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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글

[옮김] 깨달음과 義化 vs 保任과 聖化 (이경래 신부)




 

깨달음과 義化 vs 保任과 聖化

 http://cafe.daum.net/seoulforum/EEx2/498

 

몇년전부터 한국 기독교계에서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가 화자되고 있습니다. 대한 성공회도 또한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영성에 관련된 여러가지 훈련, 교육, 기도, 세미나 등등 여러가지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이른바 ‘전통’을 타파하고 ‘성서’를 유일한 기치로 내걸었던 개신교에서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그동안 등안시했던 영성’전통’에 대한 탐구와 배움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영성과 신학은 서로 한몸처럼 붙어있는 知와 行이었던 것인데 이단에 대한 대처, 교회권력 싸움 등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신학을 강조하다보니, 신학(知)과 영성(行)이 점차 분리되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영성적 실천이 결핍된 지나친 신학적 사변에 대한 몰입은 서로를 갈라놓고 오해하고 화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이념화된 파편들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최근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점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전통이 서구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우리가 영성을 언급할 때 서양의 개념들을 통해 받아들이지만, 동아시아 ‘맥락(sitz im Leben)’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겐 동양의 전통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영성수련에 있어서도 동양과 서양의 전통을 함께 익힌다는 것은 저에게 보다 깊은 이해와 보다 넓은 실천의 폭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를 나눠볼까 합니다:

그리스도 영성전통에서는 크게 두가지 큰 흐름이 있습니다. 하나는 ‘의화(justification)’이고 또 하나는 ‘성화(deification)’입니다. 전자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으로 하느님의 절대적인 은총에 대한 주도권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크리스챤을 잡으러 다마스커스로 가던 길에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은총의 힘으로 회심한 사건이 대표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자는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데, 기도와 자선, 봉사 등의 행위를 통해 우리의 삶이 점차 하느님을 닮아가는 完德의 길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기에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주장해서 개신교에선 의화를 강조하고, 천주교에선 성화를 강조했지만, 오늘날 이 두가지 길을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역사에서 아씨시의 프란시스,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같은 영성의 대가들의 삶을 보면, 하느님을 강하게 체험한 ‘의화’도 있지만, 이를 깊이 간직하고 자신의 삶 안에서 꾸준히 펼쳐 나간 ‘성화’도 있었습니다.

 

서양 그리스도교 전통에 ‘의화’와 ‘성화’라는 개념이 있다면 동양에는 ‘깨달음(覺)’과 ‘보임(保任)’이란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이란 본래의 나 – 유가에선 이를 理, 불가에선 性-인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보임이란 ‘보호임지(保護任持)’의 준말로, 견성하여 참된 자아, 참된 도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참된 자기를 보호하고 지켜나가는 생활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동양의 전통에선 깨달음보다도 깨달은 후인 ‘보임’을 더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득이수난(得易守难)-얻기는 쉬워도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보임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유가에선 이를 ‘거경궁리(居敬窮理)’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즉 학문과 수양이 필요한데 그것은 마음을 맑게하고 정신통일하는 경지로까지 유지하는 ‘거경’과 사물-인간의 참된 본성을 포함-의 궁극적인 근거인 ‘리’를 밝히는 ‘궁리’인 것입니다. 이러한 도학자적인 몸가짐과 학문태도는 송나라의 주자학과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선비들, 그리고 주자학을 심화시킨 퇴계의 사상을 수용한 일본의 학자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우리 동아시아인의 영성전통인 것입니다.

 

그동안 한국의 그리스도교는 개신교이든, 천주교이든 세계가 부러워할만한 참으로 놀랄만한 성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사회에 여러가지 긍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급속하게 빠른 성장과정 중 일부 부정적이고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몇년전부터 개신교계에서 일고 있는 ‘영성’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성장일변도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내실을 기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영성, 특히 ‘깨달음’ 혹은 ‘의화’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자칫 또하나의 독단을 낳을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과거 일부 교회에서 성령체험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령체험을 한 신자들이 영적교만에 빠져서 교회에 분란을 가져왔던 일들이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이를 보존하고 꾸준히 심화시켜 나가는 ‘보임’ 혹은 ‘성화’의 훈련도 그 못지않게 값질 것입니다.

 

추신 : 올 겨울 이곳 천진에도 예년과 달리 눈이 자주 왔습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습니다. 집 앞에 공터 갈대밭에 내린 설경을 보고 있자니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퇴계 이황의 ‘산거(山居)’라는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조상들의 그림과 시를 대신해 저의 마음을 표현해 봅니다.


莫道山居无一事 산중에 사는 사람이라고 아무 할 일 없다 말을 마오.

平生志愿更难量 내 평생하고 싶은 일 헤아리기 어려워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