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하나이다. 아멘

 

어제 아침 조용히 앉아 지난날을 되돌아보니 아득한 세월 속에 묻혀 있던 기억들이 하나씩 되살아나가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도 넘는 1970년 여름 동대문 교회에서 어느 날 김진만 교수님은 저에게 “프란시스,신학교에 들어가지 그래?” 하고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에게 교수님의 이 말씀은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들렸고 몇 달을 고민하던 끝에 저는 시작한지 2년밖에 되지않던 직장을 뒤로하고 성공회 신학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교수님의 신앙적인 열정과 지적인 매력에 흠뻑 빠져 나도 모르게 성직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교수님께서는 만40세가 되시던 1966년에 성공회 주교좌 성당인 이곳에서 고(故)이천환 주교님으로부터 세례와 견진을 받으시고 성공회로 입문하셨습니다. 당시의 지성을 대표하시던 분이 갑자기 성공회로 입문하시면서 장안의 화제가 되어 여기저기 인터뷰 기사가 실렸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이후로 교수님은 미국 올바니 교구의 도움으로 고려대학교 근처에 작은 집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우리 청년들과 함께 저녁기도를 바치며 새로운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청년들은 교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신앙의 기쁨과 매력에 이끌려 자주 모였고 모짤트를 특별히 사랑하시던 선생님과 함께 ‘꿀꿀히 합창단’을 만들어 기쁘게 성가를 부르던 즐거운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대문 교회의 기초가 마련되어 새로운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교구나 성직자가 주도한 교회설립이 아니라 평신도의 지도력으로 대한성공회 최초의 독특한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관할 사제도 전문적인 사제가 아닌 고 이문범 휴고 선부님이 명예사제로 세속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제로 봉사하시는 형태였습니다.

동대문 교회를 시작으로 당시 금호동교회 지금의 약수동교회가 세워지고 지금의 도봉교회의 전신이 성북교회가 세워지게 되고 천호동 교회 지금의 강동교회가 다시 시작되게 됩니다. 참으로 대한성공회의 새로운 중흥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1970 년대 이런 분위기 속에서 1-2 년 사이에 6 명의 대학생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성공회 신학원의 문을 두드렸고 저도 그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온 교우들이 동대문 성당에 가득히 모여 함께 구성가집 144 장의 “비둘기 같이 내리신 위로의 성신이시여"를 4부로 함께 부르면 온 교회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내리는 듯 했고 모든 사람들은 신앙의 기쁨에 한껏 취해서 열정을 다해 성가를 부르던 기억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교수님은 교회의 크고 작은 일에 언제나 앞장서시어 너그럽게 당신의 호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우리 가난하던 신학생들과 대학생들,그래서 늘 배가 고팠던 우리들은 얼마나 자주 교수님 덕분에 푸짐한 식사를 할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방학이면 사정이 딱한 신학생을 당신의 집에 받아들여 기거하도록 하기도 하셨습니다. 뒤에서 묵묵히 이러한 일을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셨던 클라라 사모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수님은 언제나 일찍 교회에 나오셔서 가난하거나 나이가 든 교우들을 특별히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고 기쁨 가득한 얼굴로 다가가 친절하게 손을 잡아 주시고 다정하게 대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환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너무나 과로한 나머지 쓰러지시는 바람에 여기 계시는 이재천 선생님에게 업혀 병원으로 실려가시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40 대 중반이셨던 교수님의 삶은 선앙의 기쁨과 열정,지성과 이성,그리고 삶의 실천적인 면이 찰 조화된 성공회 선앙의 모범 그 자체였습니다. 이렇게 교수님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신앙운동을 일으키시며 한국성공회의 발전에 새로운 주춧돌을 놓으셨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1971 년에 교리학원을 세우시고 평신도들을 위한 신학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성직자도 중요하지만 교회를 이끌어 갈 중요한 지도력은 선학을 공부한 평신도들에게서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지금 너무나 성직자 중심으로 흐르고 있는 성공회 현실, 그래서 성직자와 평신도사이에 있는 신학적 사고의 큰 괴리를 생각하면 탁월한 혜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1970년대 당시 중요한 신학자들은 천주교 개신교를 망라해서 성공회 교리학원에 초대되어서 강의를 했고 교수님은 이 강의에 꼭 참석하시어 마무리를 짓곤 하셨습니다. 교수님은 에큐메니칼한 성공회 신학의 입장을 너무나 깊이 이해하셨고 그래서 광주대교구에서 은퇴하신 최창무 대주교님을 비롯한 천주교 분들과 개신교의 신학자들을 초청하셨습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폭넓은 신학적 사고는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가 함께 공동번역 성서를 펴내는 큰 일로 열매를 맺었고 교수님은 성공회 대표로 참여하시어 언어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셨습니다.


교수님은 한국성공회 최초로 세계성공회 협의회 대표로 활약하셨습니다. 유창한 영어구사와 신앙의 열정으로 해외성공회 회의에 한국의 대표로 참석하시어 한국성공회를 알리시고 세계성공회의 흐름을 한국에 알리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회적인 책임에도 관심을 기울이셔서 <성베드로학교>가 세워지는 일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도원을 특별히 사랑하시어 <성가친구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큰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노년에는 성공회 대학교에서 당신의 마지막 정열을 쏟아부으시면서 헌신해 주셨습니다.

 

되돌아보면 교수님은 참으로 불꽃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열정적인 삶 한가운데는 교회에 대한 사랑과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과 함께 성공회 안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저의 인생에도 커다란 행복이고 즐거움이었습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몇 년 동안 어려운 병을 얻으시어 병석에서 투병하실 때 가끔 찾아가서 봐올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한번도 실망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점점 야위어 가시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 한마디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셨지만 저는 그분의 삶이 점점 정화되어 가고 당신의 존재의 근원이신 분에게로 가까이 가고 계신다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에서 언제나 주도권을 가지고 당선 스스로 행동하고 결정하시던 모습에서 점점 의존적인 존재로, 어린아이처럼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저는 선생님의 얼굴이 점점 맑아지시고 선생님의 존재가 점점 더 가벼워지시며 궁극적인 구원의 길로 가까이 가고 계시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에 때로 휩싸이곤 했지만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선생님을 감싸고 계시는 듯한 생각이 들었고 선생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들과 점점 하나가 되어 가시는 듯 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예전의 모습 그대로는 뵐 수가 없습니다만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선생님은 영원히 살아계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인생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물거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구원의 길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부디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드시고, 당신이 믿고 의지해 오신 구원의 주님께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법니다. 그리고 한평생 곁에서 묵묵히 선생님과 함께 하셨던 클라라 사모님과 김재영 요한을 비롯한 모든 자손들 위에 하느님의 특별하신 위로와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법니다.

끝으로 선생님께서 쓰선 많은 글 중의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저의 말씀을 끝내고자 합니다.

“현대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슐라이어마헤르는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 이르는 길’을 분간해서 얘기했다. 전자는 가톨릭, 후자는 개신교식이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성공회 신학자 스티븐 사이크스에 의하면, 성공회는 두 가지를 다 포용한다. 성서를 신앙과 교리의 기본으로 삼고 말씀과 성사를 아울러 존중하는 성공회는 보수적인 개혁론을 따르는 교회이다. 성공회 안에는 제도적인 것을 강조하는 가톨릭파와 내면의 믿음과 복음을 강조하는 복음주의파가 함께 산다. 한국 성공회에는 전통적인 가톨릭주의가 흐르는 한편, 1980년대 이래 성령운동의 파급에서 오는 영성 또한 눈에 뛴다. 그 두 갈래가 균형을 이루기만 한다면 더 없이 좋은 교회이다.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한 집착이 너무 큰 나머지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잊혀지고 퇴색할 염려는 없는가?

성직자나 교인의 수, 교회 건물의 크기 등, 가시적인 것에서 우리는 천주교나 개신교를 따라갈 수가 없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의 믿음과 사랑,사귐과 봉사, 그리고 교회 구성원들 사이를 좌우 종횡으로 이어주는 뜨거운 정으로 경쟁하면 절대 승산이 있다.” (‘거룩한 공회’ 김진만 저,105쪽) 

                                                  (2013. 2. 12  오전08:30 /서울주교좌성당/ 박경조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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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기쁨의나무 임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