시피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간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2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우리가 전에 필립비에서 고생을 겪고 모욕을 당했으나 여러분에게 가서는 심한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3 우리는 잘못된 생각이나 불순한 동기나 속임수로 여러분을 격려하는 것은 아닙니다.
4 우리는 하느님께 인정을 받아 복음을 전할 사명을 띤 사람으로 말하는 것이며, 사람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까지 아첨하는 말을 쓴 적도 없고 속임수로써 탐욕을 부린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6 우리는 여러분이나 다른 사람들이나 할 것 없이 사람에게서는 도무지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권위를 내세울 수도 있었으나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는 마치 자기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여러분을 부드럽게 대했습니다. 8 이렇게 여러분을 극진히 생각하는 마음에서 하느님의 복음을 나누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바칠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했습니다.
마태 22:34-46
34 예수께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35 그들 중 한 율법교사가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36 "선생님, 율법서에서 어느 계명이 가장 큰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다.
37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고, 39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40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41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42 "너희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누구의 자손이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43 예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화를 받아 그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은 어떻게 된 일이냐? 44 '주 하느님께서 내 주님께 이르신 말씀,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굴복시킬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어라.' 하고 다윗이 읊지 않았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윗의 자손이 되겠느냐?"
46 그들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날부터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가르쳐주셨나이다. 비옵나니, 우리가 주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게 하소서. 이는 성부와 성령과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강론초록1>
사랑은 대상(對象)아닌 상대(相對)와의 관계 (마태 22:34-46)
우리들의 가장 큰 갈망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원하는 사랑이 왜 모두에게 그다지도 어려운 것일까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송가를 노래한 바울로 사도의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회심전의 바울로는 율법을 세세히 잘 지킴으로써 하느님의 인정과 보상을 받고자 했던 바리사이였습니다. 그런데 바울로는 율법이 인간의 외면적인 행위를 통제하기는 하지만 인간 내면의 동기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에 지치고 실패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전히 바울로는 훌륭한 바리사이였고 율법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열심을 내고 있었지만 더 중요한 사실, 곧 율법을 지키는 일이 인간을 사랑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율법 자체의 결함이기보다는 율법을 통해서 하느님을 대상화하고 이웃을 대상화하는 데서 비롯한 문제였습니다.
바울로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 사건의 깊은 상황은 신비롭지만 결론은 분명합니다. 바울로는 예수님을 자기 관념의 대상이 아닌 실제 대면한 상대로 경험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선입견, 자신의 입장에서는 율법에 의해 저주받은 자에 불과한 예수가 이제 빛 가운데 나타났습니다. 바울로에게 그 일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환상과 현실의 차이는 객관적 사실성 여부가 아니라, 머리로 지어낸 관념의 대상인가 아니면 온 존재로 마주하는 상대인가가 관건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상이 아닌 상대로 만나면서 바울로는 비로소 사랑의 현실성에 눈뜨게 됩니다. 사랑은 타자를 나의 대상(對象)으로 삼기를 포기하고, 타자 앞에 나를 정직하고 진실하게 상대(相對)로서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는 대개 율법을 지키면 좋아해주고 보상해주는 하느님의 이미지를 갖습니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사랑이란 개념을 누구를 좋아하는 정서의 문제와 혜택을 받는 문제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에 대해서도 그가 내 요구를 지키고 내게 유익을 주면 사랑의 느낌을 갖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반감을 갖고 정죄하는 일을 당연히 여기게 됩니다. 이런 느낌의 사랑은 변덕스럽고 천박하여 우리가 갈망하는 그런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란 말이 그리도 흔한 이 세상 속에서 여전히 참된 사랑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대상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내리신 율법이라 할지라도 그 율법을 가지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율법이 좋은 것이긴 하지만 그 율법을 가지고 이웃을 율법의 대상으로 삼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은 “율법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상대”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중심이 되어 대상을 좌우하려는 일방적 관계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엄연한 나의 상대와 관계입니다. 하느님을 상대하면서 그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아무 것도 아님을 자각하며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될 가능성을 열게 됩니다. 절대자 앞에서 좁은 자아를 초월한 큰 자기로서의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의 이유일 것입니다. 둘째 계명대로 이웃을 나와 동등한 존재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 눈이 뜨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진정한 필요와 이웃의 필요,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 정직하게 됩니다. 너의 존재가 나와 경쟁하는 불편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는 결국 또 다른 나임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와 너가 깊이 만나는 차원이 참 사랑이요 기쁨과 행복의 자리임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
<강론초록2>
사랑, 불가능이 아니라 불가피한 계명(마태 22:34-46)
예수님은 당대의 율법 613가지를 사랑의 이중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명쾌하게 요약해주셨습니다. 세상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정신을 한마디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랑은 그저 정신없이 휩쓸리거나 푹 빠지게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른바 자기애가 중심이 된 "에로스(Eros)"가 아니라 자기를 초월하는 "아가페(Agape)"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아가페 사랑이란 결코 추상적인 이론이 아님을 압니다. 참인간 예수께서 성부께 대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사랑 속에 사셨고, 참하느님 성자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하여 자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사랑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입니다.
성경의 사랑은 하느님과 우리가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임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무엇인가 하느님께 사랑의 물증을 보여야만 그 대가로 하느님의 사랑을 얻게 되리라고 오해합니다. 이웃사랑도 하느님의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지독한 착각이요 오해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그 자체가 마치 어버이와 자녀간의 끊을 수 없는 사랑과 같고, 이웃사랑도 마치 피를 나눈 형제자매간의 불가피한 사랑과 같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엇을 하느님께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무엇이 부족해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받으려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그저 우리 자신을 활짝 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우리 힘으로 과연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의 이끄심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우리는 이미 잘 압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주님의 유일한 “새 계명”입니다. 우리는 벗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여 이루는 참사랑을 짐짓 불가능한 것처럼 냉소하면서 고작 적당히 유익을 주고받는 거래에 만족하려 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사랑은 분명 가능하고 또 불가피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사랑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 가운데 현존하십니다. 사랑은 우리의 감정적 이끌림이나 애착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송가에서 사랑이란 말 대신에 나라는 주어를 넣어서 천천히 읽으며 묵상하십시오. 그 사랑은 바로 나의 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강론초록3>
가장 큰 계명 , 사랑 !
모든 종교는 다 사람에게 이롭자고 있는 것일 터, 문제는 그 가르침대로 따르고 실천한 결과가 정말 실제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인가 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사이파사람들은 나름대로 신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해서 자그마치 613가지(금령 365, 명령 248)의 계명들을 규정하여 그 철저한 준수를 고집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사람들의 삶을 율법으로써 도와준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덧씌워서 정죄하고 억압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소소한 율법규정을 지키느냐 여부에만 많은 관심을 두고 정작 더 중요한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을 바로 잡아주시고자 많이 나무라셨는데 그들은 여기에 늘 반발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바리사이파중 한 율법학자가 마치 “당신이 율법의 중요성을 알기나 하오?” 하듯이 예수님의 속을 떠보려고 “율법서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물어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 많은 613가지 계명을 단 두 가지 계명으로 요약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이 “이중계명”은 또 다른 계명이 아니라 모든 계명의 참된 정신을 밝히신 것입니다. 613가지 계명이 도리어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역할을 하고 만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은 더 이상 이런저런 율법에 따라 우리에게 벌을 주는 심판관이 아닙니다. 그 분은 자비한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그 분의 그 놀라운, 절대적 사랑을 깨달으면 우리 삶은 해방과 평화와 사랑의 삶이 됩니다. 우리는 이제 하느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 마음으로 기꺼이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하게 됩니다. 그때 율법의 실천과 사랑은 하나가 됩니다. 그렇게 사랑의 마음으로 율법을 실천하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기 마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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