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평화를 향한 기도문
천지만물의 생명이고 평화이신 하느님
당신의 거룩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지상에서도 완성되게 하소서.
하늘과 땅이 하나요,
천심이 민심이고 민심이 천심인줄 알게 하소서.
하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며, 민의 앞에 겸손하고 공경하게 하소서.
인간과 자연이, 숲과 꽃이, 바위와 돌이 하나인줄 알게 하소서.
이웃과 나 또한 한 뿌리요 한 몸임을 늘 기억하게 하소서.
너 없이 나 없고, 타 존재가 내 존재의 지주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생명의 강, 민족의 젖줄이 영원히 흐르게 하소서.
인간의 탐욕 아래 고통 받고 죽어가는 모든 생명에게 용서를 구하게 하소서.
굽이굽이 저 산맥과 저 강물 위로
하느님의 영과 마음이 하나로 흐르고 있음을 알게 하시고
이 모든 존재들이 파괴와 공멸이 아닌, 상생과 공존의 길을 가게 하소서.
남과 북이 본디 하나의 핏줄이고 민족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고통과 상처는 보듬고, 화해와 일치의 만남을 이어가게 하소서.
숱한 세월, 수많은 의인과 역사적 염원이 일구어온
민족통일의 의지와 희망이 단절되지 않게 하소서.
민족애와 평화통일을 향한 열망이
그 무슨 의혹과 장벽도, 시련도 난관도 이길 수 있게 하소서.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 강원도 경기도
서울도 지방도, 촌도 도시도 모두 하나임을 알게 하소서.
산과 산이 만나 산맥과 산맥으로 휘어가듯
강과 강이 만나 대하를 이루고 민족의 혈맥으로 흐르듯
씨줄날줄 서로 얽히고설킨 한 몸 한 존재, 한 핏줄임을 알게 하소서.
독선과 오만, 독재와 억압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게 하소서. 성장하게 하소서. 굳건하게 하소서.
거짓과 어둠을 물리치고, 역사와 문화가 살게 하소서.
진리와 정의로움을 선택하게 하소서.
사랑과 자비를, 생명의 귀함과 존재의 소중함을 선택하게 하소서.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웃음을 지켜주시고 꿈과 미래, 희망을 놓지 않게 하소서.
실의와 절망, 비탄에 잠긴 이웃과 함께 하게 하소서.
냉담과 무관심은 녹여주시고, 이웃의 아픔에 귀 기울이고 위로하게 하소서.
의혹과 두려움을 이기게 하소서. 용기로 넘어서게 하소서.
남이 아니라 우리임을 지키게 하시고, 연민과 연대로 공생하게 하소서.
물욕과 탐욕의 길이 아니라, 영혼과 정신의 길을 무엇보다 앞에 두게 하소서.
비겁함과 이기심을 이기게 하소서.
더불어 살게 하소서.
사람의 길을 살게 하소서.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평화의 길을 가게 하소서.
하느님,
이 모든 당신의 거룩한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지상에서도 부디 완성되게 하소서.
9월 4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문규현 신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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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이 땅의 품에 안기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온 숨을 땅에 바치고, 땅이 베풀어 주는 기운으로만 기어서 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오체투지’가
온전히 생명과 평화의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문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으로는 더 넓게 더 멀리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손으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것과 반대로
무릎을 굽히고, 팔꿈치를 꺾고, 머리를 숙여
온몸을 땅에 붙이고 기어서 가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나의 ‘오체투지’가
생명의 바다를 평화로이 떠다니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체투지’는 인간다움의 표상인 ‘직립’에 반하는 일입니다.
직립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 짓게 했고
인간들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만물의 폭군’이기도 합니다.
인류의 역사가 그것을 증언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위협적인 생명체도 ‘인간’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 속에는
‘지구상에서 가장 모순된 생명체’라는 의미도 숨겨져 있습니다.
‘생명의 질서’를 거스르는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인간의 걸음에 반하는 ‘오체투지’에서
‘사람의 길’을 찾으려 합니다.
‘사람의 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만물을 지배하는 데서 ‘사람다움’을 찾으려 한다면,
인간의 폭력성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인간의 위대성을 인정받으려 한다면
유사 이래 인간이 저지른 무수한 폭력과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생명의 실상’을 통찰하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바도 바로 ‘생명의 실상’입니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써 이것이 존재할 수 있는 만유의 실상을 통찰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연기(緣起)’와 ‘공(空)’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공’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로서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공입니다.
나(我)는‘땅’과 ‘물’과 ‘태양’그리고 바람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와 만물은 ‘한몸’입니다.
사람의 사람다움은 이웃과 자연을 내 몸처럼 여기고
부처님으로 공경하는 데서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어렵습니다.
이치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옳은 줄 알지만 기꺼이 실천하기가 어려우니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참회’와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의 ‘오체투지’는 참회와 기도입니다.
절집 밥을 축낸 지도 40년이 넘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수행자답게 잘 살았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벌써 ‘나이가 벼슬’인 때가 되고 보니
이런저런 대접을 받을 일도 많아졌습니다.
만약 이런 삶을 그냥 수용한다면
수행자로서 나의 삶은 끝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도 허망한 삶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체투지’의 길을 갑니다.
처절하게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며
수행자로서 나의 삶을 반조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환계(還戒)’의 심정으로
‘오체투지’를 합니다.
다시 부처님께 계를 바치고
초심으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계율로부터 자유로워졌다거나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의미에서 ‘환계’가 아닙니다.
진정 ‘계체’를 얻을 수 있기를 발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삭발한 머리와 먹물 옷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평화’를 노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출가자라 하여
마냥 세상의 시비분별로부터 물러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여야 합니다.
‘번뇌의 진흙탕’이 바로 ‘보살의 정토’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는 한 누구도 세상의 선악 시비 분별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함몰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조사님들이 일깨워 주신 바
‘번뇌가 보리’인 이치를 체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알게 모르게
‘번뇌가 보리’라는 가르침을
치열하지 못한 삶의 변명으로 삼으며
조사님들을 욕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체투지’의 길을 나섭니다.
만물을 길러내는 어머니 대지의 품에
온몸과 마음을 던지고 또 던져
번뇌의 한가운데서 평화로워질 수 있는 생명의 길을 찾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사에 시름겨워하고 있습니다.
나의 ‘오체투지’가 이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나의 기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할 따름입니다.
세상을 제대로 보고
사물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로 서는 계기가 되어서
내가 변한 만큼이라도 세상이 변화고
나와 인연이 닿는 생명들과 선한 기운을 나누게 하는
평화의 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힘겹고 외로운 누군가가,
땅바닥에 엎드려 자신과 같이 어깨를 들썩이는 걸 알고
작은 위안이라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라의 사정이 어지럽습니다.
살림살이가 어려우니 몸이 고달파지고
민주주의가 위협 받으니 인간적 자존감이 상처를 받습니다.
현 정부의 권위주의적 국정 운영 방식이
민주주의와 생태, 인권의 위기는 물론
종교간 대립까지 부추겨 국민 통합을 해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위기 국면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위기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더 큰 위기가 위기를 덮어버리는 식으로 위기를 넘겨 온 것입니다.
어쩌면 위기를 위기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인식의 부재가 더 큰 위기인지도 모릅니다.
타성적인 위기 인식으로는 위기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위기를 해결할 길이 무엇인지를 다 압니다.
마땅히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알지만 그 길을 가지 않을 뿐입니다.
대통령답게, 기업가답게, 국회의원답게, 공무원으로서 공복답게, 공권력으로서 경찰답게, 종교인으로서 신부는 신부답게 목사는 목사답게, 수행자로서 스님네들은 스님답게…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신의 길을 걸어가지 않기 때문에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직분답게 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잘 알 것입니다. 다만 아는 대로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 ‘오체투지’를 합니다.
나의 ‘오체투지’가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보고
만물동체라는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의 길’을
한 뼘이라도 넓히는 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생명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평화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신 ‘사람의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불기 2552년 9월 2일
만생명의 평안을 기원하면서
수경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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