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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야기- 신앙체험의 정리와 반성/성공회이야기

<성공회계약>에 비추어 보는 대한성공회의 일치와 선교

최근 대한성공회 관구 홈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습니다. 

<2010년 한일성공회 주교합동회의에서 합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2.  세계성공회 공동체 문제 
관구 내의 자체적 사목상황 때문에 성공회 공동체에서 특정 관구를 제외시키는 것은 성공회의 전통 및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내년 세계성공회 관구장 회의에 미국과 캐나다성공회 관구장을 참석시키지 않겠다는 ACC 입장에 한국과 일본성공회가 함께 부당하다는 의사를 표명하기로 합의하다. ...>

개인적으로 한일 주교원이 합의한 인식에 공감하는 것은 저 역시 이 문제에 대하여 약간의 신학적 고찰을 해보았고 이를 지난 2009년도에 성직자 웍샵과 평신도대의원 웍크샵에서 나누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짧은 견해가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모색도 있었다는 것을 전하고자 할 뿐입니다. "불확실한 길을 불완전한 안내자를 따라 걷는다"는 성공회의 길을 함께 가는 우리는 더욱 더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의지해야 하리라는 생각입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께서 관련된 주제에 관하여 한글로 쓰여졌거나 번역된 글을 알고 계시면 소개해주시거나 링크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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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회계약>에 비추어 보는 대한성공회의 일치와 선교

1. <성공회계약>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제게 <성공회계약 Anglican Covernant> 문건은 낯설고 버겁고 불편합니다. 아마도 저와 평신도 대의원 여러분을 포함하여 대한성공회의 모든 이들에게 거의 공통적인 느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뭔가 절실히 와 닿지도 않는 주제이기도 하고 그동안 심도 있는 설명이나 논의의 기회가 많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계성공회는 대한성공회에게도 2010년까지 이 <성공회계약>에 관한 결정을 회답해주기를 요청하고 있고 2년마다 열리는 관구의회 시점 때문에 이번 의회에서 논의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회 계약>의 발단이 미국 성공회의 동성애자 주교 서품에서 비롯된 세계 성공회의 일치 문제인 것은 다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신앙인의 입장에서 교회가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을 찬성하는가 반성하는가를 대답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저 역시 한동안 단순하게 “당연히 동성애는 반대(동성애를 용인하고 동성애자의 결합을 축복하거나 동성애자를 성직에 서품하는 일은 성서와 교회전통에 비추어 볼 때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동성애 문제가 각 교구의 선교적 독립과 자치를 전제로 하는 세계성공회의 일치를 해치는 계기가 되는 것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는 취지의 입장이 대한성공회의 주교님들이 표명하는 견해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따라서 성공회계약은 찬성, 더 논의하는 것은 골치아픈 일”이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공감하시겠지만 이는 지나치게 단순 소박한 견해인 것 같습니다.

사실 잘 살펴보시면 이 성공회계약서는 직접적으로 동성애 문제를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이 성공회계약에 대한 검토는 단순히 동성애를 찬성 반대하는 문제로 초점을 좁히면 우리로서는 얻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성공회계약>의 논의에는 “역사적 주교직의 친교를 바탕으로 하는 성공회공동체의 전통”과 “그 전통이 복잡다단해지는 선교 상황 속에서 가지는 의미와 한계”, 그리고 “성공회의 신앙적 권위의 재확인 문제”가 얽혀져 있다고 생각됩니다.

동성애 문제 자체가 긴급한 주제가 아닌 우리로서는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우리 대한성공회가 어떠한 구원론과 교회론과 선교론을 가지고 어떻게 일치를 이루며 선교를 실천하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대한성공회의 교회론과 구원론과 선교론은 우리의 <헌장 및 법규 서문>과 <교리와 전례에 관한 기본선언>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2. 대한성공회 헌장및 법규 서문, 교리와 전례에 관한 기본선언

대한성공회는 헌장 및 법규의 서문과 교리와 전례에 관한 기본선언을 통하여 스스로의 정체성과 주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한성공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로서, 세계에 있는 모든 성공회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서, 하나이고, 거룩하며, 공번되고, 사도적인 전통을 계승하는 교회이다. 대한성공회는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증거하여 이 땅의 모든 백성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섭리에 의하여 구원받도록 기도하고 실천하며, 다른 기독교 형제 교회들과 일치를 도모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바탕을 둔 한국인의 교회로 성장하고자 한다.

대한성공회는 이 나라가 영원히 번영하여 마침내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를 보존하는 하느님의 나라로 변화되도록 기원하고 노력하며,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계에서 모든 차별과, 장벽과, 분열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주신 선교의 사명을 다 하고자 한다. (...) 이제 대한성공회는 세계의 모든 성공회와 형제된 교회로서, 그 믿음과 전통을 함께 나누며, 자주, 자립, 자전의 정신을 바탕으로 1992년 4월 21일 제 11 차 전국의회에서 대한성공회의 새로운 헌장과 법규를 제정, 공포함으로 독립관구임을 선포했으며...

대한성공회 전국의회에 회집한 모든 주교와 성직자 및 신자 대표는 대한성공회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교리와 전례에 관한 기본선언을 채택한다. 이 선언을 채택함에 있어서,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가 모두 하나가 되어야 함을 우리의 신앙의 본질로서 고백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써 거룩한 공교회의 한 가족이 됨을 믿는다. 우리는 모든 기독교의 전통이나, 관습을 따르고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의 뜻대로가 아니라 성신의 사랑과 인도하심에 따라 행할 것을 다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성공회 공동체의 신앙과 직제를 바탕으로 모든 교회와 협동해 나가고, 무엇보다도 교회 분열 이전의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신앙 고백과 일치의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시고 그의 사도들을 통하여 전승하신 기독교 신앙과 직제로서, 이 세상 끝날 까지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필수적인 은혜이다.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참 신앙을 실천하여 이 역사에 하느님의 나라를 구현하고자 이 선언이 영원히 계승되기를 바라면서, 교리에 관한 기본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힌다.

첫째, 대한성공회는 신약과 구약성서를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말씀이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모든 사항을 가르침으로써, 신앙의 법칙이며 근본적인 모본임을 선포한다. 또한 제2경전을 생활의 모범과 도덕의 교훈으로 삼는다.

둘째, 대한성공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에 의하여 계승된 믿음의 전통(사도신경)과, 교회 분열 이전의 에큐메니칼 공의회가 채택한 믿음의 보편적 진리(니케아신경)들을 우리의 신앙의 근거로 존중하고, 이 민족의 화해와 구원을 위한 믿음을 그리스도의 삶을 통한 고난과 가르침에서 구한다.

셋째, 대한성공회는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립하시고 교회를 통하여 계승하도록 명하신 성세성사(세례)와 성체성사를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규례에 따라 실행한다. 이외에 동서교회가 성사로 지켜온 견진, 고해, 신품, 혼배 및 조병 성사를 존중한다.

넷째, 대한성공회는 역사적인 교회로 사도직을 계승하며, 교회가 전통적으로 계승해 온 3성직(주교, 사제, 부제)을 교회의 기본 성직직제로 한다. 주교는 성서의 가르치심과 성교회의 규칙에 따라 교회의 사부로서의 권위를 가지며, 교회의 바른 신앙을 지키고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권한을 가진다.

대한성공회는 하나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대한성공회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공도문과 규례에 따라, 주교에 의하여 합당하게 권위를 받은 이에 의하여 모든 성사를 집행하고, 전례의 일치를 도모하여야 한다. 교회는 주교의 사목아래 성서의 증인이며 수호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성직자와 신자는 그의 사목적 권위에 순응하여야 한다. 대한성공회는 세계의 모든 성공회와 성사의 상통을 하며, 동시에 한국의 문화와 전통에 적합한 전례와 법식을 제정하는 권한과 교리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이 기본적 선언을 변경하고자 할 때는 헌장 및 법규의 개정절차에 따라 승인된 개정(안)을 세계성공회의 모든 나라 관구장주교에게 보내어 대한성공회와 그 나라 교회와의 상통관계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아야 한다.


3. 역사적 주교직의 현실적인 의미들

위의 교리에 관한 기본선언은 실상 우리가 세계 성공회의 일치 기준인 시카고 람베스 4개항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확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의 일치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제안하는 그 내용들은 또한 서로 다른 교회와의 다름과 같음과 친교를 식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성공회의 제안과 노력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운동으로 발전되었거니와 현실 교회들의 차이는 크게 교리적인 차이와 직제적인 차이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리적인 일치를 통해서 교회의 일치를 확인하려는 노력은 성서, 신경, 성사에 대한 존중을 요청하고 확인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여전히 논란거리로 남는 것은 주로 직제의 문제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교리적인 일치가 직제적인 일치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직제의 문제가 더 일치의 걸림돌이 됩니다. 그 이유는 단지 직제의 기득권을 고집하는 이들의 복음의 본질에 대하여 불충실하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왜 구태여 성공회가 직제에 있어서 역사적 주교직을 내세우는 것일까 그 이유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1)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

성공회가 교회의 정체(政體)로 내세우는 “역사적 주교직”은 실제로 교회일치의 장애가 되어왔습니다. 장로제도나 회중제도를 교회 정체(政體)로 택한 개신교와는 말할 것도 없고 대표적인 주교제(실은 교황제) 교회인 천주교와도 사도계승의 확실성에 대한 견해차이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천주교의 주장에서 경험하는 사도계승의 정통성 문제를 성공회는 감리교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 에큐메니칼 운동과 신학의 발전에 힘입어 역사적 주교직만을 성서적인 것 또는 초대교회적인 것으로 주장하거나 안수에 의한 승계를 본질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일은 점차 양보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공회는 왜 교회 정체로 역사적 주교직을 택하고 고집하는 것일까요?

역사적 주교직은 전통을 존중하고 이어가려는 노력을 포함합니다. 주교제는 문헌적 근거를 갖는 가장 오랜 교회 정체(政體)입니다. 주교직은 여러 가지 전통들의 기원과 발전에 밀접하게 얽혀있습니다. 이 때의 전통은 성서의 권위에 의해 최소화되어야 하는 부정적인 부가물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성서와 복음의 본래적인 증언을 오늘에까지 운반해주는 역사적인 경험과 반성들의 총화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에서 추출한 “순복음”을 믿는 것이 아니라(사실 그런 복음은 없습니다), 교회 이천년의 역사를 통해서 경험하고 축적되어 신앙적으로 성찰한 “전통의 복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전통의 가치를 흔히 “거인 위에 무등을 탄 난쟁이”라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하게 되는 것을 기억합니다.

(2) 공동체의 신앙적인 일치

역사적 주교직이 현실적으로 교회일치의 장애가 된다는 말은 역설입니다. 본래 역사적 주교직은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성공회는 교회공동체의 일치를 주교직이라는 교회의 직제를 통해서 확보하려 합니다. 이는 실제 성공회의 탄생과 발전과정에서 확인되는 일입니다. 중세 천주교 이후 주교직의 실태는 교황(수위)권에 의해 왜곡되어 이에 대한 비판이 거셌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로마 교회와 단절하면서도 대륙의 개혁파들과는 달리 주교직을 유지하였습니다. 성공회 내 청교도(퓨리탄)는 계속하여 주교직의 폐지를 시도하여 실제로 성공회 안에서 성공한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가 다시 주교직을 회복하여 온 것은 그것이 잉글랜드 안에서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일에 매우 현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미 볼 수 있듯이, 교회 안에서 생겨나는 신앙의 다양성은 본래적이고 불가피한 성격이 있습니다. 그 다양성을 분열이 아닌 일치의 상태로 조정하고 이끄는 일이 주교직의 본래 역할인 것입니다.

(3) 전례와 선교의 중심으로서의 역사적 주교직

성공회의 주교직은 성공회가 전례적인 교회, 성사적인 교회라는 성격을 유지하는 일과 본질적으로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연스런 통념처럼 생각하듯, 신자들의 집합으로서의 교회공동체가 전례라는 종교적 기능을 나중에 덧붙여 행하는 것이라는 이해는 실제로는 교회의 본질과 어긋나는 일종의 오해에 가까운 견해입니다. 성경과 초대교회사를 살펴보면 도리어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포함하는 전례 행위를 통하여 교회공동체가 그 내용과 형식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습니다. 교회가 세례공동체라는 점, 그리고 “성찬이 교회를 만든다”는 신학자 앙리 드 뤼박의 표현을 떠올려 봅니다. 주교직과, 교회의 사목을 위임받은 사제직은 교회를 형성하는 이 전례- “말씀과 성사”의 담당자로서 중요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교리적인 인식을 전달하여 동의하는 신자들 얻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생활과 교회의 본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세상 속에서 삶으로 살아내고 펼쳐내는 일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전례와 분리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전례의 본질이 곧 세상에서의 우리들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봉헌하고 성령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 곧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심으로써 다시금 거룩해진 존재로서 세상에 파견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례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교회공동체로서 마땅히 행하도록 맡겨진 자기 정체성 확인입니다.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부르심을 따라 이룬 하느님의 백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깨닫고 그것에 참여하며, 우리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봉헌하게 됩니다. 전례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전례는 선교의 사명에 파송 받는 일이 되고 선교는 전례를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주교직과 사도계승의 의미는 개인에게 전해지는 신비로운 자격이 아니라 교회공동체가 함께 이어받는 사도들의 선교적인 증언과 실천에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복음을 살고 전하는 신자 공동체의 각 성원들은 역사적 주교직의 사도적 계승의 내용들 - 곧 사도들이 경험하고 전했던 하느님의 창조와 계약과 구원의 선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언 사역에 온전히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 행동이며, 이 선교 행동을 교회가 일치된 몸으로 지속하기 위한 도구가 바로 주교직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교회의 선교를 향한 일치 안에서 주교직이 요구되는 것이지, 선교를 뺀 "교회의 일치"만을 위한 주교직은 아닌 것을 기억해봅니다.


4. 다시 <성공회계약>의 논점들을 살펴보며

(1) 성공회가 역사적 주교직을 포함한 삼품(三品)성직을 교회의 직제로 삼은 까닭에 동성애자 주교의 서품이 평신도 동성애자의 존재나 (주교의 위임을 받은) 사제직에 동성애자가 서품되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들 합니다. "주교의 직무는 교회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섬기고 돌보며 교회를 바르게 감독하고 일치를 이루어가며 역사적인 사도직을 지켜가는 것"(성공회 기도서, 360)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같은 논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실상 성서와 전통에서 근거를 발견하기 어려운 여성 사제, 그리고 여성 주교의 서품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논점이라고 생각이 들게 합니다. 물론 동성애를 죄악이나 질병이 아닌 성적 지향의 문제로 용인하는 일은 따로 논란이 되는 문제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만 많은 분들은 동성애란 단어만 들어도 혐오스럽고 마음이 불편하실 지도 모릅니다. 동성애의 용인문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주장과 판단이 분분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식별은 동성애 문제는 흔히 사람들이 노란색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성적 취향(趣向)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의학과 사회학의 전문가들이 객관화시켜 다루는 성적 지향(志向) 문제입니다.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곧 동성애자들의 자기정체성)을 죄악으로 볼 것인가, 질병으로 볼 것인가, 인정할 수 있는 자연스런 현상으로 볼 것인가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교회공동체가 이 동성애문제를 다룰 때에 선교신학에 비중을 둘 것인가 교리신학에 비중을 둘 것인가도 중요합니다. 미국성공회의 경우에 동성애자 용인문제는 교회 안에서 교리적인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위해 시작된 문제라기보다는 실제로 사회에서 용인되기 시작한 동성애자들을 교회가 어떤 입장으로 대할 것인가 하는 현실 선교문제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동성애가 사회적으로 분명히 죄와 불법으로 규정되는 아프리카의 선교 상황에서는 교회의 입장이 또 다를 수 밖에 없게 됩니다. )  그러나 중요한 논점은 주교직의 직무에서 동성애자가 배제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직무에서 여성 주교가 배제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도 마찬가지 맥락의 물음인 것 같습니다. 요점은 '하느님의 백성'을 섬기는 일에 대한 선교적인 지평에서 그 주교직이 이해될 때, 기도서의 주교 직무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2) 전통적인 신앙적 가치와 선교적인 실천이 부딪히면 신앙적인 식별의 과제가 생깁니다. 이것은 곧 신앙적 권위의 문제입니다. 교회공동체가 신앙적인 분별을 할 때에 어떤 권위가 필요한 것일까요? 이른바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역설적인 긴장관계를 대신하여 어느 한 가지의 권위로 환원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요? 전통과 이성에 비해 성서의 권위가 우선적이라는 주장은 성공회 신학의 초석을 놓은 리처드 후커의 본뜻으로 주장되기도 합니다. 이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고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성서는 해석을 불가피하게 요청합니다. 그 해석의 문제를 <성공회 계약>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성공회 전통의 신학 방법인 성서와 전통과 이성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것은, 의회를 통한 주교직의 행사입니다. 신앙적인 식별을 <성공회 계약>에 의지하자는 발상이 자칫 “오직 성서” 또는 “관구장의 권위” 등의 선언을 내세워 전통적인 신앙적 식별을 대신하는 분위기를 조장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3) 세계성공회는 앵글리칸 콤뮤니언(Anglican Communion)으로서 세계적인 교단입니다. 그러나 세계 성공회는 역사적 주교직의 수평적이고 대등한 친교 안에서 일치와 상통을 드러내는 친교의 공동체(코뮤니언)이지, 어떤 제도나 법적인 문서에 따른 단일한 기구(천주교와 같이)가 아닙니다. 

   친교의 공동체(코뮤니언)은 하느님의 선교라는 공동의 지평 안에서, 각각의 사회적 문화적 맥락과 상황에서 그 지역 공동체가 그 선교적 사명을 수행하도록 돕고, 그 실천에서 서로 배우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 상호 친교를 통해서 서로 도전하고 도전받으며 배우고 자라는 것이 코뮤니언이며, 이것이 최소한 성공회가 발전시켜온 선교의 몸으로서 교회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만일 <계약문서>의 서명이 세계성공회의 일치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된다면, 이 때의 일치는 천주교의 교황제도나 개신교의 (이른바 종이교황으로 비판될 수 있는 ) ‘오직 성서만으로’의 주장이 시도하는 획일적인 일치와 어떤 다른 차별성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다소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5. 다시 우리 서울교구의 현실로 돌아오면

(1) 저를 포함한 우리 대한 성공회 공동체는 <성공회 계약>에 서명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어떤 차원으로 고민하는 것일까요? 이 계약에 있는 성공회 선교의 이해, 성공회의 본질적인 특징, 성공회 전통에 대한 자부심을 발견하고 있는 것일까요? 소박하게 이해하여 동성애 문제로 인한 교회의 분열을 막으려는 좋은 의도로 나온 문서이고, 우리와 별 상관 없다고 여겨지는 문제이기도 하니, 대세에 따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일까요?

(2) 우리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사목적인 논란들이 있을 때 (성직자의 설교에 대한 신자들의 불만과 도전, 신경의 사용 여부 혹은 대안적인 신앙 고백 사용 여부, 교회와 사회의 관계 등에 대한 이견)이 존재할 때, <성공회 계약>은 우리 교회의 일치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선교라는 측면에서 <계약 문서>가 주는 도전이 있는가 하면, <계약 문서>는 어떤 의견이 대세를 이루면 그것이 어떤 상황에서 그 선교적인 목표와 결정이 나왔든 무시할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때, 우리의 주교직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성공회 계약>이라는 문서에 기대야 하는 것일까요? 신자와 성직자들과 친교를 이루면서 복음의 가치와 사도적인 가르침과 그 선교 활동의 빛에서 합의된 융통성 있는 지도력을 보일 것인가요? 이런저런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3) <성공회계약>에의 서명문제는 아직 우리에게 절실하게 와 닿는 문제가 아니니 적당히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일까요? 가령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다수결로 그저 찬반 가부를 결정하면 되는 문제일까요? 현실적으로는 의회를 통해서 그런 결정방식으로 처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사전에 더 깊은 신학적인 숙고가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사후에라도 더 깊은 이해가 요청되는 것은 아닐까요? 서명을 하든 아니하든 간에 이 <성공회계약>이 반영하고 있는 성공회의 사도적, 전례적, 선교적 정체성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우리의 신학적인 이해와 응답을 요청하며 중요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4) 역사적 주교직의 전통 안에 있는 한국 성공회는 과연 교회 내의 신앙적인 일치를 위해 어떤 권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선교라는 지평에서 나오는 신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깊은 숙고와 성찰이 부족한 채로, 의회를 통한 다수결로 그 권위가 세워지는 것일까요? 이렇게 되면 신앙적인 식별이 아니라, 어떤 입장에 따른 편가르기, 표모으기 같은 세속적인 정치 행태로 변질되는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마도 그것은 우리 교회의 권위, 주교직의 권위를 참되게 세우지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공회가 이해하고 발전시켜 온 역사적 주교직은 하느님의 선교를 위해 하느님의 백성을 바르게 섬기며 함께 하나되어(일치하여) 선교의 일꾼이 되기 위한 방법입니다. 이 선교의 지평 속에서만 우리 교회의 공동체성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5) 좀 더 구체적으로, 이를 위해서 우리 교구는 그 선교를 위한 일치의 도구인 주교직 안에서 농촌 교회 같은 작은 교회, 그리고 도시 교회나 큰 교회가 서로 상통하는 관계에 있으며, 이를 진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보게 됩니다. 상황과 조건이 열악한 교회를 감당하는 일이 선교적인 봉사의 기쁨이 되기보다 내키지 않는 부담감으로 여겨진다면 가슴 아픈 일일 것입니다. 
도시에서는 전통적인 전도구 개념이 무너진 후에 교회의 입지나 교우들의 교회 출석이 어떤 기준인가 부터가 애매모호해진 현실입니다. 주교직은 이러한 개별 교회들의 상통과 일치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점들을 이야기하고 고민하는 일이, 우리가 세계 성공회의 일치를 위한 문서에 서명하여 일치를 추구한다는 명분보다도 더 중요하고 실제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6) 성공회는 우리 교회의 공동체 생활과 일치를 전례와 선교라는 틀에서 이해해 왔고, 주교직은 그 틀 속에서 성직자들과 신자들의 일치를 도모하는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전례와 우리의 선교를 위해서 어떤 연구와 시도를 해 온 것일까요?
  선교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다른 형제 교단들, 즉 천주교, 정교회, 개신교 등과 나눌 수 있는 부분과, 우리가 그들에게 전하며 도전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주교직의 지도력 안에서 발전시켜온 것일까요? 다른 교단들의 성과와 반성을 통해서 되돌아 보건대, 지금 우리가 세우는 양적 성장이라는 목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하느님의 선교에 사심없이 복무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주교직에 깃든 선교와 전례를 통한 교회의 일치를 무시하고서라도 우선 달성해야 할 사명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저 절박한 현실적 생존의 문제일까요? 역사적인 주교직이 담고 있는 전례와 선교의 공동체로의 일치에 대한 전망과 그 내용의 튼튼한 구축이 수량적인 지표보다 우선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7) 물론 이런 물음들에 대하여 간단하게 대답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유익하지도 않습니다. 좀 더 신중하게 인내하고 기도하며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노력이 소중한 물음들입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이끌고 열어가시는 선교의 지평에 따라서 지역 공동체의 주교직 안에서 일치를 이루며 펼쳐가는 선교의 사명이 우리 대한성공회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우리의 헌장법규, 우리의 신앙과 직제에 이미 충분히 담겨져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으면 합니다.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종호/ 분당교회, 선교교육원 평신도교육담당 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