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중독의 다양한 형태들 !
공진수 목사(경신교회)
1. 과도한 종교 활동
과도한 종교 활동에 중독된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얻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 잡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선행을 높이 평가해 줄 날을 고대하며 맹렬하게 일에 몰두한다. 하나님께서 고통스런 현실의 삶을 바꿔주실 날을 소망하며 열심을 낸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노고를 감찰하사 고통을 제해주시거나, 아니면 그들의 인생을 다른 사람 인생보다 더 안락하게 해주시리라는 일종의 기적을 소망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업적과 선행, 그리고 희생의 토대 위에서 행복이라는 왕국을 만들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능력으로 삶의 성공을 도모하는 자와 다를 바 없다.
교회의 모든 기관에 속해서 봉사해야만 한다는 중압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또는 모든 지역 활동에 교회가 참가하여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의 잡다한 일들의 홍수 속에서 가정이 등한시됨은 당연지사이다. 이 같은 행태 속에는 선행이 하나님의 축복을 얻게 해준다는 그릇된 믿음이 짙게 배어 있다. 다른 중독현상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고통을 회피하고자 하는 하나의 술책이다. 그들은 열심히 일하고, 허둥대며, 빨리 달린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다른 사람들 보다 한 발짝 앞서 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좀 더 열심히 일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있다.
2. 나태
상처 주는 신앙을 가진 자는 게으르다. 나태는 상처 주는 신앙을 가진 자들이 보이는 자기 파멸적 행위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들의 신앙은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책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그들은 재빨리 하나님께 달려가 해결해 주길 원한다. 결혼 상담자를 만나기보다는 기적을 바라는 기도를 한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에게 하기를 원하는 일들을 도리어 그들은 하나님께서 해 주시기를 요구한다. 결혼 상담자를 찾아가기가 거추장스럽다. 그리고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이 같은 책임 있는 일을 하기 보다 게으른 사람은 단지 기도에만 매달린다.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결혼생활을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결혼상담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고통스러운,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성장 단계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그들이 이 과정을 통과하길 원하신다.
수많은 종교적 중독자들은 나태와 게으름의 세계로 물러나 팔짱을 끼고 있다. 그곳에서 만사가 자신들을 위해서 기적적으로, 신비스럽게 성취되길 갈망한다. 하나님께는 그들이 도랑에서 기어 나오는 모습을 보길 원하신다. 그래서 즉시로 그들 자신들에게 직면해 오는 난관을 대적하여 뚫고 나가서 성장하길 원하신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그리하지 않는다. 그들은 나태하다. 그들은 자신들을 섬겨주는 하나님을 원한다. 하나님께 봉사하려 하지 않는다. 모든 난관을 제거해 주고 고통을 즉각적으로 멈추게 하는 마약과 같은 우상을 원하고 있다. 이 같은 신앙은 상처주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중독성이 있다. 그것은 성도의 타락을 조장하는 무책임한 신앙이다. 왜냐하면 이 신앙은 성도들에게 완전히 그릇된 소망과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3. 투자로서의 헌금
다른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면 더 많이 돌아오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영적인 예배 행위나 헌신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적인 투자행위라 해야 옳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재산이 불어나리라 믿는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청지기 사역에 충실한 자에게 물질적 축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그 축복이 반드시 재물의 형태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자기 수입의 35-40%까지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다. 재물을 약속받는 것이 헌금을 드리는 동기가 아니다.
어떤 엉터리 신앙인들은 자동차를 달라는 자신의 기도가 확실히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아래 실로 터무니없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기도 한다. 그는 얼마간의 돈을 마련하여 자동차를 할부로 구입한다. 그리고는 득의양양하게 운전해 온다. 그 다음에는 신문에 이 사실을‘기적’이라며 투고한다. 신문에 실린 이 기사가 아직도 자동차를 가지고 있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진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일 더 좋은 신앙을 가지고 더 많은 돈을 바치기만 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물질적 소유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은연중 배우게 된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이러한 증거들로 인해서 그들은 더 많은 돈을 하나님께 바친다. 자신들이 바라는 소중한 것들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시리라 기대하면서.
하나님은 돈으로 매수되거나 살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로 이 같은 행동을 자행한다. 그들의 돈은 하나님께 바쳐지기 보다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는 라스 베가스 도박판에 투자됨이 차라리 더 낫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요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종종 그들의 투자한 돈에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중독이 하나님의 진실한 추종자에게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무모한 도박꾼과 같은 신앙인들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4. 자기 집착
자기 집착은 상처주는 신앙 형태, 종교적 중독, 그리고 다른 모든 중독들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고통과 필요, 그리고 위안에만 관심을 쏟는 자기 집착자들은 다른 사람의 요구를 만족시켜 주거나, 하나님을 경배하는 데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욕구가 최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등 이것이 이상하지 않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라”고 하셨다. 양을 먹임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라 명하셨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라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도취에 빠진 이기적인 사람들은 다른 양을 먹이거나,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들을 돕는 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해 나가는가 하고 주목할 따름이다. 그들이 눈을 비비고 보는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주시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해주신다. 그리고 축복을 주기도 하신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도 한다. 때로 그분은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하고 불치의 병까지도 쾌유시켜 주신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간섭으로 불릴 수 있는 이러한 일들이 종종 있다. 이것을 흔히 기적이라 부른다. 그것이 기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아주 희귀하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기적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 자체 보다 기적 자체를 믿는 신앙에 더 가깝다. 참된 신앙은 단지 하나님의 기적에만 관심을 집중하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5. 극단적인 편협성
극단적인 편협성의 소유자들은 타인의 다양한 행동이나 의견들을 수용하지 못한다. 자기방식만을 고집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융화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을 용납하기보다는 그들을 무시해 버린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그들 생활 속의 부정적인 면을 발견하려 한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그 신앙 행동을 경멸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고자 한다. 특별히 그들의 신앙을 지배하고자 한다.
극단적인 편협성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신앙관과 기준을 유지하기 위해 친구들과 가족관계까지도 희생한다. 스스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일을 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한,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관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질타한다. 다른 사람들이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있다고 정죄하기도 한다.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가장 고상한 믿음의 기준을 유지하고 있다는 착각 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과 믿음의 행위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이로써 그들을 지배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릇된 믿음을 낳는다. 그리고 지극히 율법적인 신앙관을 만들어 낸다. 자녀들은 그들의 이러한 편협성에 감히 저항하지 못한다. 그들 부모의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종종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할 기회조차 원천봉쇄 당한다.
6. 종교적 엑스타시에 도취됨
신앙 생활이 종종 삶의 고통과 좌절에 대해 커다란 위안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더 이상 삶의 문제들에 짓눌려 살지 아니한다. 그렇다고 해서 삶의 모든 문제가 단 번에 해결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도 않는다. 이것은‘나의 짐은 가볍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믿는 신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그러나 위안 중에는 위와는 성질을 달리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 엑스타시를 통해서 얻어지는 거짓된 위안이다. 이 위안은 중독성이 있으며, 사람으로 하여금 신앙의 실체에서 멀어지게 한다.
교회 수련회를 다녀와 본 사람이라면 종교적 흥분이 어떤 것인지를 익히 짐작할 것이다. 의례히 수련회 마지막 밤이 되면 산에 올라가서 열렬히 기도하고, 눈물을 쏟으며 결단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산상 체험”(mountain top experience)이다. 수련회가 끝나면 그들은 캠프를 떠난다. 이 때 그들은 황홀하고 신령한 신앙 체험을 잃어버리지 말도록 목사님이나 전도사로부터 단단히 주의 받는다.
그러나 “산상 체험”의 흥분이 점점 가라앉고 냉정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들은 종교적 흥분자가 아니라 결국은 현실의 “평범한 사람”(downer)으로 돌아온다. 학생들은 캠프에서 만났던 동료, 목사님, 그리고 선생님과는 생판 다른 사람들, 즉 자기를 도와주지도, 또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현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기적적인 신앙 체험을 하고 난 후, 현실에 적응하려 하지 않거나, 또는 적응하지 못한다. 현실에 적응하기 보다 거짓된 종교 체험과 영적 흥분을 조장한다. 자극적인 종교적 충동이 실제적으로 그들에게 힘을 주고 흥분시킨다. 그것이 그들의 우울한 기분을 바꿔주고 현실적 고통에 위안을 가져다 준다. 좋은 기분을 느끼고 싶거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때에는 언제고 이같은 병적인 흥분 상태에 반복적으로 빠져든다. “즉각적인 종교 체험”을 일삼는 자들은 마치 알콜 중독자나 약물 중독자, 그리고 마약 주사를 맞는 자와 다를 바 없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배하고자 함이 아니라 현실 감각을 바꾸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종교 중독자들이다. 그리고 찰나적인 쾌락과 기분 전환에 도취되어 삶을 사는 자들이다.
종교 중독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해주지 못한다. 도리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장벽을 만들뿐이다. 그것은 사람을 중독시켜 하나님을 경배하는 참다운 신앙 체험에서 멀어지게 한다. 모든 사악한 것을 이루기 위해 허둥대게 만들뿐이다.
타락한 신앙인에게 남겨지는 것은 결국 더 큰 고통일 뿐이다. 이 고통들은 해악된 그들 신앙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던 원래의 고통을 확대 재 생산한다. 모든 종교적 중독은 가족과 친구,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송두리째 파괴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뢰 자체를 혐오한다.
상처 주는 신앙도 이와 동일하다. 상처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도 없고, 또 신뢰하려고도 않는다. 그들의 신앙은 쇠붙이의 녹처럼 부식된다. 그들은 그들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는 존재가 될 뿐이다. 이미 고질화된 그들의 신앙의 틈새에는 강압, 율법적인 종교 활동, 중독, 억압, 그리고 열광적인 노력 등으로 채워진다. 이러한 행위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심령은 결코 안식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이 너무나도 왜곡되어 있기때문이다.
7. 상처주는 신앙에 대한 역설
약물에 중독되었을 경우에는 그 약물 사용을 절제하면 된다. 그러나 신앙에 중독되었을 경우에는 단순히 절제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신앙적 중독이 다른 약물 중독과 구별되는 요인이다.
여기 상처주는 신앙의 역설적 교훈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알콜 중독을 방지하는 방법은 금주(禁酒)나 절주(節酒)이다. 절제를 못하는 사람은 중독되게 마련이다. 술을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그는 점점 더 중독 증상을 보이게 된다. 식사량도 마찬가지이다. 무리하게 과식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소량의 음식을 먹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그는 적게 먹는 데에서 만족하는 법을 찿아야 한다.
그러나 신앙에는 이 같은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참되고 순결한 신앙을 가지기 위해서 우리가 굳이 신앙 행위를 중단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신뢰하고 찾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조금도 지나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신앙이 완전히 성숙된 자는 없다. 그런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신앙의 위인이고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이상형의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상처 주는 신앙의 다양한 형태들은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조차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가장 파괴적인 신앙과 비교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다. 결코 신앙이라고 볼 수 없는 일들이 엄연히 신앙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오늘날이다.
일단 어떤 사람이 그릇된 신앙에 중독되면, 그를 치료하여 순전한 신앙인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아주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병적인 요소를 하나 하나 발견하는 작업이 이 치료의 시발이다. 상처 주는 신앙과 행태를 연구하는 일은 신앙의 초보자들에게도 귀중한 경험이 된다. 왜냐하면 이 작업을 통해,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경배하는 더 깊은 신앙적 차원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작업에는 실로 만만찮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다. 신앙 중독자의 내면상태를 관찰하고 해악된 신앙의 요소를 발견하여 제거하는 일이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착에 깊이 빠져 있고, 자신의 신앙에 너무 강하게 도취되어 있다.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어떻게 병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병이 하나님과 인간 관계를 파괴해 왔는지를 깨닫게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그릇된 신앙을 버리게 하고 바른 신앙을 갖게 하는 작업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 물론 하나님과 신앙을 뒷전으로 제쳐놓고,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최악으로 만들어 온 그들에게 있어서 이것이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고통이 하나님과 교제하기 보다, 그분을 지속적으로 악용하는 것에서 얻는 고통보다 훨씬 덜 하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상처주는 신앙 지식을 계속 가지고 살아갈 때 발생하는 고통과 두려움보다 훨씬 가볍다는 사실도 직시하여야 한다.
독성을 가진 신앙을 해독시키고자 하는 노력들 속에서, 중독자들은 몇몇 어려운 단계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당신과의 교제를 위해 베풀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다. 참다운 신앙의 토대 위에서 이뤄지는 영적 교제만이 우리를 참된 만족과 진정한 기쁨으로 인도한다.
'옮긴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옮김)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의 기도문 (0) | 2008.09.08 |
---|---|
(옮김) 근본적으로는... (0) | 2008.07.04 |
(옮김) 부흥하는 교회들의 부흥은 과연 진정한 부흥일까? (0) | 2008.06.12 |
(옮김) 시국선언문 -미국산쇠고기 수입에 대한 입장- 대한성공회정의평화사제단 (1) | 2008.06.12 |
(옮김) 복음주의권이 잘못 이해하는 6개 단어 (랄프 윈터) (2) | 2008.05.29 |